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영화제] ‘블루칼라의 시인’이 그리는 인간다운 세상
2014-05-21
글 : 이현경 (영화평론가)
켄 로치 특별전 ‘켄 로치의 시대정신: 레드 & 블루’
<빵과 장미>

노동 계층의 삶을 꾸준히 영화화해온 영국 감독 켄 로치 특별전이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5월20일부터 6월1일까지 열린다.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켄 로치 대표작 중 10편이 상영된다. 이번에 상영되는 작품은 <케스>(1969)를 제외하고 1990년대부터 2007년까지 작품들로 선정되었다. 이 시기 켄 로치는 <랜드 앤 프리덤>(1995),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 등의 작품을 연출하여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이번에 상영되는 10편은 켄 로치의 세계를 압축하는 작품들로 그의 영화 세계에 입문하는 관객부터 시네필까지 두루 만족시킬 수 있을 것 같다. 올해 개관 12주년을 맞이한 서울아트시네마는 서울에 있는 유일한 비영리 극장이자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서울아트시네마 외에 비상업적 목적의 극장은 한국영상자료원에 3개관이 있을 뿐이다. 지난 5월10일 서울아트시네마는 개관기념영화제 대신 관객과 함께하는 행사를 진행했다. 지난해 서울시가 상정한 시네마테크 전용관 건립진행비용안이 의회에서 부결된 뒤 현재 아무 진척이 없는 형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켄 로치 특별전은 여러모로 의미 있게 느껴진다. 영국은 영화 제작과 극장 운영 등에 공적 자금을 투입한 좋은 사례를 갖고 있다.

영국의 다큐멘터리 전통과 이를 잇는 1950년대 영국의 프리시네마 운동은 켄 로치의 영화적 배경이 된다. 프리시네마 운동은 노동 계층의 일상과 사회의 실상을 사실주의적 영화로 그려낸 일련의 영화들을 지칭한다. 린제이 앤더슨, 캐럴 라이츠, 토니 리처드슨 등이 프리시네마의 대표적인 감독들이다. 다큐멘터리 작업에 참여한 경력이 있는 켄 로치는 바로 전 세대인 이들 감독의 영향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1960년대 TV드라마로 감독 데뷔한 켄 로치의 필모그래피에서 <케스>는 분기점을 이루는 작품이다. 영국 북부 탄광촌에 사는 15살 소년 빌리와 야생의 매 케스가 맺게 되는 인연과 우정을 다룬 <케스>는 켄 로치의 스타일을 구축한 작품이다. 짓궂고 삐딱한 소년 빌리는 암울한 동네에서 꿈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탄광에서 일하는 것 말고 다른 미래가 없는 곳에서 답답한 생활을 견디던 빌리는 우연히 야생 매 둥지를 발견한다. 빌리는 매를 훈련시키기로 결심하고 각고의 노력 끝에 매와 친구가 된다. 하늘을 우아하게 나는 매와 탄광촌에 속박된 소년의 대조적인 모습이 인상적이다. <케스>는 켄 로치의 대표작이자 성장영화의 수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케스>의 분위기와 정서는 <빌리 엘리어트>(감독 스티븐 달드리, 2000)로 이어진다.

<레이닝 스톤>

이번에 상영되는 켄 로치 특별전은 초기작 <케스>를 제외하고 1991년 <하층민들>에서 2007년 <자유로운 세계>까지 9편이다. 1930년대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영국인 이야기를 다룬 <랜드 앤 프리덤>과 1920년대 아일랜드 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가장 잘 알려진 켄 로치 작품이다. 2006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영국 배우 킬리언 머피를 세계적으로 알린 영화이기도 하다. 스페인 내전과 아일랜드 독립운동은 많은 영화의 배경이 되었는데, 켄 로치는 세계적인 이슈에다 영국적 정체성, 자기의 영화적 스타일을 살려내 좋은 성과를 얻었다. <레이닝 스톤>(1993)은 블랙코미디로, 일찍이 일링 스튜디오가 개발한 영국식 유머를 느낄 수 있다. 일링 스튜디오에서는 주로 살인사건을 소재로 해 코미디를 만들었지만 켄 로치는 노동 계층의 무자비한 삶에 살짝 유머감각을 덧붙였다. 비토리오 데 시카의 네오리얼리즘 영화 <자전거 도둑>을 연상시키는 <레이닝 스톤>은 유머가 있어 더 서글프다. 먹고살기 위해 도둑질까지 하는 실직 가장들의 애환을 그린 <레이닝 스톤>은 진보적 좌파의 입장도 아울러 담아낸 영화다. 딸 성찬식에 입을 드레스 값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사위를 안쓰럽게 여긴 장인은 “있지도 않은 답”을 찾아 헤매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는 “노동자에게는 일주일 내내 돌덩어리가 비처럼 내린다”라며 개인적으로 해결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 비를 피할 수 없다는 설명을 한다. 비싼 돈을 들여 성찬식 예복을 마련하는 것이 아빠의 도리이자 신앙인의 의무라는 사고는 노동 계층 스스로 만든 굴레일 수 있다.

