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인간은 나약하고 고질라는 위대하다
2014-05-27
글 : 주성철
핵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낸 개러스 에드워즈 감독의 <고질라>

인간의 과학적 오만이 잉태한 두려운 미래. 1999년 필리핀 쓰나미, 1999년 일본 대지진, 모두 자연재난이 아니었다. 모두 인간들이 깨운 존재로 인해 재난이 시작됐다. 1954년 비키니 섬에서 행해진 미국의 수소폭탄 실험의 기억으로 시작하는, 그러니까 그 실험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음모론으로 시작하는 <고질라>는 원작의 핵심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고질라를 재창조하려 한다. 마치 롤랜드 에머리히의 <고질라>(1998)는 잊고 새로이 시작하자는 듯 새로운 고질라는 거대한 등지느러미를 뽐내며 둔탁하게 걸어다닌다. 슈퍼히어로가 대세를 이룬 지금, 거대 괴수의 화려한 역습인 것. 60주년을 맞아 새롭게 태어난 <고질라>에 대해 분석하고, 이달 초 월드 프리미어가 열린 뉴욕 시사회에 참석한 양지현 통신원의 개러스 에드워즈 감독 인터뷰와 배우 애런 존슨, 엘리자베스 올슨과의 인터뷰를 더한다. 일본에서 제작된 시리즈는 <고지라>로 할리우드 제작 영화는 <고질라>로 표기했다.

개러스 에드워즈의 <고질라>는 그냥 <고질라>다. 혼다 이시로의 오리지널 <고지라>(1954) 이후 이 시리즈는 일본에서 쇼와 시리즈, 헤이세이 시리즈, 밀레니엄 시리즈, 그렇게 유구한 ‘왕조의 연대기’로 구분되면서 <킹콩 대 고지라>(1962), <모스라 대 고지라>(1964), <고지라 대 메가고지라>(1993), <고지라 2000: 밀레니엄>(1999), <고지라: 파이널 워즈>(2004) 등 언제나 간단하게라도 부제가 붙어왔다. 혼다 이시로가 미국과의 합작으로 만든 작품 또한 <고지라: 괴수의 왕>(1956)이었다. 그렇게 할리우드에서 롤랜드 에머리히의 거대 블록버스터 <고질라>로 재등장하기 전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 나온 다른 시리즈도 언제나 그래왔다. 그렇다면 사실상 개러스 에드워즈의 <고질라>는 롤랜드 에머리히의 작품을 의식하여 <고질라 리턴즈> 같은 제목을 붙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물론 1998년작은 소니에서 만들었고 이번 작품은 워너에서 만들었다는 차이는 있다). 하지만 고질라 팬들에게 1998년작은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고질라가 좋게 말해 ‘날렵하게’, 하지만 사실상 ‘방정맞게’ 뛰어다녔던 기억은 말끔하게 지우고 싶었던 것. 그러니까 고질라가 허리를 굽히지 않고 우뚝 서서 전혀 새롭게 시작해주길 바랐던 것이다. 이른바 영화 사상 최고의 ‘거대 괴수’, 그 이름값에 걸맞은 과묵한 무게감을 가져주길 원한 것이다. 거기에는 <퍼시픽 림>(2013)의 거대 외계괴물 ‘카이주’가 던져준 충격도 더해질 것이다. 결론부터 말해, 개러스 에드워즈의 <고질라>는 그런 기대에 충분히 부합한다.

비키니 섬 실험의 진짜 이유는?

