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게 점점 힘들어진다. 2시간 넘게 영화를 보고 밖으로 나오면 몸과 마음이 쓰레기통의 종이 뭉치처럼 꾸깃꾸깃 뭉쳐져 있다. 다림질을 해서 빳빳하게 펴면 좋겠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오랜 시간 다림질을 해야 겨우 주름이 없어진다. 아무리 다려도 완전히 펴지지 않는 부분도 있다. 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이 정도로 몸이 힘들진 않았다. 이유가 뭘까. 영화의 기술이 발달하여 감정이입이 훨씬 쉬워진 것일까? 아니면 내가 감정이입을 더 잘하게 된 것일까? 아니면 영화의 러닝타임이 점점 길어진 탓일까? 아니면 팝콘 냄새가 점점 이상해지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나이가 든 탓일까? 모르겠다. 이유는 한 가지가 아닐 것이다.
철학자 칼 포퍼는 “사람이 새로운 이해를 얻을 수 있는 가장 유용한 방법은 공감적인 직관 혹은 감정이입이다. 그것은 문제 속으로 들어가서 그 문제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나 들으라고 한 말 같은데, 칼 포퍼 아저씨, 이게 말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요. 몸이 이렇게 너덜너덜해지면서까지 타인의 감정에 이입해야만 하는 겁니까? 그 말은 마치 매트릭스 속으로 들어가서 매트릭스의 일부가 되어 매트릭스를 내파하는 키아누 리브스가 되라는 건데, 그런 능력을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잖습니까.
이렇게 엄살을 떨지만 내 직업이 ‘감정이입 전문가’인 것은 맞다. 소설 쓰기란 타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작업이다.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창문으로 안을 엿보고,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문을 부수고서라도 타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작업이다. 그런 일을 여러 번 반복하다보면 능숙한 전문가가 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사람 마음의 구조는 모두 달라서 들어갈 때마다 매번 애를 먹는다. 마음으로 들어갈 때 준비해야 할 작업 도구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들어가는 방법은 늘 모른다. 소설의 경우와 달리 영화는 단번에 주인공의 심장으로 진입한다. 표정 하나와 동작 하나에 쉽게 감정이입된다. 시각은 활자보다 간편하고 능률적이다. 수백개의 열쇠가 달린 열쇠 꾸러미를 들고 하나씩 자물쇠에 맞춰보는 게 소설이라면, 곧장 마음의 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게 영화일 것이다.
예전에는 주인공이 감정의 파도를 뚫고 지나가는 영화를 보고 났을 때만 몸이 아팠다. 함께 겪고, 함께 고민하고, 함께 선택하고, 함께 울었으니 몸이 힘든 게 당연했다. 마음이 아프면 몸도 힘들다. 언제부턴가 유쾌한 오락영화를 보고 난 뒤에도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극장을 나설 때면 온몸에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뼈마디가 쑤셨다. 감정에 초점을 맞춘 영화를 보고 난 뒤의 통증이 몸살 같은 것이라면, 오락영화를 보고 난 뒤의 통증은 피로감과 비슷했다. 슈퍼맨과 함께 우주를 날고, 스파이더맨과 함께 건물과 건물 사이를 건너뛰고, 캡틴 아메리카와 함께 적을 때려부쉈으니 피곤한 게 당연하다. 감정이입이 아닌 ‘감정과 행동이입’인 셈이다. 내 엉덩이는 분명 의자에 붙어 있는데, 내 팔과 다리는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서 주인공과 함께 적을 물리치고 있는 듯했다. 기이한 경험이다. 몸이 한없이 늘어나는 기분이고, 몸이 분리되는 기분이고, 감각이 쪼개졌다가 스크린 속에서 합쳐지는 기분이다. 이거 원, 4D영화도 아닌데 이렇게 관람이 힘들어서야… 극장 가기가 점점 겁이 난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무단횡단을 하다가 내리막길을 급히 내려오던 자전거에 부딪힌 적이 있다. 