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정범] 트릭보다 정서
2014-06-18
글 : 주성철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우는 남자> 이정범 감독

이정범 감독은 ‘<아저씨> 감독의 다음 영화’라는 시선과 내내 싸웠다. <아저씨>(2010)는 이제 막 두편을 만들었던 그에게 단숨에 ‘대표작’이라는 영광을 안겨주었지만,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채찍질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그렇게 <우는 남자>는 <아저씨>로부터의 거리두기로 시작한 영화다. 그럼에도 <아저씨>의 태식(원빈)과 <우는 남자>의 곤(장동건) 사이에서, 액션 누아르의 장르적 매혹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부담감도 막중했다. ‘멀고도 가깝게’라는 흔한 표현이 두 작품 사이에 자리한 긴장감이다. 인터뷰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됐다.

-도입부에서 소녀를 쳐다보고 물을 주르륵 뱉어내는 장난을 치는 곤을 보고 있으면, 감독이 처음부터 장동건을 대놓고 ‘양아치스럽게’ 연출하려고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맞다. 실제로는 무척 점잖고 신사적인 남자인 장동건을 껄렁껄렁한 남자로 만들고 싶었다. 첫 등장 장면을 고심하면서, 물 뱉어내는 장면 말고 아이를 쳐다보고 눈을 사팔뜨기처럼 모으는 장면도 생각해봤다. (웃음) 그러다 지금의 버전이 된 건데, 그게 장동건을 망가트린다는 차원과는 좀 다른 문제다. 기본적으로 허세나 겉멋이 잔뜩 들어간 킬러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곤이라는 캐릭터를 만들면서 염두에 둔 건 <파이란>(2001)의 강재(최민식)다. 자신의 상처를 들키지 않으려고 위악스럽게 행동하는 남자랄까. 나중에 아이처럼 울 때 그 마음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그처럼 더 놀게 놔두고 싶었다.

-제작 전부터 <우는 남자>라는 제목을 두고 고이케 가즈오의 <크라잉 프리맨>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 여자를 죽여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는 설정도 같다. 그리고 곤의 영어 이름으로 나오는 ‘마크’는 <영웅본색>(1986)에서 주윤발의 이름이기도 하다.
=<크라잉 프리맨>은 정말 좋아했던 만화다. 일단 야했다. 여자 나신이 나오는 만화를 처음 봤으니까. (웃음) 그림체는 물론이고 내내 보는 이의 감각을 자극하는 설정과 전개가 인상적이었다. <우는 남자>를 만들며 직접적인 영향을 준 건 없다. 여자를 죽여야 한다는 설정이 같긴 한데 <크라잉 프리맨>의 주인공은 살인이라는 임무를 수행할 때마다 울고 <우는 남자>는 마지막에 가서야 운다. 오히려 장 피에르 아메리스의 <웃는 남자>(2012)가 나왔을 때 제목에 대한 고민을 했다. 그래도 좀 고집을 부렸다. <아저씨>도 모두가 반대했던 제목이었다. 공통점이라면 오히려 <크라잉 프리맨>이나 <우는 남자>나 ‘청소년 관람불가’라는 정서라고 생각한다.

-당신 얘기처럼 데뷔작 <열혈남아>를 제외하고는 <아저씨>와 <우는 남자>가 ‘청소년 관람불가’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 또한 제목 작명만큼이나 당신의 고집처럼 느껴진다.
=<아저씨>를 만들었던 사람이 흥행에 힘입어 갑자기 ‘15세 관람가’ 영화를 만든다? 그건 좀 맥빠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15세 관람가 영화로 가자는 주변의 요구도 무척 많았지만, 그랬다가는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들이 훼손될 것 같았다. 단지 좀더 어린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피가 뿜어져 나오고 내내 총격전의 소음이 가득한 날것 같은 생생한 액션영화, 그리고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과거의 기억과 소녀를 죽였다는 현재의 속죄의식이 한데 뒤엉켜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울음을 터트리는 한 킬러의 모습이라는 이 영화의 ‘코어’를 훼손시키고 싶지 않았다.

