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이 돌아왔다. <기막힌 사내들>(1998)로 데뷔한 이래 거의 매해 거르지 않고 영화를 만들었던 그는 연극과 영화와 TV를 가리지 않고 활동해온, 그래서 정작 자신은 머쓱해하는 표현인 ‘문화 게릴라’라고도 불렸다. 최근에는 TV 오디션 프로그램의 심사위원을 비롯해 tvN <SNL 코리아>를 이끌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퀴즈왕>(2010)과 <로맨틱 헤븐>(2011)으로부터 3년여의 공백이랄까? 다른 감독들에게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일 테지만 매체를 넘나드는 왕성한 탐식가인 그에게는 제법 긴 휴지기로 느껴진다. 게다가 <하이힐>은 이전 작업들과 굉장히 다른 선로에 놓인 것처럼 느껴지는 변화의 작품이다. 그런데 이미 그는 그다음 작품인 김성균, 조진웅 주연의 <우리는 형제입니다>(2014) 촬영까지 종료한 상태다. 영화감독으로서 다시금 예전의 속도와 감각을 되찾은 것일까. 그렇게 궁금한 것들이 가득한 채로 그의 한남동 사무실을 찾았다.
-벌써 <하이힐> 다음 작품인 <우리는 형제입니다> 촬영도 끝났다던데.
=총 26회차, 19일 만에 촬영이 끝났다. 어린 시절 고아원에서 헤어졌던 형제가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나 어머니를 찾으러 간다는 이야기다. 김성균, 조진웅 두 배우가 노련하게 잘해줬다. 하루 정도 보충촬영하면 정말 끝이다. (웃음)
-당신은 원래 이런 속도로 영화를 만들어왔었다. 신작 홍보할 때쯤 이미 그다음 작품을 촬영 중이거나 끝낼 정도로.
=<SNL 코리아>를 꼬박 1년10개월 했다. 매주 생방송에다 따로 녹화해야 하는 분량도 있고, 정말 다른 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스케줄이었다. 이후 신동엽이 고정으로 투입되고 모양새가 갖춰지다 보니 애초 계획처럼 ‘세팅’만 하고 나올 수도 없었다. 그나마 CJ E&M에서 시행착오를 이해해줬기에 큰 탈 없이 밀어붙일 수 있었다. 그렇게 2년 반 정도 영화를 안 만드니까 ‘장진이 영화계를 떠났나?’ 생각하는 사람도 있더라. (웃음) 다행히 곧장 <하이힐>에 착수했고 <우리는 형제입니다>까지 이어졌다. 올해 겨울에 한 작품 더 들어가고, 내년에는 오래전부터 준비했던 또 다른 작품이 기다린다.
-예전의 속도감을 되찾은 것 같은데, 이전과 달라진 느낌은 따로 없나.
=이전과의 확실한 차이점이라면, 배우들을 제외하고 현장에서 내가 가장 나이가 많더라. (웃음) 워낙 영화를 일찍 해서 그런지 선배들 틈에서 ‘레디고!’를 외치는 게 익숙했었다. 점점 나이가 들면서도 <로맨틱 헤븐> 때는 이만규 조명감독이 있었고 자주 함께했던 전혜선 스틸작가도 있었는데, 이제는 정말 가장 연장자다. 그런 느낌은 배우 차승원도 마찬가지여서 둘 다 그런 얘기를 나눴다. 현장에서 좀더 책임감이 생기는 것 같다고.
-차승원과는 <박수칠 때 떠나라>(2005), <아들>(2007)에 이어 어느덧 단독 주연 작품으로 세 번째 만났다. 편수로만 치면 정재영과 가장 많이 했겠지만, 사실 주연 혹은 페르소나라는 느낌으로는 차승원과 더 많이 만났다.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지 모르겠는데, 나와 차승원 둘 다 영화에 바짝 약이 오른 느낌이 있었다. 각자 서로 다른 이유로 뭔가 한계점에 부딪혀 짜증을 느끼고 있던 차에 <하이힐>로 만났다. 차승원이 ‘이번에는 우리 둘 다 절대 쉽게 가지 말자’고 못 박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내가 이가 갈릴 정도로 진짜 무섭게 달려들었다. 액션연기의 경우 맨몸으로 다 한 거나 마찬가지다. 룸살롱에서 벌어지는 오프닝 액션 신은 그 방 안에서만 꼬박 4일을 찍었다. 진짜 독하더라. (웃음) 영화를 보고 내 흠은 잡을 수 있을지 몰라도 차승원에 대한 흠은 잡을 수 없을 거다. 한살 차이 나는 친구이고, 서로 잘 안다고 생각하는데 몰랐던 그의 또 다른 면을 봤다.
-<하이힐>은 정서적으로 여장을 한 차승원의 이미지가 중요하다. 영화를 준비하면서 처음 그 모습을 본 느낌이 어땠나.
