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아니라고, 당신 싫다고
2014-05-22
글 : 김정원 (자유기고가)
<찌라시: 위험한 소문> 등에서 찾아본 사장의 도(道)
<찌라시: 위험한 소문>

이걸 직업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다, 사장. 나한테 직업을 물어보면 기자라고 했지 (퇴사 두달 전에 졸라서 간신히 달았던) 과장이라고 하지는 않았으니까(참고로 과장됐다고 월급이 오르지는 않았다. 대체 무엇을 위한 과장이었던가). 하지만 우리 회사 사장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이 사람의 직업은 사장이다, 그리고 사장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태어나는 것이다. 세상의 빛을 보는 순간 이미 사장이 될 운명이었던 그는 사장의 아들이었다.

모든 직업엔 업무가 따르는 법이다. 우리 회사 사장 A씨도 하루를 바쁘게 보낸다. 아침에 나오면 비서가 내린 커피를 마시며 서너종의 신문을 읽고, 밖에서 법인카드로 누군가와 점심을 먹고, 한두 시간 낮잠을 잔 다음, 목청 좋게 통화를 하며 술 마실 약속을 잡고, 헬스클럽에 가서 두 시간 운동을 하면, 어느덧 퇴근시간. 하루가 짧기도 하지. 틈틈이 밖에서 사기꾼을 데려오거나 사기꾼이 하는 말을 듣고 와서 혼란을 야기하여 직원들의 근무시간을 늘리는 것도 A씨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이다.

사실 A씨가 특별한 사장은 아니다.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로 직장을 옮기다 보니 그만큼의 사장을 만났는데, 사장으로 태어났다는 인간들은 거의 비슷하다. 처음부터 사장이었으니 금 나와라 뚝딱 할 뿐 땅 파서 광맥 찾아 금 캐는 사정은 모른다. 세상에 사장 없는 회사는 없으니, 슬프다, 내가 딛고 온 곳마다 모두 사장이다.

<찌라시: 위험한 소문>을 보다가 문득 감동했던 건 그래서였다. 찌라시 제작 업체의 박 사장(정진영)은 자기가 만든 찌라시 때문에 자살한 연예인의 매니저가 쳐들어와서 난투극을 벌이다가 직원이 부상을 입자 원한에 차서 중얼거린다. “아이씨, 병원비 들어가겠네.” 뭐야, 지금 병원비를 자기가 내겠다는 거지! 무릇 사장의 도(道)란 이런 것이 아닐까. 좆된 건 좆된 거고, 책임은 지는. 하지만 현실은 사장에게만 말랑하다.

<체지방계 타니타의 사원식당>

사장의 장난질 때문에 자갈밭으로 추락해서 운신을 못하느라 두달 사이 몸무게가 4kg 늘어났던 나는 병원비는 물론이요 그 살을 빼느라 한달에 ○○만원을 내고 필라테스를 반년 했다. 어찌하여 살은 올 때와 갈 때 속도가 다르단 말인가. 요즘 사장은 나를 볼 때마다 흐뭇해한다. “김정원은 다이어트 성공해서 좋겠어?” 저기, 다이어트 아니거든, 나 원래 이랬거든. 다이어트, 라고 하니 다시금 울분이 차오른다. 그는 사장의 손자였다. 비만이었던 그는 먹고 마시는 걸 무척 좋아해서 법인카드를 들고 수발을 들다 보니 내 몸무게는 석달 사이 3kg이 늘어났다. 그 또한 흐뭇해했다. “나 만나서 잘 먹다 보니 살이 올랐구나. 날마다 맛있는 거 먹으니까 좋지?” 아니라고, 난 원래 맛있는 걸 먹고 살았고, 지금은 맛있는 게 아니라 지방과 알코올을 먹고 있는 거라고! 난 한달 월급을 털어 PT 30회 요금을 결제했고, 3개월 카드 할부가 끝나던 달에 사표를 냈다.

무릇, 사장의 도(道)란 이런 것이 아닐까. <체지방계 타니타의 사원식당>의 (사장은 아니지만 사장 아들인) 부사장 고노스케처럼 ‘굶지 않는 다이어트’를 위해 영양사를 고용하고 사원들에게 건강한 식단을 제공하는 것. 체지방계를 파는 주제에 고도비만으로 5년 시한부 판정을 받은 (설마, 의사가 농담한 거겠지) 고노스케는 사원 식당 메뉴를 개혁하여 그 조리법으로 체지방계를 팔아치우고 베스트셀러까지 낸다. 500㎉가 조금 넘는다는 아보카도와 치즈 카레는 정말 한번 먹어보고 싶었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

우리 회사에도 사원 식당이 있다. 풀밭은 풀밭이되 샐러드가 아니라 짜디짠 겉절이와 무침, 나물이 주를 이루는 밥을 먹다가 나는 단백질 결핍이 되었다. 농담이 아니다. 체성분 검사를 마친 필라테스 강사는 나한테 “살 뺀다고 야채만 먹으면 안 돼요. 고기 좀 먹어요”라고 말했는데… 아니라고, 다이어트 아니라고! 요즘 나는 내 돈으로 도시락을 싸서 다닌다. 사원 복지로 약속받았던 ‘중식비’는 그저 ‘풀밭 위의 점심’이었을 뿐, 내 고기는 내가 사냥한다.