<고질라>는 실제 뉴스릴 화면의 음모론으로 시작한다. 그렇게 블록버스터가 오프닝에서 다루는 음모론은 <트랜스포머3>(2011)에서도 본 적 있다. <트랜스포머3>는 1969년 인류가 달에 첫발을 내디딘 그날, 비행사들이 외계 생명체 트랜스포머를 발견하는 장면으로 시작했다. 물론 두 영화 모두 100% 뉴스릴 화면인 척 적당히 조작을 가한 것인데, <고질라>는 바로 1954년 미국이 비키니 섬에서 가공할 수소폭탄 실험을 했던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9년 구소련에서도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하자, 미국은 더 강력한 수소폭탄 개발에 착수해 1952년 비키니 섬에서 세계 최초의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으며, 1954년 3월1일에는 과거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비해 무려 1천배에 달하는 강력한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한 것이다. 그 위력이 얼마나 강했던지 비키니 섬의 환초 중 1개가 아예 증발해버렸으며, 약 9천km 떨어진 미국 테네시주에까지 방사성 낙진이 날아갔다.

하지만 문제는 심각했다. 주변 섬들의 거주민에게서 사산아와 선천성 기형을 지닌 아이들이 태어나기 시작했고, 심지어 당시 비키니 섬으로부터 약 130km 떨어진 곳에서 원양 조업을 하던 일본 어선 ‘제5후쿠류마로’의 선원 23명 전원이 방사능 피폭을 당해 그중 무선기장이었던 선원은 약 6개월 뒤 사망했다. 히로시마의 공포를 안고 있는 일본으로서는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으며, 바로 그해 그 사건으로부터 모티브를 얻은 혼다 이시로의 오리지널 <고지라>가 만들어졌다. 그에게 ‘괴수=핵’이었고 거기에는 원폭에 대한 공포가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혼다 이시로의 <고지라>는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 불과 9년 뒤, 그러니까 여전히 그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그처럼 오리지널의 반전, 반핵에 대한 메시지는 개러스 에드워즈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내내 가슴에 품었던 것이다. 이미 그는 티저 예고편에서부터 폐허가 된 도시 위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초토화시킨 핵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 박사의 연설문을 들려줬다. “우린 이 세상이 예전과 같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소수는 웃고, 소수는 울었지만, 대다수는 침묵했다. 힌두 경전인 <바가바드기타>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비슈누는 왕자에게 해야 할 것을 하라고 말하고, 자신의 위엄을 떨치기 위해 여러 팔을 펼쳐 보이며 말하기를, 이제 나는 세상의 파괴자, 죽음의 신이 되었다.”

최근에는 그와 관련하여 의미 있는 ‘소송’도 있었다. 비키니 섬이 있는 마셜제도는 하와이에서 남서쪽으로 약 2100km 떨어진 지역에 5개의 산호섬과 29개의 환초, 그리고 1200개 이상의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인구 약 7만명의 작은 섬나라다. 비키니 섬뿐만 아니라 에니위톡 섬에서도 핵실험이 수없이 행해져 1946년부터 1958년까지 12년간 마셜제도에서만 총 67번의 핵실험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주변 지역은 아직까지도 방사능 오염에 시달리고 있다. 그처럼 서울의 3분의 1도 안 되는 조그만 섬나라가 지난 4월 핵무기를 보유한 9개국을 상대로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 대상은 미국, 러시아, 중국, 프랑스, 영국,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 북한 등 9개국이며, 소송 이유는 이들 핵무기를 보유한 9개국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위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영화와는 무관한 일이지만, 한참 세월이 흘러 최근 있었던 일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고질라 탄생 60주년 못지않게, 비키니 섬의 지난 60년도 응당 주목받아야 하는 일이다.

고질라의 고향, 일본과의 연결고리

굳이 롤랜드 에머리히의 <고질라>와 비교하자면, 개러스 에드워즈의 <고질라>가 신선한 것은 역시 ‘일본’이라는 고질라의 고향을 끌어안았다는 점이다. 포드(애런 존슨)는 부모와 함께 일본에서 살던 시절, 1999년 지진으로 인해 원자력발전소에서 벌어진 방사능 유출사고로 어머니(줄리엣 비노쉬)를 잃었다. 그 충격으로 아버지 조(브라이언 크랜스턴)는 일본에 남아 연구를 계속했다. 발전소 사고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확고한 믿음 때문이다. 이후 장성한 포드는 해군 장교가 됐고, 병원 간호사로 일하는 아내 엘르(엘리자베스 올슨)와 어린 아들과 함께 살아간다. 다시 일본으로 가서 아버지를 만나지만, 여전히 과거에 얽매여 사는 아버지가 답답하기만 하다. 하지만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아버지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로 고질라가 나타난 것이다.