=영화를 준비하면서 미리 여장을 해보거나 하지 않았다. 영화처럼 제대로 여장을 하려면 눈썹 정리 등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다. 대충 느낌이라도 보기 위해 사전에 해보지 않은 거다. 차승원의 남자로서의 모든 촬영을 끝낸 다음 여장 장면을 몰아서 찍었다. 그러니까 영화를 보는 관객의 마음처럼 나로서도 차승원의 여장이 어떨까, 언제 여장으로 등장하게 될까 궁금해하면서 스릴 있게 촬영에 임할 수 있었다. 여장 촬영 당일에는 나를 비롯한 스탭들 모두 웃음을 참느라 힘들었다. 아무리 예쁘게 메이크업을 해도 치마를 입고 나타난 그가 “야, 담배 좀 줘봐” 하니까 빵 터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여성스러운 손 모양의 디테일까지 살려내는 모습을 보니 역시 차승원은 노련한 배우더라.
-그렇게 화려하게 여장을 한 그가 현재 거주 중인 주공아파트의 엘리베이터, 그것도 주민 알림판 같은 것들이 붙어 있는 그 안에서 한 평범한 가족과 마주치는 장면이 압권이다. 그 가족을 연기한 배우들이 바로 김원해, 정명옥이어서 마치 ‘영화 속 <SNL 코리아>’를 보는 듯 기발한데 마치 차승원이 호스트로 출연한 <SNL 코리아>를 보는 느낌이랄까.
=영화 안에서 대놓고 웃기려 드는 몇 안 되는 장면인데, 솔직히 위험부담이 있긴 했다. 밀도 있게 들어가야 하는 드라마와 겉치레처럼 느껴지는 그런 코미디가 잘 결합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말이다. 그래도 그 순간 형사 지욱(차승원)이 트랜스젠더라는 게 드러났고, 이전까지 쌓아올린 긴장감의 흐름에서 그 정도의 유니크함은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지욱의 ‘그것’이 몸에 닿는 (정)명옥이 시침 뚝 떼고 연기를 잘했다. (웃음) 그리고 그전까지 거칠고 무겁게만 보였던 지욱의 표정이 처음으로 행복하게 보인다는 게 중요하다.
-그런 지욱의 여성성을 그보다 앞서 맞닥뜨린, 부녀자들만 노리며 범죄를 저지르다 체포된 변태 같은 범죄자가 유일하게 눈치챈다는 설정도 좋다.
=내게 이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을 고르라면, 바로 그 장면이다. 정말 너무 싫은 악질 범죄자인데, 그에게 뭔가 ‘들켰다’ 싶은 지욱의 묘한 표정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그런 면을 늘 가깝게 알고 지내온 동료 형사(고경표)나 주변을 맴도는 여자(이솜)가 아니라, 딱 한번 마주친 범죄자가 알아보는 것이다.
-<하이힐>은 상업적으로 범죄 누아르 장르의 외피를 둘러쓰고는, 지욱을 중심에 두고 트랜스젠더에 대한 얘기도 진지하게 건네고 있다.
=이 사회가 말하는 ‘보편적인 가치관’이라는 게 뭔지 의문을 던져보고 싶었다. 단지 다수의 뜻과 생각이라는 이유로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보호 장치도 없다. 지욱은 세상의 편견에 부딪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이다. 실제로 내 주변에도 그런 친구가 있어 큰 도움을 줬고 수정한 부분도 많다. 그들은 그냥 어렸을 때부터 또래 여자들보다는 동네 형이 더 좋았고, 또 그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자연스레 엄마 화장품에 손이 갔다. 이 사회의 보편적인 구성원들이 얘기하는 ‘평균’과는 다르지만 왜 인정하지 못하는 걸까. 상업영화 감독으로서는 딜레마일 수도 있지만, 용기 있게 그들에 대한 내 생각을 대중적으로 풀어내보고 싶다는 것이 이 영화의 시작점이었다. 혹자는 그마저 상업적으로 역이용하는 것 아니냐고 되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정성’ 뭐 그런 표현을 굳이 쓴다면, 바로 마지막 장면에 내 진심을 담고자 했다. 달콤한 판타지가 아닌 냉정한 현실이랄까.
-<하이힐>은 직접적으로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하이힐>(1991)을 연상시킨다. 또한 지욱은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에서 성전환 수술을 받은 과거의 아버지 ‘롤라’처럼 알모도바로의 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캐릭터다.
