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을 다시 보는 행위는 매우 안전한 일인 동시에 모험적인 일이다. 이미 확립된 평가들 사이에서 아직 말해지지 않은 미지의 무언가와 조우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조셉 L. 맨케비츠와의 만남은 더욱 모험적일 수 있다. 그는 생전에도 사후에도 엇갈린 평가를 받은 작가였기에, 오늘날의 영화 관객은 여러 이견들 사이에서 자신만의 감상과 판단을 형성해가며 보는 재미를 더 많이 누릴 수 있다. 6월6일부터 부산 영화의 전당 시네마테크에서 열릴 ‘위대한 플래시백의 작가, 조셉 맨케비츠 특별전’을 기다리며 그의 영화 세계에 대한 몇 가지 정보와 단상과 잡념을 무작위적 플래시백처럼 끼적여보았다.
플래시백 하나.
“사람들은 ‘촬영된 연극’(filmed theater)의 프랑스어 표현을 빌려와 내 영화를 설명합니다. 말하자면 내 영화들은, 극히 드문 예외를 제외하면 거의 연극 공연이나 다름없다는 겁니다.” “확실히 내 영화의 서술 방식은 소설적으로도 느껴질 만합니다.” 1967년 2월 <카이에 뒤 시네마> 영문판에 실린 인터뷰를 읽다 보면 맨케비츠는 자신의 영화가 ‘연극적’이라거나 ‘문학적’이라는 비판적 의견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고 굳이 부정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현재까지 나와 있는 그에 대한 기존의 평가를 몇 가지만 간략히 정리해보면 이러하다. 마니 파버와 태그 갤러거 같은 미국 비평가들은 인색한 편이었다. 일찍이 마니 파버는 그를 미사여구와 수동적 카메라를 선호하는 “폭탄” 감독의 대열에 포함시켰으며, 훗날 태그 갤러거도 “사진적 연극”(photoplay)이란 말로 그의 영화가 지닌 과도한 자의식과 작위적 연출을 비꼬았다. 반면 그에게 가장 높은 애정을 느꼈던 이들은 프랑스 누벨바그 세대였다. 고다르는 그를 “영화사에 기억될 만한 훌륭한 플래시백”을 많이 만든 “가장 지적인 미국 감독 중 한명”으로 꼽았으며, 트뤼포도 “우아하고 세련된 지성, 끔찍할 정도의 정확성, 충격적일 정도로 연극적인 연기 연출, 숏의 타이밍에 대한 감각”에 관해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엇갈린 평가 속에는 이런 질문 거리가 담겨져 있는 듯하다. 영화적인 것이란 연극적인 것, 문학적인 것과 배타적인 것인가, 상호의존적인 것인가. 영화의 정수를 거르고 걸러내 영화에 대한 시네필의 신념을 더욱 견고하게 다져주는 감독이 있는가 하면, 영화와 다른 예술 장르간의 경계를 흔들어 영화에 대한 시네필의 이해를 수정하고 확장하도록 유도하는 감독도 있다. 전자와 후자의 사례가 겹칠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을 것이다. 맨케비츠는 후자의 사례는 확실하나 전자에도 해당하는지를 놓고 찬반이 갈린 경우 같다.
이런 논의는 어떤 면에선 필요한 것이지만 맨케비츠의 영화를 선입견 없이 자유롭게 즐기는 데 있어서 적당히 참고만 하는 것이 좋다. 초기작 <유령과 뮤어 부인>(1947)과 마지막 작품 <발자국>(1972)을 이어서 보고 나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사별 뒤 새로운 삶을 향해 발을 내딛은 여인과 그녀가 이사 간 집에 기거 중인 유령간의 로맨스를 다룬 <유령과 뮤어 부인>은 유성영화의 시청각적 기술과 효과를 대단히 귀엽고도 과감하게 활용한 작품이다. 반면 <발자국>은 유명한 범죄소설 작가가 아내의 불륜 상대를 초대해 거짓 살인극을 벌이는 내용으로, 두 주연배우의 연극적 호흡과 실내극의 밀폐감이 압도적인 작품이다.
플래시백 둘.
