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성일의 은밀한 트리트먼트]
[천성일의 은밀한 트리트먼트] 책임이라는 이면계약서
2014-05-28
글 : 천성일 (시나리오·드라마 작가)
Episode 04. 계약
웹툰 원작의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

아니, 뭐 그따위 사람들이 다 있어요? 2년 동안 일했는데 한푼도 안 줬다고요?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발끈했다. 그녀는 시선을 내렸다. 그러지 마요. 잘못한 거 없어요. 이제 막 서른이 된 그 작가는 아마 눈물을 참고 있었을 것이다. 얘기를 시작할 때만 해도 옛날에 휙 지나가버린 가벼운 일이라며 담담했었다. 그 작가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겨우 입을 열었다. 한푼도 못 받은 건 아니고요….

그 작가는 300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2년 동안 300만원을 번 사연은, 사실 흔하디흔한 드라마였다. 작가는 공모전 본선에 몇번 오른 경력을 인정받아 지인에게 프로듀서를 소개받았다. 그 프로듀서는 나중에 잘되면 계약을 해주겠다며 자기의 아이템을 써달라 부탁했다. 드디어 장편 상업영화로 첫발을 내딛는다는 생각에 작가는 그와 손을 잡았다. 1년 동안 초고를 쓰고 몇번의 각색을 거친 끝에 어렵게 한 제작사에 함께 몸담게 되었다. 하지만 형편이 좋지 않았던 그 회사는 ‘진행비는 주겠으나 계약은 나중에 잘되면 하자’고 했다.

그 뒤로도 1년 동안 각색은 계속되었고 간혹 30만원씩, 50만원씩 진행비인지 원고료인지 분간이 안 되는 돈을 받았다. 돈과 일에 지친 작가는 문서로 된 계약서와 일한 만큼의 계약금을 요구했다. 그리고 쫓겨났다. 계약서가 없으니 부당을 증명할 길이 없었고, 자기의 아이템도 아닐뿐더러 정체 모를 돈까지 받았으니 저작권을 주장하지도 못했다. 당신에게는 더이상 좋은 글을 기대하지 못하겠다는 말에 반박할 자신감마저 없어 창피했다고 한다.

창피한 거 아니에요. 그 사람들이 잘못한 거예요. 잃어버린 2년보다 더 큰 문제는 잃어버린 자신감이에요. 좋은 파트너 만날 거예요. 영화인들 대부분 정말 좋은 사람들이에요. 그래도 선배랍시고 위로와 격려를 비율에 맞게 섞었다. ‘풍상이 섯거친 날’을 먼저 겪었다는 이유로 잘난 척도 하고 싶었다.

욕심 내신 거예요. 기회를 잡겠다는 욕심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아들였잖아요. 나중에 잘되면이라고요? 그건 희망이 아닌 것 같아요. 논리 없는 희망은 미끼에 불과해요. 희망과 미끼를 구분하지 못하면 결국 부당한 세상이 자리잡는 거잖아요.

이 말은 결국 하지 못했다. 충고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기 위해 만들어지는 작품이 누군가의 상처 속에서 태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 원작을 각색한 <방황하는 칼날>.

어쩝니까. 이 직업이 상처 반 흉터 반인데요.

답답한 마음은 이해되지만 희망을 미끼로 던질 수는 없었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한 제작사 대표는 이 대답을 예측하고 있었으면서도 한숨이 깊다. 어쩌냐, 그래도 돈이 나갔는데…. 인공호흡해도 안 되겠어? 그의 한숨보다 더 깊게 고민하고 대답한다. 예, 살리기 힘들 것 같은데요.

그 대표가 한 작가의 스토리를 접한 건 몇달 전이다. ‘일단 써와라, 쓴 것 보고 계약할지 말지 결정하겠다’는 말은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제법 신선한 이야기였기에 바로 계약을 했다. 계약서에 집필 기간과 횟수를 명시했고 계약금까지 지급했으니 제작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시나리오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약속된 시간을 조금 넘겨 초고를 받아보았다. 눈앞이 아득해졌다고 한다. 소재만 신선했지 캐릭터는 낡았고 사건은 진부했으며 구조는 엉성했다. 수많은 회의를 통해 각색을 했으나 제작을 진행할 만큼의 수준에 오르지는 못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모니터를 했고, 절대 다수가 ‘살아남기 힘든 시나리오’라는 진단서를 제출했다. 선택은 제작자의 몫이다. 다른 작가를 섭외하면 예측 불가능한 돈과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이대로 중단하면 이미 지출한 비용을 고스란히 손해로 떠안는다. 어느 제작사마다 접지도 펴지도 못하는 시나리오 한두편 없는 곳이 없으니, 이런 이야기 또한 흔하디 흔한 드라마다.

차라리 그 돈으로 판권이나 살걸 그랬어. 이쯤에서 나오는 비슷한 고민을 그도 하고 있었다. 무슨 작품을 만들 것인가 기획할 시간에 웹툰을 둘러보거나 서점을 훑어보는 쪽이 더 생산적일지 모른다. 오리지널 시나리오보다 대중성이 검증된 원작을 사들이는 편이 실패 확률은 적을 테니까. 연장선에서 신인보다 중견 작가를, 중견 작가보다는 글도 쓰는 감독을 선호하는 것은 당연하다.

성공 확률을 높이는 방법과 실패 확률을 줄이는 방법은 다르다. 어느덧 많은 제작사들이 후자(risk hedge)로 돌아서고 있는 것 같다.

한때, 계약이란 마음을 나누는 것이라 말했다. 독소 조항이 있어도 인정과 의리를 앞세워 그냥 넘기기도 했다. 서류에 담긴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에 담긴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이 어긋난 뒤 인정과 의리가 법 앞에서 힘을 쓰지 못함을 알게 된 뒤, 마음에 담는 것보다 서류에 담는 것들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렇다 한들 쌍방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계약은 드물다. 계약의 결과물이 쌍방을 모두 만족시키는 경우는 더욱 드물다. 양쪽의 입장을 인정하자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신인 작가를 위한 계약 가이드 역시 아니다. 이미 시나리오 표준계약서와 드라마 작가 표준계약서도 있고 저작권법에 대한 자료도 사례별로 잘 정리되어 있다.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계약의 속성에 대한 것이다.

영화는 함께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인생을 나누는 작업이다. 결국 계약이란 서로의 인생을 책임지겠다는 약속이다. 글을 계약할 때는 나뿐 아니라 상대의 인생까지도 책임지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영화 한편을 만들 때 보통 100명 가까운 스탭들이 참여하고, 계약서만 해도 100개가 넘는다. 그중 가장 먼저 사인을 하는 사람은,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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