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8일 일기에 <온리 갓 포기브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표적>에는 여성 인물 넷이 나온다. 중앙서 강력계 형사인 강영주(김성령)와 박수진(조은지), 임신한 채 납치되는 희주(조여정)와 광역수사대원 유현영(염지영)이다(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이들이 이야기 안에서 보여주는 물리적 힘과 지력, 문제 해결 방식은 여자라서 주어지는 특권 혹은 제약과 무관하다. 여전사가 아니라 열심히 일하는 경찰이고, 악녀가 아니라 그냥 악당이다. <의뢰인>의 김성령, <감시자들>의 진경과 한효주, <더 테러 라이브>의 전혜진이 구현했던 새로운 여성 인물형의 계보(系譜)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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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침몰했고 많은 것들이 함께 침몰했다. 아니, 진작 침몰하고 있었음이 확인됐다. <방황하는 칼날>과 <한공주>를 보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명제가 있었다. “내 아이만 지켜서는 내 아이를 지킬 수 없다.” 아이들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은 우리가 죽은 뒤에도 계속되고 세상은 터무니없이 넓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애들에게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모두의 아이를 모두가 지키는 방침이, 어떤 고결한 이유를 갖다 붙이기 전에, 제일 효율적이다. 그리고 국가의 법과 행정은, 서로가 서로의 아이를 지켜주리라는 사회 구성원들의 상호 신뢰가 허황된 꿈이 아님을 솔선해서 굳건히 보장하고 가장 유능하게 실천해야 한다. 오늘 이 생각은, 마치 썰물이 해변에 버리고 간 폐선의 잔해처럼 가슴을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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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적인 가부장과 비교해볼 때 억압적인 가모장은 좀더 극단적인 모습으로 영화에서 그려지는 경향이 있다. 얼마 전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의 메릴 스트립이 단시간 내에 일가친척 전원을 한명도 빠짐없이 비참하게 만드는 놀라운 어머니를 연기하더니 <온리 갓 포기브스>에서는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가 ‘지옥에서 온 엄마’의 실체를 보여준다.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가 연기하는 여인 크리스탈이 아들 줄리안(라이언 고슬링)과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하는 장면을 보자. 그녀는 아들에 관한 한 어느 단추를 누르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교활한 조작자다. 크리스탈 캐릭터의 원조는, 오이디푸스가 욕망했던 어머니 이오카스테 왕비이며, 친자식을 죽여서까지 배반한 남편을 징벌한 메데이아라고 할 수 있다. <온리 갓 포기브스>의 크리스탈은 성적인 모욕으로 아들을 도발하며, 관객은 모자의 대화를 통해 과거에 크리스탈이 아들에게 남편을 해치도록 사주한 일이 있음을, 즉 자식의 영혼을 ‘죽여’ 남편에게 복수했음을 짐작하게 된다. 영화에서 전례를 찾자면 앨프리드 히치콕의 <싸이코>와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의 <성스러운 피>에 등장하는 엄마들이, 크리스탈과 같은 ‘클럽’의 회원이라고 할 수 있다. <싸이코> <성스러운 피> <온리 갓 포기브스>의 아들들은 공히 어머니의 ‘손’ 노릇을 한다. 이 자명한 구도를 이해하기 위해 프로이트를 다시 정독할 필요까진 없다. 페니스를 갖지 못한 여성은 아들의 몸을 빌려 행동하고 아들은 행위가 잘되지 않았을 경우 죄의식을 어머니에게 전가한다.
영화의 설정과 캐릭터가 관객이 인지하는 신화, 종교, 심리학 이론의 원형에 부합한다는 사실은, 영화의 완성도나 감독이 도달한 사유의 깊이와 아무 관계가 없다. 그것이 보장하는 내용은 나와 감독이 한때 같은 책을 뒤적였다는 사실뿐이다. <온리 갓 포기브스>가 이론의 여지없이 성공적인 대목은 무드의 형성이다. 필름누아르에 빗대어 ‘필름 루즈’(film rouge)라는 말을 만들어 써도 어색하지 않은 붉은 톤의 섬세한 조명은 폐소공포증을 부르고 클리프 마르티네즈의 실험적인 영화음악은 피부를 통해 스며든다. 독한 향을 피운 아편굴에 누워 있는 기분이 이런 걸까 싶다. 갈림길은 그다음이다. 일단 조성된 독창적인 무드가 영화 전체를 끌어안아 어떤 사건이 어떤 매너로 벌어져도 적어도 극 내부에서는 작위적이지 않다고 여겨진다면 관객은 설득된다. <온리 갓 포기브스>에 갈채를 보낸 평자들은 이 동기화에 성공한 관객이다. 애석하게도 내게 <온리 갓 포기브스>는 “이건 또 뭔가?”의 연속이었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정말 천천히 움직인다. 속도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부자연스럽다고 느껴지지 않는다면 초속 5cm라 한들 누가 개의하겠는가. <온리 갓 포기브스>를 보는 동안 나는 자꾸 <씨네21> 화보 촬영의 한 장면을 떠올리고 있었다. 