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4-06-12
글 : 김혜리

*5월13일과 14일 일기에 <도희야>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여태 동조자를 만난 적은 없지만, 예나 지금이나 내 눈에 디즈니 만화영화 최고의 미인은 <잠자는 숲속의 공주>(1959)의 말레피센트다.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의 디자인을 성실히 계승한 실사 말레피센트의 외모 중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날개다. 얇고 하늘하늘한 시폰 날개는 팅커벨에게나 주라고 말하듯 말레피센트는 거대한 맹금류나 익룡의 강건한 날갯죽지를 가졌다. 그녀의 날개는 비행 수단일 뿐 아니라 적을 후려치고 쓸어버리는 무기이기도 하다.

5/12

스승의 날이 있는 달이다. 1년 전 이맘때 개봉한 <라자르 선생님>과 올해의 <디태치먼트>까지 보고 나니, ‘리버럴한 교사와 그를 따르는 아이들 vs. 진학 실적에 목매는 권위적 학교’ 구도로 갈등이 전개되는 <죽은 시인의 사회>류 영화나 사명감 넘치는 스승이 문제아들을 감화시키는 <언제나 마음은 태양>과(科)의 교실 드라마는 과거의 유물이 됐구나 싶다. 큰 변화는 교사라는 직업을 바라보는 시선과 교육에 거는 기대치에 있다. <디태치먼트>의 영어 임시교사 헨리(에이드리언 브로디)는 내가 속한 세대가 익숙한 스크린 속 선생님들과 마음가짐이 다르다. 헨리는 교육자로서의 자부심과 열의를 멀리한다. 예를 들어 거리에서 매춘하는 소녀를 거둬 숙식을 제공하는 헨리의 행위는 성자의 그것이지만 아이가 ‘손님’을 집으로 끌어들이자 헨리는 “뭐든 네 결정대로 해도 좋다. 다만 내 집 안에서만 하지 말라”며 요구의 범위를 한정한다. 남자가 설정한 교육의 목표도 수세적이다. 헨리는 학생들에게 문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세상의 거대한 우매함에 무뎌지지 않기 위해”라고 설명한다. 즉 교육이 아이들에게 좋은 자질을 더해준다는 포부는 언감생심이고 아이들이 본래 갖고 태어난 좋은 자질들을 상실하지 않도록 혹은 상실하는 속도를 늦추는 것만 해도 성취라고 보는 입장이다. 한데 가만히 영화를 지켜보다 보면, 헨리의 소극성은 본인의 직업에 환멸을 느껴 책임을 방기한 결과이기는커녕 어떻게 하면 교사의 일을 그만두지 않고 지속할 수 있을지 방도를 고민한 결과 다다른 현실적 결론임을 이해하게 된다. 아이들의 인생을 책임지려 하고 모두에게 손을 뻗으려 했다가는, 아이들의 반항과 모욕에 일일이 상처를 받아서는, 절대 교사 생활을 오래 계속할 수 없다고 그는 판단한다. 나아가 단기 임시 교사로 여러 학교를 전전하는 그의 행보도 정규직 교사로 한곳에 정착하면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리라는 예견에서 비롯된 결과로 짐작된다. 보람과 긍지의 부재, 영구히 반복될 무력감에도 불구하고 헨리는 교직을 택했다. 그리고 아이들 곁에 오래 머무르기 위해, 아이들로부터 떨어진 자리에 머문다. <디태치먼트>의 절정은 문제를 겪는 아이들에게 교사가 손을 뻗는 대목이 아니라 거두는 장면이다. 헨리에게 깊이 의지하게 된 두 아이가 그의 여력을 넘어서는 보살핌을 요구하자, 헨리는 못 지킬 약속을 하는 대신 아이들을 밀어내고 사회보장기관의 손에 넘긴다. 관객은 그의 결정이 착잡할지언정 비난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일정한 나이가 지나면 평범한 인간의 내면에는 타인을 위해 내줄 수 있는 공간이 한정돼 있음을 인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번 사명감에 타올랐다가 그곳을 아예 불살라 폐쇄하게 될 바에야 협소하나마 마음속 그 장소가 계속 열려 있을 수 있도록 ‘관리’하는 일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5/13

“나를 데려가주면 안 돼요?”라고 눈으로 호소하는 아이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우는 광경을 정주리 감독의 <도희야>에서 다시 마주쳤다. 말하자면 <도희야> 역시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관한 영화다. 아니 이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투성이다. 아무 죄도 짓지 않았으나 죄인 취급을 받으며 외딴 마을로 쫓겨온 파출소장 이영남(배두나)과 만성적인 학대 아래 자란 마을 소녀 손도희(김새론). 눈을 씻고 둘러봐도 이 이야기 안에는 두 사람이 따뜻하고 건강한 관계를 맺도록 응원하는 우호적 조건이 없다. 사랑하기엔, 모든 여건이 불비하다. 우선, 조직 사회에서 성적 지향을 부정당한 영남은 영화가 시작할 무렵 이미 누군가를 어떤 식으로든 사랑하기에는 팔다리가 잘린 상태에 처해 있다. 그녀는 이중의 분노로 고통받는다. 영남은 개인의 자연스런 정체성을 죄로 취급하는 통념에 분노하는 동시에, 명백히 그릇된 통념의 평결에 순응해 덩달아 떳떳지 못하다고 여기는 스스로에게 분노한다. 그리고 밤마다 진통제를 들이켜듯 술에 의존한다. 한편 영남이 경찰로서 임무를 수행하다가 돕기 시작한 도희는 마냥 천사 같은 희생자가 아니다. 그처럼 끈질기게 왜곡된 환경에서 자라면서 뒤틀린 데가 없대도 이상한 노릇이다. 도희는 병든 아이다. “아무리 맞아도 춤추면 괜찮아진다”고 말하며 잘못을 저질렀을 때 체벌이 돌아오지 않으면 오히려 두려워한다. 외톨이인데도 친구를 사귀고 싶어 하지 않는 것도 불건강한 징후다. 게다가 도희는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계략도 짠다. 이 소녀는 병듦으로써 살아남았다.