어찌 보면 맨케비츠는 통상적인 작가론적 접근법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감독이다. “관객이 트래킹 사용을 알아차릴 때, 이미 연출가는 내기에서 진 것이다”라고 스스로 말했다는 것처럼, 그는 과시적 연출과 기술적 효과를 철저히 자제한 채 이야기 전달에 충실했고, 그래서 그의 영화엔 작가적 인장이 희미하다. 그렇다고 그가 특정 장르나 주제에 몰두했던 것도 아니다. 장르 면에서는 한 영화에서 여러 장르를 교배하길 서슴지 않았으며, 주제 면에서도 한 여자의 욕망에서부터 소비사회와 계급 갈등에 관한 심오한 비판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영역을 아울렀다.
그럼에도 교집합을 만들어보자면 몇 가지 요소들이 눈에 띄는데, 그중에서도 플래시백이 가장 많이 말해졌다. 여기엔 그의 대표작들이 기여한 바가 크다. <세 아내에게 온 편지>(1949)는 남편들이 여신처럼 숭배하는 여인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세 아내의 회상을 나란히 붙여낸 영화로, 현재와 과거의 교차 속에서 세 여자의 심리적 불안을 계급 문제와 겹쳐냈다. 한 야심찬 배우 지망생의 성공 가도를 뒤쫓은 <이브의 모든 것>(1950)도 다중 시점의 플래시백 구조를 통해 화려한 쇼 비즈니스의 어두운 이면을 삐딱하게 보여줬다. 그런가 하면 은행가 가문 내 형제의 난을 그린 <이방인의 집>(1949)과 대부호의 아들의 죽음과 관련된 비밀을 다룬 <지난 여름 갑자기>(1959)는 단 하나의 플래시백을 단순하면서도 강렬하고 결정적으로 활용했다.
이 사례들을 모아놓고 보면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이 나타난다. 들뢰즈와 <센시즈 오브 시네마>에 실린 감독론으로부터 도움을 얻어 말하자면, 그의 플래시백은 운명론적 인과관계에 구속돼 있지 않으며, 인간의 자유의지와 선택으로 인해 만들어진 인생이란 서사의 분기점들을 헤아리도록 한다. 그렇기에 서사 구조의 뼈대를 결정하는 필연적 요인이자 현재를 재조정해 보게 돕는 프리즘으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역설적으로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건 <노 웨이 아웃>(1950)이다. 주립병원에서 흑인 의사가 치료하던 백인 죄수가 죽으면서 불거지는 인종차별 문제를 다룬 이 영화는 플래시백을 철저히 기피한다. 플래시백을 통해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해소하는 것은 기만이며, 중요한 건 현재에 새로운 분기점을 이루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까지 포함한다면, 맨케비츠는 영화 사상 플래시백을 가장 섬세하고 정확하고 풍성하게 사용한 감독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플래시백 셋.
그러나 맨케비츠의 영화에서 우리가 정말로 홀리는 것은 현란한 플래시백이 아니라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 더 나아가서는 어떤 목소리들인 것 같다. 아마도 맨케비츠의 영화 스스로도 그 목소리들에 홀려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상상까지 든다. <이방인의 집>에서 주인공이 아버지가 좋아했던 오페라 넘버를 들으며 떠올리는 생전 아버지의 우렁찬 노랫소리, <발자국>에서 두 남자의 비극적 결말을 꿰뚫을 듯 날카롭게 울려 퍼지는 자동기계들의 발작적 웃음소리, <유령과 뮤어 부인>에서 뮤어 부인을 쫓아내는 동시에 매혹시켰던 유령의 호탕한 웃음소리, 그리고 <세 아내에게 온 편지>에서 불안에 빠진 세 아내를 굽어 살피는 듯한 에디 로스의 너그러운 목소리. 그의 영화들은 때때로 영화 밖에서 영화를 에워싸고 있는 듯한 그 목소리들을 통해 관객을 영화 속 세계로 초대하고 또 더 깊이 끌고 들어간다.