사진기자가, 연속 동작의 궤적을 담기 위해 셔터의 속도를 늘리고 배우들에게 가능한 한 느리게 방을 가로질러 달라고 부탁하는 상황 말이다. ‘자체 슬로모션’을 실행하는 배우의 몸에 흐르기 마련인 어색한 긴장과, 프레임 바깥에서 적당한 속도를 주문하고 있을 니콜라스 윈딩 레픈 감독의 시선. 그런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몰입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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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3부작이 피터 파커가 비정규직 생계형 히어로라는 속성으로부터 많은 재미를 발굴했다면 마크 웹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에서 최대의 방점은 피터가 ‘남자아이(kid)’라는 점에 찍혀 있다. 제 휴대폰 벨소리를 <스파이더맨 송>으로 설정해놓고 손발 오그라드는 줄 모르고 흥얼흥얼 따라 부르는 틴에이저. 이 이미지 안에 스파이더맨의 거의 모든 것이 있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1편의 최고 명장면은 피터가 거미줄로 놀이터의 트램펄린 같은 그물을 짜놓고, 휴대폰 게임으로 시간을 죽이며 적이 오길 기다리는 1분30초가량의 대사 없는 신이다. 1편에서 앤드루 가필드의 신임 스파이더맨이 여성 관객의 마음을 최종적으로 도둑질한 순간은, 뉴욕을 구하고 상처투성이가 된 피터가 밤늦게 집에 돌아와 숙모가 심부름시킨 유기농 달걀을 배낭에서 꺼내는 장면이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여자들은 피터가 멋있어서가 아니라 착한 소년이라서 사랑한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의 개성으로 널리 지적되는 멜로로서의 호소력도, 보호자로부터 독립하지 못한 소년 소녀의 연애라는 사실을 빼놓으면 남는 게 없다. <도슨의 청춘일기>나 수많은 미국 청춘영화에 등장한 이웃 남자친구의 전통에 따라 피터는 좋아하는 소녀의 침실 창문을 통해 들락거린다. 피터가 스파이더맨이 아니라면 고층 아파트가 즐비한 맨해튼 배경 영화에서 연출하기 힘든 장면이라는 점이 거꾸로 재미있다. 그웬에게도 피터는 비밀을 간직한 신비로운 영웅 남자가 아니라 ‘괴상한 알바’를 택한 남자친구에 가깝다. 마크 웹 감독이 1, 2편을 통틀어 닭살을 감수하고 피터가 고아가 됐던 나이 또래의 남자 꼬마들을 반복해서 팬이자 서포터로 등장시키는 것도 ‘영원한 소년’이라는 스파이더맨의 정체성과 관련이 있다. 피터에게 이 사내아이들의 롤모델 자리를 유지하는 일은, 곧 어린 고아였던 자신을 구원하는 것과 진배없다.
한데 이 시리즈의 소년성은 <어메이징 스파이더맨2>에서 일정 정도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 같다. 질풍노도기를 웬만큼 졸업한 줄 알았던 피터는 2편 초반에 새삼스레 “부모님을 잃었는데 벤 아저씨도 잃었는데 여자친구까지 잃으면 살아갈 자신이 없다”는 두려움을 토로하며, 해서 아예 여자친구 없이 살겠다는 절묘한 해결책(?)을 생각해낸다(물론 그래 놓고는 그웬의 주위를 래브라도종 강아지마냥 맴돈다). 주인공 영웅이 마음을 다스렸나 싶으면 악당 1번 일렉트로가 “사람들이 나한테 관심이 없어. 아무도 내 생일을 기억해주지 않아”라고 울먹거리고, 곧이어 아버지에게 방치된 경험으로 상처받은 악당 2번이 “만인을 돕는 스파이더맨이 나한테 헌혈을 안해줘”라고 신경질을 낸다. 한명이라면 몰라도 주요 인물 셋의 동기가 투정과 연결돼 있다는 점은 관객에게 꽤 부담이 된다. 유일하게 의젓하게 나이먹은 그웬이 ‘징징거리는’ 세 남자를 데려다놓고 등짝을 후려치며 철드는 법을 가르쳐주면 어떨까 그려볼 지경이다. 샘 레이미가 연출한 시리즈의 제임스 프랭코보다 훨씬 치명적인 존재감을 발휘하는 데인 드한의 해리 오스본이 결국 훌륭한 악당으로서 2% 미치지 못하는 이유도 동기가 유치한 탓이 크다. 물론 카리스마고 매력이고 일단 그린 고블린의 우스꽝스러운 헤어스타일과 의상으로 갈아입고 나면 말론 브랜도나 로렌스 올리비에가 온다 해도 얼간이처럼 보일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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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제국>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 <안국동 아씨> <한중록> <홍국영> <바람의 화원> <성균관 스캔들> <이산>…. 정조 치세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영화와 드라마를 꼼꼼히 적으려면 두루마리가 필요하다. 조선 22대 왕 정조 이산이라는 인물은 장르의 보고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그는 조선의 근대가 태동하던 시기의 군주였고, 기득권에 맞서 세금, 교육, 신분제, 수도 이전 등 국가 인프라를 개혁하려고 시도한 정치가였다. 사적으로는 아버지가 조부의 손에 주살되는 광경을 목격한 고대 비극적 트라우마를 안고 살았고 스스로 목숨이 위태로워 불안이 몸에 밴 인물이었다. 문헌들은 그가 다혈질에 폭풍 글쓰기를 즐기는 기질이 있었으며 활도 즐겨 쏘았음을 전한다. 뭐가 더 필요한가? 정치 스릴러, 실내 심리극, 멜로드라마, 액션, 퓨전 사극이 고루 어울린다.