고질라의 팬이라면 무척 반가울 만한 일이, 일본이라는 배경을 끌어안음과 동시에 혼다 이시로의 오리지널 작품에 등장했던 세리자와 박사(와타나베 겐)도 부활시켰다는 점이다. 앞서 <퍼시픽 림>이 ‘덕후 인증’을 제대로 했기에 <고질라>로서는 그것이야말로 ‘신의 한수’라 생각했을 것이다. 오리지널에서 검은색 애꾸눈 안대를 쓴 독특한 외모의 세리자와 박사는 과학자로서의 윤리를 고민하던 끝에, 결국 자신이 개발한 무기인 옥시전 디스트로이어를 이용해 고질라를 죽여버렸다. 하지만 그 무기가 이후 악용될 것을 두려워해 사용 직전 모든 연구 자료를 파기했다. 어쩌면 자신이 개발한 무기의 무시무시한 파괴력에 탄식했던 오펜하이머 박사의 다른 모습이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고질라>의 세리자와 박사는 60년 전의 그에 비해 무기력한 존재다. 어딘가 존재할지도 모르는 공포의 대상에 대해 의문을 품으면서,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라 할 수 있는 고질라에 대해 자신만의 이론을 갖고 있지만 옥시전 디스트로이어 같은 해결책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바로 그것이 <고질라> 시리즈의 지난 60년의 변화를 압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거만해요. 사람이 자연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죠”라는 그의 대사는 통제할 수 없는 거대 생명체에 대한 ‘체념’과 ‘인정’ 그 모두를 담고 있다.

그러한 태도는 이미 개러스 에드워즈의 지난 장편 데뷔작 <몬스터즈>(2010)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어쩌면 그가 불과 단 한편의 포트폴리오만으로 새로운 <고질라> 시리즈에 전격 승선한 이유이기도 하다. 2009년이 배경인 <몬스터즈>는 태양계에서 외계생명체의 존재 가능성을 발견한 우주탐사선이 외계 샘플을 채취해 지구로 귀화하던 중 멕시코에 추락하는 사건으로 시작한다. 이후 나타나기 시작한 괴물들로 인해 나라의 절반이 감염구역으로 지정되어 격리되는데, 그로부터 6년 뒤 사진작가 앤드류(스쿳 맥네이리)가 멕시코 인근으로 여행을 떠난 출판사 사장의 딸 샘(휘트니 에이블)을 집까지 안전하게 데려오라는 임무를 맡는다. 하지만 여권을 도둑맞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무방비 상태로 감염구역의 중심을 통과해 미국으로 가야 하는 위기를 맞는다. 여기서 괴물들은 거대한 다리로 도시의 전기를 빨아들이고, 숲의 나무들까지 전염시키며 번식해 나간다. 중요한 것은 그 괴물들이 먼저 사람을 공격하는 법이 없다는 점이다. 그냥 어쩌다 지구에 떨어졌고 그냥 여태껏 살던 대로 지구에서 살아간다. 잘못을 저지른 것은 그들을 지구에 오도록 만든 인간이다. 몸에서 예쁜(?) 빛을 내며 밤에 주유소에 나타나 산책하듯 거니는 괴물들을 두려움이 아닌,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두 주인공의 표정이 압권이다. 그렇게 <몬스터즈>는 괴물과의 묘한 ‘공존’을 얘기하는 영화였다. 영화 속에서 샘이 운전기사에게 “여기 사는 게 불안하지 않아요?”라고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답했었다. “어디 뭐 갈 데가 있나요, 그냥 사는 거죠. 일도 가족도 여기 있는데, 그냥 운명에 맡기는 거죠 뭐.”

