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팬들 사이에 ‘배거슨’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홈구장 올드 트래퍼드 벤치에 앉아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껌 씹는 습관을 재연해 웃음을 주었던 SBS 아나운서 배성재를 두고 축구 팬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월드컵을 시작으로 2012년 런던올림픽 그리고 올여름 열리는 브라질월드컵까지 굵직굵직한 축구 대회를 중계했고, 한주의 축구 소식을 전하는 <풋볼 매거진 골! >(이하 <풋매골>)을 오랫동안 진행해온 그다. 스스로를 ‘<풋매골>의 중심’이라고 부를 만큼 그의 재치 있는 언사와 축구에 대한 열정은 축구 팬들도 일찌감치 알아봤다. 월드컵을 앞둔 현재, 예능 프로그램 <정글의 법칙 in 브라질>(SBS)에 출연해 브라질의 아마존 정글까지 ‘답사’하고 돌아온 그를 만났다.
-어젯밤(11일) 프리미어리그 마지막 라운드 맨체스터 시티 대 웨스트햄 중계가 있었다.
=1위 맨체스터 시티와 2위 리버풀의 승점 차이가 2점밖에 되지 않아 나름 흥미진진했다. 하지만 드라마가 벌어지긴 힘든 상황이었다. 맨체스터 시티가 홈에서 잘 안 지니까…. 리버풀의 역전 우승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어제 중계는 밤 11시에 했지만 보통 새벽 중계가 많은 편이다.
=잠을 못 잔다. 주말은 축구에 저당잡혔다. (웃음) 어차피 밤새워서 스포츠 보는 걸 좋아하니까. 일 없어도 안 자고 볼 게 뻔하다. 발상의 전환으로 차라리 일하는 게 낫다. 주말에는 할 일도 없다.
-주말에 할 일이 없다니.
=사람을 잘 안 만난다. 주로 집에 있거나 친한 사람만 만난다. 친한 사람과 술을 많이 먹긴 하지만 여러 사람과 왁자지껄하게 노는 건 안 좋아한다.
-얼마 전에는 <정글의 법칙 in 브라질>로 브라질 정글에 갔더라.
=가기 전에는 힘들었다. 사실 예능은 내 취향이 아니다. 즐거운 경험이긴 했지만…. 주중에는 라디오, 주말에는 축구 중계, 프로그램 녹화. 딱 이 정도만 하고 싶다.
-최근 홍명보 감독이 월드컵 대표팀 최종 엔트리를 발표했다.
=사실 엔트리에 대해서는 섣불리 얘기하기가 어렵다. 개인적으로 K리그 클래식에서 10게임 연속 공격 포인트(골, 어시스트)를 기록하고 있는 포항의 이명주가 아쉽지만, 누구를 쓰기 위해 누구를 빼라는 말은 쉽지가 않다. 다른 선수들을 추천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나는 그런 능력은 없는 것 같다.
-최종 엔트리는 예상과 맞았나.
=분데스리가에서 뛰고 있는 박주호를 뺄 줄은 몰랐다. 부상이 생각보다 심각한 것 같다. 부상을 보는 관점이란 게 1인칭과 3인칭이 다르고, 선수와 감독이 또 다르지 않나. 감독 입장에서는 훈련이 중요했을 수도 있고.
-월드컵 중계 캐스터로서 한국이 속한 H조에 대한 분석은 어느 정도 이루어졌나.
=감히 예측을 한다면, 첫 경기 러시아전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 비기면 꼬이고, 지면 걷잡을 수가 없다. 개인적으로 러시아를 이기면 알제리도 잡을 수 있을 것 같고…. ‘황금 세대’ 벨기에를 마지막에 만난 건 행운이다. 이러다 기사에 ‘알제리 무난하다’라고 실리는 것 아니냐. (웃음)
-축구 팬들 입장에서는 벨기에와의 예선 마지막 경기를 기대하고 있다. 에이스 에당 아자르(첼시)를 비롯해 최고의 시즌을 보낸 두 골키퍼 쿠르투아(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미뇰레(리버풀), 센터백 듀오 콩파니(맨체스터 시티), 판 바이턴(바이에른 뮌헨) 등 전 포지션이 탄탄하다.