=어려서 봤던 <하이힐>은 정말 쇼킹했다. 뉴스진행자 레베카(빅토리아 아브릴)가 생방송 도중 자신이 남편을 살해한 범인이라고 고백하고, 옆에 앉은 그 남편의 정부이기도 한 여자가 수화를 하며 뉴스를 진행하는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엄청나다.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알모도바르의 영화는 <그녀에게>(2002)다. 총각으로서의 마지막 이별을 겪고 본 영화였는데(웃음), 이게 진짜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까지 났다. 진짜 강렬했다. 제목 외에 직접적으로 알모도바르 영화로부터 가져온 것은 없지만 살짝이라도 떠올려준다면 영광이다. 애초 생각한 영화 제목은 <하이힐>이 아니라 <소머즈 부인의 사랑>이었다. (웃음) 그런데 주변 사람들 모두 그런 제목을 쓰면 B무비 정도가 아니라 B+에 다시 +를 더한 제목이라며 반대했다. 그러다 진짜 여성의 전유물인 하이힐이 떠올랐다. 요즘엔 남자도 블라우스를 드레스하게 입기도 하고, 여자도 보이시한 룩을 입으면서 패션의 경계가 많이 사라졌는데, 그럼에도 하이힐은 오직 여자만 신는다. 누가 봐도 완벽한 남성의 모습을 갖춘 주인공이 끝내 숨길 수밖에 없었던 내면의 여성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제까지 더한 이 영화의 제목은 <하이힐: 12센티 위의 남자>다. (웃음)
-그런 분위기 안에서도 아저씨인 배우 이상화가 여장을 하고 지욱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 등 역시 ‘장진표’ 코미디가 빛나는 순간들은 빠지지 않는다. <SNL 코리아>로 ‘뜬’ 김민교는 사실 진지한데 등장만 해도 웃음이 터진다.
=오히려 주제를 둘러싼 긴장감을 팽팽하게 가져가니까 슬쩍 비틀기만 해도 웃긴 상황이 만들어지더라. 가령 보스 허곤(오정세) 일당이 지욱 집에 들이닥쳐서 왕창 어질러놓고는 다시 “여기 정리하고 들어가라”라고 할 때, (김)민교가 슬쩍 주변을 둘러보기만 해도 웃기다. 개인적으로 그에게 미안한 것은 <하이힐>의 선 굵은 이야기 안에서 끝까지 차분하게 누르라고 한 거다. 그는 원래 정극 연기를 하던 친구였는데, 내가 도와달라고 해서 <SNL 코리아>에 들어왔다가 인기를 얻었다. 그래서 더 멀리 보자면 내가 그에게 해가 된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도 했었다. 어쨌건 <우리는 형제입니다>에서는 작정하고 웃기니까 기대해도 좋다. (웃음)
-이번 영화는 ‘쉽게 가지 않은 영화’라는 느낌이 있다. 왠지 촬영을 끝냈을 때의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다.
=아까 차 배우와 나 모두 바짝 약이 오른 상태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는데, 바꿔 말해 둘 다 진짜 겸손해지는 가운데 만난 영화다. <굿모닝 프레지던트>(2009) 이후 흥행적으로든 뭐든 잘 풀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나도 이제 작가적 한계에 다다른 건가, 진짜 바닥을 찍은 건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건 차 배우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하이힐>을 시작하기 전에 거의 1년 만에, 그것도 자정이 지난 시각에 나한테 전화해서는 “감독님, 연기가 뭐라고 생각하세요?”라고 물었다. 비슷한 시기에 각자 연출자로서, 배우로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던 거다. 돌이켜보니 둘 다 이 바닥에 들어온 지 20년 정도 됐더라. 이제 와서 ‘초심’으로 돌아가서 찍은 영화, 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고(웃음), 어쨌건 둘 다 ‘밑바닥에서 올려보며 찍자’, 그리고 ‘흔들리지 말자’라는 생각으로 임했다. 비슷한 시기 차 배우가 안 좋은 일을 겪으면서 좀더 스스로를 단단하게 다졌던 것 같다. 그럴 때 내가 그를 도왔다기보다 오히려 그가 나를 도왔다. 현장에서도 차 배우가 쉽게 포기하지 않으니까 나 또한 그렇게 되더라. 그게 너무 고맙다.
장진은 <하이힐>을 만들면서 ‘장차’라는 영화사를 새로이 꾸렸다. 그의 아내 성이 ‘차’라 아내의 사업과 한데 엮으면서 류승완, 강혜정 부부의 제작사 ‘외유내강’과 같은 작명 방식으로 만든 것. 하지만 그의 모태라 할 수 있는 ‘필름있수다’는 여전하다. <우리는 형제입니다>의 경우 필름있수다 제작이다. 다만 그동안 좀 고전하면서 기획실 형태로만 남겨뒀다. 그런데 “다들 주변에서 차승원과 함께 만든 회사냐고 묻는 사람들이 더 많다”라는 그는 “그건 우리 둘 사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의 추측이다. 차승원과 함께 작업하는 건 거의 극기훈련하는 기분”이라며 웃었다. 그렇게 인터뷰는 완성된 영화도 그렇지만 차승원으로 시작해 차승원으로 끝났다. 지금껏 그가 이런 배우 예찬론을 펼친 적이 있나 싶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진정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아서 그가 연말 영화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 후보로 올랐으면 좋겠다고. 아니면 여우주연상도 가능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