덩치들의 격전장

<몬스터즈>도 그랬지만 <고질라>에서도 사람들은 그저 넋 놓고 지켜보면 된다. 고질라는 생태계의 균형을 잃어버린 지구로 신이 보낸 자연의 조정자다. 거대한 파괴의 신이기도 하면서 허리케인처럼 인간이 자연을 남용한 것에 대한 결과의 상징물이다. 그러기에 일어섰을 때 100m가 넘는 초대형 괴물, 그러니까 역대 괴수영화 중 가장 몸집이 크다는 그 압도적인 존재감은 중요하다. 롤랜드 에머리히의 <고질라>가 이리저리 폴짝폴짝 뛰는 모습이 방정맞다는 지적은 바로 그 무게감의 차이로 인한 것이다. <퍼시픽 림>이 신선했던 것은 그 특유의 둔탁한 매력을 살려냈기 때문이다. 그 매력에는 과거 무려 12편의 <고지라> 시리즈에서 고질라 탈을 뒤집어쓰고 연기했던 나카지마 하루오의 연기도 한몫했다.

그렇게 <고지라> 시리즈가 인기를 끌던 당대의 일본은 파란 눈의 레슬러들을 당수로 제압하던 역도산의 프로레슬링이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때였다. 그래서 고질라와 싸우는 또 다른 괴물 무토가 고질라를 향해 마치 종합격투기의 플라잉 니킥을 보는 것처럼 달려들고, 고질라 또한 백스핀 엘보를 구사하듯 거대한 꼬리로 무토를 후려칠 때의 쾌감은 짜릿하다. 그러니까 이 시리즈는 말 그대로 ‘덩치’들의 격전장이었다. 더불어 ‘화염 공격’이라는 고질라의 필살기도 잊지 않는다. 원래 <고질라>는 인간이 고질라와 싸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끼리의 싸움이나 파괴를 그저 넋 놓고 지켜보는 데 있었다. 영화 속 인간들도 우리처럼 관중이어야 했다. 개러스 에드워즈의 <고질라>는 바로 그 괴수들을 향한 ‘렛잇비’ 정신을 멋지게 살려냈다.

괴수계의 ‘어벤져스’

고질라에 맞선 킹기도라, 모스라 등 다른 괴수들

인간은 황비홍, 괴물은 고질라. 1950년대부터 무려 87편의 <황비홍> 시리즈에서 황비홍을 연기한 관덕흥 사부가 인간으로서 가장 많은 시리즈를 이어온 인물이라면, 괴물로서는 번외편들까지 포함해 무려 30여편 이상에 출연한 고질라가 압도적이다. 그러다보니 매번 서로 다른 적들도 많았다. <고지라>에 등장하는 무토는 여러모로 고질라의 숙적 중 하나인 킹기도라를 연상시킨다. 머리가 3개 달렸고 날개로 날아다니며 무려 8만톤이 넘는 거대한 몸집을 자랑한다. 머리의 경우 당시 원시적인 기술의 와이어 액션을 이용했기에 계속 흐느적거렸다. 물론 그것이 더 공포심을 자아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으로 치면 나방 괴수 모스라도 빼놓을 수 없다. <고지라>의 성공에 고무된 도호 영화사가 여성들이 좋아하는 괴수영화를 만들자는 목표 아래 역시 혼다 이시로가 감독하여 <모스라>(1961)를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상대 괴수를 향해 꽃가루를 뿌리는 모스라는 애벌레를 지키려는 모성애를 보여줬으며, 이후 여러 시리즈에서 고질라와 맞서 싸우거나 함께 지구를 지키기도 했다. <모스라 대 고지라>(1964)에서 고질라와 싸웠으며, <괴수 총진격>(1968)에서는 모스라 외에도 킹기도라, 로단, 바라곤, 바란 등이 대거 등장했다. 그렇게 일본 특촬물은 고질라를 중심에 두고 ‘괴수 <어벤져스>’의 장대한 역사를 일찌감치 구축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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