왼쪽 다리를 크게 다쳤다. 병원으로 실려 갔을 때의 공포가 지금도 생생하다. 병실 천장에 달린 환한 등이 지금도 보이는 것 같다. 어떤 시술의 일환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다리뼈를 다시 맞추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의사가 내 다리를 붙들고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그때 내 키는 겨우 150cm 남짓이었을 텐데 한 5m는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몸은 한없이 길어졌고, 내 다리가 있는 곳은 (조금 과장하자면) 건물 바깥인 것 같았다. 그때의 통증에 대해 얘기할 때마다 나는 과장법을 쓰게 된다. 정말이지 말도 못하게, 죽을 만큼 아팠다, 라고 써도 그때의 고통을 표현할 수는 없다. 고통은 언어의 바깥에 있다. 단어의 너머에 있다. 그때 내가 내뱉은 말은 “내 다리 내놔”가 전부였다. 어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의사를 죽여버릴 것처럼 소리를 질렀’고, 잃어버린 다리를 찾아 구천을 떠도는 귀신보다도 서럽게 울부짖었다고 한다. 내 목소리를 녹음해서 <전설의 고향>에 써도 될 정도였다고 한다. 누군가 멀고 먼 건물 바깥에서 내 다리를 끌어당기고 있는 것 같았다.
초기 인류들은 ‘몸은 그보다 더 중요한 영혼을 담는 비효율적인 용기’로 여겼다. ‘몸은 그 안에 사람이 들어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단단하게 고정된 몸이 부서지기 쉬운 영혼을 보호한다는 생각은 오랫동안 계속됐지만 현대 과학자들은 사람의 뇌가 몸을 허구적으로 구성한다는 걸 알아냈다. 어떤 실험으로 우리의 코가 저 먼 곳에 있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으며, 책상이 우리 손인 것처럼 감각할 수도 있다. 인간은 외부의 어떤 것(사람이나 사물)에 감정이입함으로써 실제로 아플 수 있다는 걸 발견했다. 책상이 자신의 손인 것처럼 감각하는 사람은 책상을 내려칠 때 함께 아프다. 어떤 사람은 자동차 등이 깨질 때 함께 마음의 등 하나가 깨진다. 누군가와 깊은 사랑에 빠졌을 때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드라마 <다모>에 나왔던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는 대사는 얼마나 과학적인 말이었던가). 우리의 신체는 뇌에 의해 확장될 수 있고, 확장된 것처럼 감각할 수 있다. 몸은 감각을 가둘 수 없다.
영화를 볼 때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인간은 시각적으로 손쉽게 현혹되는 동물이다. 간단하게 착각하고, 단순하게 몰입한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감각은 몸을 벗어나 스크린으로 뛰어든다.
육체적 감정이입의 고통에는 두 종류가 있을 것이다. 스포츠영화(특히 권투영화)나 액션영화를 볼 때처럼 온몸이 부딪치는 장면에서 함께 이를 악다물고 싸우게 되는 감정이입이 있을 것이고, 하드고어영화나 재난영화를 볼 때처럼 주인공의 신체가 훼손되는 데서 오는 고통의 감정이입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함께 부수는 것이고, 하나는 함께 훼손되는 것이다. 둘 다 고통스럽다. 그런 의미에서 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러스트 앤 본>은 두 가지 고통이 함께 곁들여진, 완벽한 ‘고통영화’라 할 만하다. <러스트 앤 본>의 마지막 장면은 두번 보기 힘들다. 세월호 침몰 사건 이후라면 더더욱 그렇다. 자꾸만 어떤 일을 상상하게 되고, 고통에 감정이입하게 되어서 몸이 힘들다. 마지막 장면을 최대한 늦게 말하고 싶어서 나는 자꾸만 글의 결말을 미루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러스트 앤 본>을 보고 라마찬드란 박사의 ‘가상현실 상자’를 떠올렸다. 고통과 통증과 거울과 얼음의 이야기는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