나는 <도희야>가 ‘접고 들어가지’ 않는 영화여서 끌렸다. 우리에겐 사회적, 성적, 문화적 소수자가 영화의 주인공일 경우 핸디캡을 용인하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적대자와 갈등하고 역경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도덕적으로 책잡힐 데가 없고 오류도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마치 소수자는 더 착해야 하고 그래야만 마음 푹 놓고 지지할 수 있다는 듯. 하지만 정주리 감독은 접고 들어가지 않는다. 영남은 도희 아버지(송새벽)와 다를 것 없는 알코올중독이다. 주정으로 민폐를 끼치지 않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균형을 잃고 흔들리는 영남은 위태로운 어른이고 결격사유가 있는 보호자다. 도희로 말하자면 순수하지도 정직하지도 않다. 그런가 하면 도희 아버지는 영화 초반 관객이 품는 의심에도 불구하고 의붓딸을 성추행한 적이 없다(고 추정된다). 하지만 <도희야>는 이렇게 묻는다. 아이를 추행하지 않고 끼니를 굶기지 않고 학교를 보낸 걸로 충분한가? 그럼 우리는 도희를 방치하고 학대하는 친권자 손에 내버려둬도 좋은가? 피해자는 해맑은 얼굴로 순순히 당하기만 해야 구조받을 자격이 있나? 영남은 꼬투리 잡힐 일을 방지하기 위해 상처입고 찾아온 소녀를 씻겨주지도 안아주지도 말았어야 옳았을까? <도희야>는 이와 같은 일련의 질문을 던지며, 약자의 약점과 정당방위 과정에서 발생한 흠집과 일탈까지 이야기로 끌어안는다. 정주리 감독은 영남과 도희를 자칫하면 오해받고 단죄받기 쉬운 연약한 자리에 세워놓은 다음, 이 불리한 상황에서 도출되는 결과야말로 현실과 가까운 결과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인물들에 대해 내리는 판단이 진짜 우리의 판단이라고 강조한다.

5/14

<도희야>가 마주하는 마지막 악조건은 영남의 선택에 따르는 불확실성이다. 이중 첫 번째는 영남 본인의 의지에 관한 질문이다. 그녀는 가뜩이나 사회적으로 악전고투하고 있는 처지에 스스로를 더 궁지로 몰아넣을 위험을 무릅쓰며 자기를 필요로 한다는 이유만으로 소녀에게 손을 내밀 수 있을까? 용기를 내어 결행했다손 쳐도 두 번째 질문은 훨씬 무겁다. 선의와 성의를 입력한다고 바람직한 결과가 출력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오직 영남만 따르고 의지한다 해도 도희는 마음에 진한 흉터를 가진 아이이며 자라면서 변할 것이다. 추문이 두 사람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은 높고 영남은 후회할지 모르며 도희는 가까운 미래에 영남을 원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사람들은 확실한 보장 없이 관계를 시작한다. 각자 조금씩 성치 못한 상태로 서로를 돕고자 불완전한 노력을 기울인다. 내가 가진 무엇인가를 걸고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 타인을 위한 행위를 감행할 때 비로소 사랑이라는 단어를 우리는 고려할 수 있다. 오로지 이것만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위안이다. <도희야>의 결말부에서, 억수 같은 비가 내리는 도로를 운전해가며 잠든 도희에게 수심어린 눈길을 던지는 영남을, 카메라 역시 수심에 차서 지켜본다. 영화가 끝나고도 다하지 않을 이 염려스런 시선은 이상하게도 관객인 나를 안심시킨다.

좋아요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의 캐스팅

1970년대의 무기 개발자 볼리바 트라스크는 돌연변이를 학살하는 로봇 센티넬을 발명한다. 그는 뮤턴트들이 인류를 대동단결시킬 새로운 공공의 적이라고 지목하면서도 “그들을 증오하진 않는다”고 운을 띄워 신념의 더 깊은 내용을 궁금하게 만드는 악당이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은 왜소증을 가진 배우 피터 딘클리지(<스테이션 에이전트> <왕좌의 게임>)를 볼리바로 캐스팅했지만 그의 장애는 극중에서 한번도 따로 언급되지 않는다. 오직 그의 의지와 행위만이 중요하며 싱어는 그 연출을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과연 <엑스맨> 시리즈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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