=확실히 유럽 축구 팬들에게는 ‘핫’한 팀이다. 브라질에 가기 전, 콜롬비아와 A매치를 했으면 한다. 유럽의 괜찮은 팀을 친선경기 상대팀으로 구하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발상의 전환으로 남미 축구팀과 연습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일본과 한조에 속한 콜롬비아 역시 우리와의 친선경기를 원한다고 들었다.
-차범근 해설위원과는 남아프리카공화국월드컵과 런던올림픽에 이은 세 번째 호흡이다.
=차범근 감독님은 스포츠를 좋아하는 젊은 사람과 대화하기를 즐긴다. 축구 보며 떠드는 것도 좋아하시고. 전술에 대한 분석이 남다르다. 다른 분들이랑 하다보면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할 때도 있는데. 차 감독님의 분석은 거의 다 맞더라.
-갑자기 떠오르는 신인선수들에 대한 정보는 어떻게 공유하나.
=가령, 신예 야누자이가 이번 벨기에 대표팀 엔트리에 포함됐다. 차 감독님은 야누자이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신예 정도로만 아시고 플레이 스타일은 직접 보시고 판단하는 편이다. 야누자이의 국적이 몇개였는지 그런 뒷이야기는 정리해서 차 감독님께 드리기도 하고, 중계할 때 직접 얘기하기도 한다. 그런 식으로 서로 보완한다.
-선수와 팀 자료는 어떻게 조사하나.
=어릴 때부터 선수나 팀에 대해 오타쿠처럼 깊이 알아보길 좋아했다. <풋볼 매니저> <피파> <위닝 일레븐> 같은 축구 게임도 많이 했고. 평소 프리미어리그 중계도 하고 있어 월드컵을 앞두고 따로 하지는 않는다.
-차범근 해설위원과는 정보를 어떻게 주고받나.
=일반 시청자에게 전달할 만한 정보를 드린다. 하지만 차범근 감독님의 판단이 중요하다. 스스로 납득해야 멘트를 하는 성격이다. 방송은 신뢰가 중요하니까.
-한주의 K리그와 유럽 축구 소식을 전하는 축구 프로그램 <풋매골>의 오프닝은 보통 축구 방송과 달리 사적인 이야기로 시작해 재미있다.
=김민지 아나운서가 빠지고 남자 해설위원들만 있는 지금은 아니다. 리액션이 있어야 재미있는데 남자들끼리 막말하면 싸우는 것 같고, 남자끼리 있으면 짜증만 난다. (웃음) 최근에는 월드컵 특집으로 만들어지다 보니 우리가 하고 싶은 방향보다 월드컵에 초점을 맞추는 편이다.
-매일 야구 시합이 끝난 뒤 방영되는 야구 프로그램과 달리 축구 프로그램은 아직까지 딱딱한 게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축구를 유머러스하게 다루는 <풋매골>의 시도는 신선하다.
=우리나라에서 소비되는 축구는 장르가 너무 뻔하다. 결과적인 것에만 치중한다. 골! 골든골! 무조건 골! 그 과정 속에서 재미있는 장면을 많이 놓친다. 발로 하는 스포츠니까. 우리의 우상도 실수를 하고, 그게 팀 전통이 되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출연자들이 방송을 즐긴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다.
=기존의 축구 프로그램과 다른 것을 해보고 싶었다. 김민지 아나운서를 데려올 때도 축구를 공부할 필요 없다고 했다. 여자 후배가 나보다 많이 아는 것보다 따라와주는 것만으로 고맙지 않나. (웃음) ‘가만히 있어도 된다. 우리가 재미를 찾아가겠다.’ 그 과정에서 그 역시 축구를 잘 알게 되고 그 안에 숨어 있던 것이 살아났다.
-<풋매골>에서 함께 호흡을 맞췄던 김민지 아나운서에게는 ‘정색하고 엄격한 선배’ 캐릭터였다. 재미를 위해서인가.