이번 특별전의 명칭은 ‘켄 로치의 시대정신: 레드 & 블루’다. 켄 로치의 영화가 단순히 노동 계층의 삶을 대변하고 핍진하게 묘사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는 걸 알려주는 명칭이다. <칼라 송>(1996)과 <자유로운 세계>(2007)는 제3세계의 현실과 이주노동자 문제로 시선이 확장된 영화들이다. <칼라 송>은 영국의 버스기사와 니카라과에서 온 불법 체류 여성 칼라의 만남부터 시작된다. 글래스고에서 버스를 운전하는 조지는 부당한 일에 분노하는 면은 있지만 그냥 평범한 노동자로 살아왔다. 조지는 어느 날 자신의 버스에서 무임승차 시비에 휘말린 칼라를 돕게 되고 그녀에게 마음이 끌린다. 니카라과에서 온 칼라는 자신에 대해 좀처럼 입을 열지 않다가 조지의 진심을 확인하고 사연을 들려준다. 조지는 니카라과에 두고 온 연인 때문에 죄책감을 떨치지 못하는 칼라를 위해 니카라과로 함께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너무나 이상적인 인물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생생한 현실을 담은 화면은 이런 간극을 메워준다. <자유로운 세계>도 영국에서 일하는 불법이민자들의 문제를 다룬 영화다. 켄 로치의 이전 작품들에 비해 덜 알려졌지만 영국의 노동문제를 여러 측면에서 조명한 영화다. 성희롱 문제로 해고당한 여성이 불법이민자들에게 직업을 알선하는 일을 하면서 부당한 현실을 깨닫는다는 내용이다. 영국인과 제3세계 불법이민자라는 신분이 매우 큰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열악한 노동조건을 견뎌야 한다는 점은 크게 보아 같다고 할 수 있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빵’이 노동의 대가라면 ‘장미’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누려야 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빵과 장미’라는 구호는 1910년대 미국에서 벌어진 이주노동자 중심의 파업 현장에 등장했다고 한다. 켄 로치의 <빵과 장미>(2000)는 영국이 아닌 미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로, 멕시코에서 온 이주노동자 마야의 각성과 투쟁을 담고 있다. <하층민들>, <내 이름은 조>(1998), <네비게이터>(2001)는 영국 노동자들의 현실을 다룬다. <하층민들>은 일용직 노동자와 가수 지망생의 사랑 이야기를 뼈대로 하고 있고, <내 이름은 조>는 알코올중독인 실직자와 보건소 여직원의 로맨스를 바탕으로 둔다. 그러나 냉정한 현실은 두 작품의 주인공이 달콤한 연애에 빠질 수 없는 장벽으로 다가온다. 켄 로치는 실직 노동자들이 마약과 술에 빠져들고 정신적인 문제까지 겹치게 되는 상황을 영화에 담아내는데 <내 이름은 조>도 그런 계열에 속한다. 영국 철도 민영화 이후 철도 노동자의 악화된 실상을 보여주는 <네비게이터>는 지금 우리에게도 민감한 문제를 다룬 영화다.

이번 켄 로치 특별전에는 영화 상영뿐 아니라, 오픈토크, 좌담, 강연, 영화해설 등의 특별행사도 함께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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