이재규 감독의 <역린>은 정조가 보유한 다양한 코드 가운데 “왕이 된 ‘역적’의 아들”이라는 조건을 극의 초점으로 취하고 있으며 즉위 1년을 시기적 배경으로 선택해 허수아비 세손으로부터 옥좌의 온전한 임자로 단시간에 올라서야 하는 청년 왕의 절박한 상황에 집중하려는 기획이다. 요컨대 정유역변의 하루를 그린 <역린>의 부제는 <역적의 아들이 비로소 왕이 된 날>이다. 그러면 왜 관객은 정조(현빈)의 편에 서서 마음을 졸여야 하는가? 그가 많은 치적을 남긴 왕이었다는 상식을 접어두고, 영화 내부적으로 정조 이산이 ‘선한 영웅’인 근거는 첫째 민초를 대변하는 인물 내관 상책(정재영)과 나누는 형제애에서 나오고, 둘째 내레이션으로 반복되는 곧은 신념으로 확인된다. 정조의 신념을 함축하는 문장으로 <역린>이 <중용> 23장의 글귀를 택했다는 점이 시사적이다. ‘작은 일에 꾸준히 정성을 다하면 마침내 빛이 나고 끝내는 변화를 부른다’로 요약되는 이 구절은 현대 관객의 귀에 통치 철학이라기보다 개인이 갖춰야 할 보편적인 수신(修身)의 원리로 보인다. 정조 1년이 배경인 <역린>은 노론 벽파와 정조가 정치세력으로서 구체적 사회 경제 제도의 향배를 둘러싸고 쟁투를 벌이기 전 단계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으니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관객의 곤란은 영화가 전개되며 드러나는 <역린>의 다른 야심에서 비롯된다. 이 영화는 하룻동안의 실시간 스릴러가 되길 원하는 동시에, 펼치면 궁궐 안팎의 다양한 실존 인물과 가상 캐릭터의 삶까지 아우르는 열두 폭 병풍이 되기를 꿈꾼다. 그리하여 정조와 거의 유일하게 진심을 교환하고 상호작용하는 등장인물을 따라가다 보면 그의 유년기가 길게 끌려나오고 모종의 음험한 조직이 등장하며 마침내 불가피하게 이 조직을 사주한 권력의 실체에 관객의 주의가 가 닿는다. 역사에 의해 운명이 뒤틀린 인물들의 얼굴이 스크린에 하나둘 늘어가면서 관객은 “당대 역사를 움직인 힘이 과연 무엇이었기에?”라는 궁금증을 더이상 영화 바깥의 이슈로 제쳐두기 어려워진다. 한데 문제의 권력 실세, 노론 수장들은 <역린>이 그린 1777년 정유역변 인물 관계도에서 누락돼 있다. 대신 동서고금 어떤 영화에 넣어도 기성품 악역으로 기능할, 권력에 눈먼 팜므파탈과 아동 학대 킬러 양성소가 그 자리를 채운다. 나는 <역린>이 왕권과 신권을 각기 통치의 근본으로 옹호했던 정조와 노론 벽파의 갈등에 초점을 맞춘 <영원한 제국>과 같은 노선을 걸어야 했다고 불평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역린>의 이야기 구조가 관객을 정조가 극복해야 했던 안티테제가 무엇이었는지 질문하는 자리까지 데려다놓고는 답을 주지 않기 때문에 좌절을 안긴다는 감상을 털어놓는 것이다. <역린>은 심플하고도 깊은 이야기로 성실히 구상되었지만 복잡하고 얕은 이야기의 인상을 남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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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저 앤 로사>의 억지웃음
샐리 포터 감독의 <진저 앤 로사>는 다른 건 몰라도 엘르 패닝의 클로즈업만큼은 물리도록 볼 수 있는 영화다. 1962년 핵전쟁 공포 속에서 불안한 사춘기를 보내는 소녀 진저(엘르 패닝)는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전직 무정부주의자로서 가정을 ‘부르주아의 덫’이라고 부르며 아내와 딸을 상처주는 철없는 아버지를 내심 원망하면서도 아빠에게 멋진 여자로 인정받고 싶은 소녀는 분열을 일으킨다. 원하는 걸 말했다가 거절당할 때마다 진저는 조건반사적으로 입꼬리를 끌어당겨 미소부터 짓는다. 예쁜 아이의 웃음은 언제나 어른들을 안심시킨다는 점을 터득한 소녀가 실망을 은폐하는 호신술이다. 그러나 진저의 미소는 흐린 밤 먹구름에 싸인 달빛만큼이나 순식간에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