=실제 모습이다. (웃음) 초면에는 낯가림이 심해 사람들을 어려워하지만, 같이 하는 사람들과는 모두 절친한 사이이다. 무엇보다 축구를 공유하고 축구가 중심이니까 가능한 일이다. 가장 좋아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무궁무진하게 뽑아낼 수 있고. 예능이나 야구에서는 힘들다.
-어릴 때부터 아나운서가 꿈이었나.
=아니다. 한번도 꿈꾼 적이 없다. 스포츠를 엄청 좋아했지만, 아나운서를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어릴 적 꿈은 뭔가.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다.
-배우인 형 때문인가(배성재의 형은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 <모비딕> <파파로티> <몬스터> <보호자> 등 여러 영화에서 활약하고 있는 배우 배성우다.-편집자).
=물론 영향은 받았지만 형 때문은 아니다. 정확히 말해서 영화 스탭. 한정하고 싶진 않다. 영상연출과 시험도 두번이나 봤지만 다 떨어졌다. 이쪽이 아닌가보다 생각하면서도 하고 싶었으니까. 시놉시스도 쓰고.
-얼마 전 <씨네21>에 실린 배성우씨 인터뷰 기사 봤나.
=정기구독자다. 창간호부터 애독하고 있다. <한겨레21>도 열심히 읽고 있고.
-어떻게 아나운서가 됐나.
=영화쪽에 뛰어들 자신감도 없었고. 광고홍보학과 출신이라 영상 관련 공모전에 응시했는데 다 입상이 됐다. 영화쪽이랑 약간 닮아 있기도 했으니까 이쪽에 뭔가 있나 보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말을 잘 못해서 KBS 아카데미 스피치 학원을 찾아갔다. 그러다가 여기까지 왔다.
-중계를 보다보면 다른 아나운서와 달리 상황을 쉽고 간결하게 설명한다.
=어릴 때부터 스포츠 보면서 엄청 떠들었다. 아마 그런 얘기들의 수준으로 여기까지 온 것 같은데(웃음), 중계를 준비하면서 선수의 위치와 움직임별로 멘트를 만들었고 그런 뼈대 위에 변형하고 추가했다.
-기존의 중계 방식과 확실히 다르다.
=중계를 시작할 때쯤 나이 많은 분들이 많이 했다. 스포츠를 아무나 하나, 이런 느낌. 잔뼈가 굵은 분들이지만, 그렇게 보는 것은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SBS가 축구 중계를 제대로 하면서 좀 젊어졌다. 나의 경우는 선수들을 오랫동안 봐왔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야구 중계를 할 생각은 없나. 한국에서는 야구가 축구보다 인기가 많은 스포츠이지 않나.
=축구만 하고 싶다. 오랫동안 야구 중계 권유를 받았다. 하지만 야구를 하려면 최소한 2년 동안의 준비가 필요하다. 야구도 좋아하고 둘 다 할 수도 있지만 지금처럼 축구에 마음을 쏟기 어렵다. 축구에 들이는 시간이 굉장히 중요하니까. 그래서 단호하게 거절해왔다.
-평소 응원하는 축구팀이 있나.
=있는데 말할 수가 없다. 야구는 두산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할 생각이 없으니까. (웃음) 그런 얘기를 하게 되면 결국 편견이 생긴다.
-SBS가 프리미어리그 중계권을 가지고 있는 까닭에 프리미어리그만 중계하고 있다. 다른 기회가 있다면 중계해보고 싶은 리그가 있나.
=챔피언스리그. 안 볼 수가 없다. 매주 수요일과 목요일 새벽 3시 반에 일어나서 봐야 하는데. 새벽에 보고 아침에 출근하면 죽을 맛이니까. 일하면서 보는 게 최고다. 제일 하고 싶은 일의 패턴이 주말에는 K리그와 프리미어리그. 주중에는 챔피언스리그. 딱 그 정도. 완전체다. 항상 꿈꾼다.
-얼마 전 각 방송사가 월드컵 중계진을 발표했다. 자신 있나.
=보통 월드컵을 앞두고 각 포털 사이트에서 설문조사를 한다. 어느 해설진을 선호하는지. 네티즌의 90%가 우리다. 이번에도 비슷한 결과가 나올 것 같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