형만 한 아우 없다는 말? 엘리자베스 올슨, 리암 헴스워스 등 ‘형’ 못지않게 승승장구하고 있는 할리우드 ‘동생’들의 사례를 보면 이미 옛이야기가 돼버린 지 오래다. 대표주자가 엘르 패닝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엘르 패닝(Mary Elle Fanning)을 이야기하기 위해선 먼저 친언니인 다코타 패닝(Hannah Dakota Fanning)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다코타 패닝은 일곱살에 출연한 영화 데뷔작 <아이 엠 샘>(2001)에서 대배우 숀 펜에 밀리지 않는 강력한 연기를 선보여 순식간에 할리우드가 가장 사랑하는 아역배우의 자리에 올라섰다. 이후 그는 톰 크루즈, 덴젤 워싱턴, 로버트 드니로 등과 공연하며 자신만의 견고한 필모그래피를 충실하게 쌓는다. 동생 엘르 패닝은 그에 반해 평범했다. 성인배우 못지않게 뛰어난 재능과 감각을 갖춘 배우로 인정받았던 다코타 패닝 옆에서 엘르 패닝은 한참 동안 그저 언니보다 조금 더 키가 크고, 조금 더 귀엽게 생겼을 뿐인 동생에 지나지 않았다. 엘르 패닝이 배우로서 가장 처음 맡았던 역할도 <아이 엠 샘>에서 다코타 패닝이 연기한 루시의 어린 모습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TV시리즈 <테이큰>(2002)에서도 역시 다코타 패닝의 아역을 연기했다. 지브리 애니메이션 <이웃집 토토로>(1988)의 미국 버전에서는 패닝 자매가 나란히 자매(사츠키, 메이)의 목소리 연기를 맡았다. 엘르 패닝은 언니의 그늘에 안주하려 하진 않았지만 또한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완벽하고 능수능란한 언니를 넘어서려고 굳이 애쓰지도 않았다. “우리 자매는 서로 많은 걸 공유하지만 엄연히 다른 사람이란 걸 인정하고 각자의 영역을 존중해요.” 다코타 패닝의 말대로 ‘잘난 가족’을 지척에 두고 성장했으면서도 엘르 패닝은 열등감이나 자격지심의 기색 따위는 비춘 적이 없다. “제일 좋아하는 배우? 당연히 다코타 패닝이죠.” 오히려 자신의 언니가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배우임을 자랑스러워하며 언니의 장점을 스펀지처럼 쑥쑥 흡수해 훌륭한 한 사람의 배우로 잘 자라났을 뿐이다. 언니와의 차이를 고민할 필요도 없이 자매는 자라는 동안 자연스럽게 각자의 개성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사춘기를 맞기도 전에 엘르 패닝은 떠오르는 할리우드 셀러브리티가 된 동시에 소녀들의 워너비 스타로 발돋움했다. 엘르 패닝이 즐겨 입는 꽃무늬 원피스는 단박에 유행 아이템이 되었고, 엘르 패닝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당연한 듯 파파라치에게 사진을 찍혔다. 어린 마음에 으쓱해질 법도 하건만 엘르 패닝의 관심은 유명세에 있지 않았다. 엘르 패닝은 자신이 어떤 위치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자신이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최우선으로 즐겼다. “단지 일종의 믿음만이 필요해요. 무엇이든 상상하거나 창조할 수 있죠. 그게 내가 연기를 사랑하는 이유예요.”