그나마 월급을 돈으로 받으니 다행이다. 월급이 몇달이나 밀리던 끝에 사표를 냈더니 “의리 없게”라며 욕을 처먹었던 나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보면서 분개했다, 정든 고향을 떠나 초콜릿 공장에서 노동을 하며 공연까지 하는 (한국에서 착취당한 아프리카 무용단이냐) 움파룸파에게 카카오 열매로 월급을 주다니. 회사에서 먹고 자는 것 같던데 설마 퇴근시간도 없는 건 아니겠지.

사장이 아닌 세상 모든 직장인의 심금을 울린 명저 <사장의 본심>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사장들은 ‘정상’, ‘파이팅’, ‘가족’ 같은 단어에 무한한 애정을 지니고 있다고. 사장 A도 그 말을 자주 쓴다. “우리 ○○○ 식구들하고 말이지, 한번 파이팅을….” 아니라고, 식구 아니라고! 내가 거친 숱한 사장 중 한 사람을 두고 상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장은 B국장을 아들처럼 생각하는 게 분명해. (진심 가득한 눈망울로) 식구도 아니고 남한테는 그런 막말 못하지.” 우리는 사장을 사장이라 부르지 못하고 아버지라 부르는구나. 다시 한번, 명저 <사장의 본심>에는 사장에게 예쁨 받기 위한 방법으로 이런 게 나온다. 사장이 하고 싶지만 직원들이 싫어할 만한 말을 알아서 미리 하라.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바쁠 때는 야근도 좀 하자”(하지만 사장 A는 전기요금 많이 나온다며 업무 집중도를 높여 야근하지 말라 그랬다. 그러니까 퇴근시간에 퇴근하게 방해 좀 하지 말라고).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수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알아서 미리 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다. 날마다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경험에 소스라친다. 그러면서 생각하지, 이것이 성공의 열쇠로구나. 나는 <사장의 본심>을 읽기만 했지 실천하지는 못했는데 세상엔 사장 되기를 꿈꾸며 행동하는 지성이 많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 또한 놓친 것이 있다. 그들의 수장은 행동하지 않았다, 그냥 태어났다.

다음 생엔 좋은 사장 만날 수 있을까

예쁨 받는 사장이 되기 위한 두세 가지 방법

개인기 사장 A는 사람들 앞에서 시를 낭송하거나 명언을 들려주는 걸 무척 좋아한다. 사무실엔 대단한 명사라는 누가 붓글씨로 써준 명언이 있어 그가 즐겨 암송하는데, 그는 모른다, 그걸 써준 사람과 그걸 말한 사람은 다르다는 사실을. 그가 그 명언의 뜻을 되새길 때마다 나는 너무 부끄러워서 사무실 문틈으로 빠져나갈 수 있을 때까지 다이어트를 하고 싶어진다. 그에 비하면 <주유소 습격사건>의 악덕 사장 박영규처럼 조용필의 <고추잠자리>를 열창하는 것이 시 낭송보다 한결 낫다. 나름대로 웃기고, 가사도 정확하고, 저작권도 제대로고.

적절한 복지 친구가 요즘 일주일에 세번, 한번에 한 시간, 상암동 하늘공원에서 조깅을 한다고 했다. “너는 회사는 서교동이며 집은 구로동인 녀석이 어째서 상암동에서 뜀박질을 하느냐”고 추궁했더니, 친구가 울먹했다. 철인 3종 경기 마니아인 사장이 배 나온 사원들을 추려 공원으로 실어가서 감시한다고 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사장이 해줄 일은 <체지방계 타니타의 사원식당>처럼 맛있고 건강한 식단이라고요, 극기 훈련이 아니라 사원 복지. 친구를 애도하며 기원했다, “올해는 5월부터 석달 열흘 장마이길 바랄게.” 친구가 흠칫하더니 이내 눈물이 맺혔다. “사장이 비 맞으면서 달리는 쾌감이 최고라고 했어.” 올해 장마는 없는 걸로.

험한 일은 내가 당시 출판사 편집자였던 터라 엄정화가 작가로 나오는 영화 <베스트셀러>가 남달랐다. 거기 나오는 출판사 사장은 전형적인 속물이었지만 한 가지 높이 살 점이 있었으니, 엄정화를 제 손으로 자른 것이었다. 그때고 지금이고 현실이었다면 내가 했겠지. “작가님, 제 뜻은 결코 그렇지 않은데… 정말 죄송하고요, 부끄럽고요, … 우리 다음 세상에서 더 좋은 인연으로….” 빈말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사장 없는 세상에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우리 모두 다음 세상에선 좋은 사장 만나기를, 가능할 것 같진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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