“서양에 극장이 세워진 이래 인간의 갈등은 대화라는, 말이라는 수단을 통해 가장 잘 극화되고, 이해되고, 향유되어 왔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비평가들은 영화가 모든 것에 앞서 시각적인 것이며 관객의 귀에 기대면 안 된다고 잘못 믿고 있습니다. 전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관객은 영화를 볼 줄 아는 만큼 들을 줄도 압니다.” 그렇게 말했던 맨케비츠는 스스로 시인했듯 “유성영화의 시작과 부상, 절정, 몰락, 최후를 모두 함께한” 감독이었으며, 언어와 소리를 누구보다 능숙히 다룰 줄 알았던 감독인 것 같다. 거기엔 가족에게 물려받은 재능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독일 태생의 문학과 교수였고, 형 허먼 J. 맨케비츠는 파라마운트의 시나리오팀을 이끌다 <시민 케인>의 시나리오를 써서 유명해진 인물이었다. 그가 형의 도움으로 파라마운트에서 대사 다듬는 일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에 오른 것도 그의 언어적 재능을 증명한다.
그의 언어 감각은 연출과 관련해선 목소리의 정교한 배치를 통해 유성영화의 미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발현된 듯하다. 이는 <맨발의 백작부인>(1954)과 <유령과 뮤어 부인>을 비교해봄으로써 더 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전자에서 고귀한 백작부인이 된 뒤에도 길거리에서 맨발로 춤추던 집시 시절로 돌아가고픈 충동에 시달리는 여주인공은 더없이 우아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이와 반대로 후자에서 유령은 훨씬 초월적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현세에 착 달라붙어 있는 듯한 걸걸한 목소리를 자랑한다. 이런 역발상의 목소리 배치가 말로 설명하기 힘든 분위기를 형성하고 인물들의 욕망에 더 깊이 귀기울이도록 만드는 것 같다. 맨케비츠의 작품 세계와 관련해 좀처럼 말해지지 않는 관능이 그 목소리들에 숨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든다.
플래시백 넷.
맨케비츠에 관한 이런저런 말들을 뒤로하고 한 작품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맨발의 백작부인>을 고르겠다. 전체적인 이야기는 <신데렐라> 스토리의 변주로 이해하면 적당하다. 왕자가 구두를 신겨주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구두를 벗겨줄 남자를 기다리는 여자의 이야기다. 스페인 길거리에서 맨발로 춤을 추며 살아가던 집시가 일약 할리우드 스타덤에 오른 뒤, 자신을 상품이 아닌 인간으로 마주 봐줄 줄 아는 이탈리아 백작을 만나 결혼하기에 이르지만, 결국 그도 자신을 여자로 사랑해줄 수는 없음을 깨닫고 스스로를 비극으로 몰아간다. 이런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이 세 남자의 플래시백을 통해 차근차근 펼쳐진다.
구조만 살핀다면 맨케비츠의 다른 대표작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작품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구조를 에워싸는 무언가가 이 영화를 특별하게 느끼게 한다. 그의 다른 영화들이 정연하게 서술돼 있지만 정서적인 측면에서는 다소 단출하거나 건조하게 느껴지는 측면이 있다면, 이 작품에서만은 꽉 짜인 서사 속에서 느닷없을 정도로 강렬하고 풍성한 정념이 피어오르고 있는 것이다. 어디선가 형에 대한 동경과 질투심을 동시에 품고 있었던 맨케비츠가 그의 죽음 직후에 쓴 이야기라 그럴 것이라는 추측을 본 적이 있는데, 얼마나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죽음을 통한 초월이 아닌 현재하는 육체를 껴안고 땅 위에서 뒹굴며 사는 것에 대한 끈질긴 매혹과 향수가 이 작품에 짙게 깔려 있긴 하다. 이 영화의 표면은 거의 금욕적일 정도로 매끈하지만 그 아래 눈에 보이지 않게 들끓고 있는 속된 욕망이 보는 이를 사로잡는다.
“이 영화에 대해선 완전히 빠져들거나 절대 빠져들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맨케비츠의 작품들 중에서 <맨발의 백작부인>을 특히 좋아했던 트뤼포는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말을 일종의 내기처럼 받아들여보아도 재미있겠다. 물론 이 작품에 한해서만이 아니라 맨케비츠의 영화 세계 전체를 놓고 같은 내기를 벌인다면, 오해나 무시를 받았던 그의 숨은 명작들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