다코타 패닝이 일찍부터 세상사에 초월한 듯한 성숙한 눈빛 연기를 펼쳤다면 엘르 패닝은 천진한 얼굴로 갈등을 보듬는 사려 깊은 역할을 도맡았다. <업타운 걸스>(2003), <맨 온 파이어>(2004), <우주전쟁>(2005) 등에서 조숙한 언니가 철없는 또는 연약한 어른들에게 깨달음을 전하는 동안 동생은 아이다운 해맑음으로 어른들에게 순수한 감동을 선물했다. 그가 처음으로 주요 배역을 맡은 작품인 <대디 데이 케어>(2003)에서는 실직 탓에 무턱대고 탁아소를 차려놓고 걱정이 태산인 찰리(에디 머피)를 제대로 살게 만들었고 토드 윌리엄스의 데뷔작인 <킴 베신져의 바람난 가족>(2004)에서는 사이가 좋지 않은 부부(킴 베이싱어, 제프 브리지스)의 귀여운 딸로 분했다. 촬영 과정이 녹록지 않을 <킴 베신져의 바람난 가족>을 찍는 동안 쭉 긴장상태에 놓일 아역의 컨디션을 고려해 제작진은 쌍둥이를 데려와 번갈아 연기를 시킬 생각이었다. 하나 엘르 패닝이 마음에 쏙 든 제작자는 처음의 계획을 뒤엎고 엘르 패닝만을 캐스팅했다는 비화도 있다. 엘르 패닝이 다코타 패닝만큼 역할의 비중이 크거나 주요한 배역을 맡은 건 아니다. 하지만 알렉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바벨>(2006), 토니 스콧의 <데자뷰>(2006), 테리 조지의 <레저베이션 로드>(2007) 등 이 무렵의 엘르 패닝의 출연작을 살피면 노련한 감독들이 그의 남다른 자질을 일찍부터 눈여겨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제대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이상한 나라의 피비>(2008)부터다. 투렛 증후군, 대개 틱 장애라고 부르는 정신장애을 안고 사는 소녀 피비가 연극을 통해 마음의 불안을 치유하고 희망을 얻게 되는 이야기다. 엘르 패닝의 배역 이름인 피비(Phoebe)를 그리스식으로 읽으면 ‘포이베’가 된다. 그리스신화의 포이베는 하늘의 신 우라노스와 대지의 신 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그 이름은 ‘밝게 빛난다’는 뜻을 갖고 있다. 엘르 패닝의 커리어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끼는 진작부터 엿보였지만 엘르 패닝이 배우로서 한 걸음 도약한 발판은 소피아 코폴라의 <썸웨어>(2010)다. 코폴라는 엘르 패닝에게 할리우드 배우로서 화려한 삶을 사는 아빠 조니(스티븐 도프)를 컨트롤하는 속깊은 딸 클레오 역을 맡겼다. 하지만 원래 코폴라는 엘르 패닝이 클레오를 연기하길 원하지 않았다. 코폴라는 얼마 되지 않은 삶의 대부분을 할리우드 스타로서 보내온 엘르 패닝이 그 정반대 지점에서 살아가는 클레오 역을 잘 소화해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유명세를 치르며 자라온 덕에 엘르 패닝은 조니의 고독과 흔들림을 보듬어주는 클레오가 될 수 있었다. 이유는 당연히 그 자신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삶이었기 때문이다. 제67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코폴라에게 황금사자상을 안긴 <썸웨어>는 이듬해 영 할리우드 어워드에서 엘르 패닝에게도 올해의 여배우상을 선사했다.
<진저 앤 로사>(2012)의 진저는 엘르 패닝이 겪어온 소녀들 중 가장 혹독한 성장통을 겪는 인물이다. 배경은 미국과 소련이 대치 중이던 쿠바 미사일 위기가 있던 때. 핵전쟁에 대한 공포가 사람들을 휘감을 무렵 진저는 반전시위에 참가해 적극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려 한다. 한날한시에 태어나 목숨과도 같이 지내온 친구 로사(앨리스 잉글러트)는 진저와 달리 투쟁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평화를 원한다. 사랑이 최우선인 로맨티스트 로사는 점점 진저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손쉽게 어른이 되기란 불가능하다. 로사의 변심으로 영원하리라 믿었던 진저의 어린 시절은 끔찍하게 깨져버린다. 진저는 자신의 이름만큼이나 쓰디쓴 고통을 감내해야만 어른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이제 엘르 패닝의 캐릭터는 안온한 어른의 품에 머물며 사랑스러운 미소를 짓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사랑스러운 맵시로 항상 유지하던 금발머리를 빨갛게 물들여 풀어헤친 것만 보아도 만만한 캐릭터가 아니란 걸 짐작할 수 있다. 과연 엘르 패닝의 진저는 다코타 패닝이 연기했던 그 어떤 조숙한 소녀보다도 강인하고 단단한 태도로 어른의 세계에 진입하려 한다. 그 냉엄한 세계에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순간 견디다 못한 진저는 산산이 부서져버리지만 그 부스러기들을 다시 주워 묵묵히 시를 써내려가는 그는 이미 한 단계 성장해있다. 마침내 엘르 패닝이 홀로서기에 성공한 것이다.
magic hour
디즈니 공주는 아무나 하나
뛰어난 배우인 다코타 패닝이 범접할 수 없는, 엘르 패닝만의 진짜 영역은 따로 있다. 총천연색의 드레스를 입고 순진한 얼굴로 왕자의 입맞춤을 기다리는 역할이다. 물론 하려면 못할 것도 없긴 하지만 역시 지성미 넘치는 다코타 패닝에게 디즈니 공주 역할은 어울리지 않는다. 반면 언니가 갖지 못한 솜사탕 같은 달콤함이 동생 엘르 패닝에겐 있다. 약간의 그늘과 나이답지 않은 성숙함을 지닌 다코타에 비해 엘르는 해맑고 순수한 얼굴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짧은 코와 둥근 뺨이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내 엘르 패닝을 더욱 소녀답게 만드는 것이다. 특유의 귀염성과 사랑스러운 외모를 100% 활용해 엘르 패닝은 <말레피센트>의 오로라 공주 역에 스스로를 최적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