-액션 누아르라는 측면에서 <우는 남자>의 야심은 설정부터 어마어마하다. 홍콩 누아르를 연상시키는 흑사회는 물론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이스턴 프라미스>(2007)나 최근 뤽 베송 사단의 액션영화에 출몰하는 러시아 마피아가 등장하고, 중남미를 무대로 하는 마약 카르텔 영화에 등장할 법한 콜롬비아에서 온 형제 킬러도 있다.
=기자간담회에서 어느 기자가 옛 홍콩 누아르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기본적으로 그런 바탕 위에서 <이스턴 프라미스>는 꽤 참고가 된 영화다. 그 영화에서 니콜라이(비고 모르텐슨)의 문신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러시아 마피아 세계에서는 문신이 그 조직원의 지위나 계급을 드러낸다. 그래서 곤의 문신을 디자인할 때 비슷한 느낌을 주면서도 너무 비슷하게 가지는 않도록 조율했다.

-무엇보다 <우는 남자>는 최근 한국 액션영화들 중에서 전쟁영화를 제외하고는(웃음) 가장 압도적인 화력을 자랑한다. 액션영화라는 측면에서 <아저씨>와 가장 큰 차별점을 보이는 부분이고, 그 컨셉에서 감독의 의도가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특수효과를 맡은 ‘데몰리션’에서 <마이웨이>(2011)를 작업했을 때보다 총의 피탄이 더 많이 나왔다더라. 전쟁영화인 <마이웨이>보다 훨씬 더 총을 많이 쏜 거다. (웃음) <아저씨>에서는 한정의 권총과 맨몸으로 부대끼는 격투 위주였는데, 그걸 다시 반복하기는 싫었고 총격전이라는 컨셉이 떠올랐다. 최근 <도둑들>(2012)이나 <감시자들>(2013)에서 도심 총격전이 중량감 있게 묘사되기는 했지만, 과연 대낮의 도심 아파트에서 이 정도까지 벌여도 되나, 하는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킬러가 외국에서 들어왔고 또 그를 잡기 위해 외국조직원들이 몰려왔다는 설정이면 충분히 가능하리라고 봤다. 또 영화에 나오지는 않지만 그들이 마산항으로 들어오고, 거기서 돈이 목적인 미군들이 탄약 창고에서 총기류를 제공하는 설정이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연출을 위해 거의 매일 심신이 피로해질 정도로 총격전 영상을 봤다. 실제 총에 맞아 죽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온 액션영화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한발을 맞아도 벽돌로 가슴을 내려치는 충격이라는 사람도 있고, 달려오는 전철에 몸이 치이는 충격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촬영감독, 특수효과팀과 함께 영화 속 장미아파트 총격전을 다큐처럼 가자고 했다.

-아파트 꼭대기에 기관총을 든 스나이퍼가 있는 장미아파트 총격전은 서극 감독의 <순류역류>(2000)를 떠올리게 했다.
=<순류역류>는 정말 좋아하는 영화다. 옥상에 있는 스나이퍼가 전체를 조망하는 가운데, 다른 침투 조직원들이 와이어를 이용해 돌돌돌 아파트 외벽을 타고 내려오는 장면은 기가 막히다. 그외 총격전이라는 컨셉에서 <순류역류> 외에도 마이클만의 <히트>(1995)나 두기봉의 <미션>(1999)도 늘 도움이 된 텍스트들이다.

-그런 가운데 아파트에 기동타격대가 들이닥치기에 <순류역류>만큼의 더 규모 있는 액션 신이 펼쳐질까 했더니 그건 아니었고, ‘옥에 티’처럼 폭파 장면을 CG로 처리했던 <순류역류>와 달리 실제 아파트에서 폭파 장면을 시도한 것은 대단했다.
=기동타격대와의 대규모 충돌을 기대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주민들이 왜 등장하지 않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 먼저 전자의 경우 <레옹>(1994)처럼 규모에 눌리지 않고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을까 하는 판단부터 했다. 그래서 <다이하드>(1988)처럼 건물 내에서 한 남자가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사망유희>(1978)처럼 하나씩 처리하는 구조로 갔다. 기동타격대와의 대규모 충돌이 오히려 드라마의 밀도를 떨어트릴 것 같았다. 주민의 경우 한창 총격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아이들이 쳐다보는 장면도 있고, 귀가 들리지 않는 할머니가 총격이 오가는 사이로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와 버리러가는 장면도 있었다. 그런데 그 또한 편집할 때 보니까 극적 긴장감을 떨어트리더라. 그래서 주민들의 소음은 사운드로 처리하고 경찰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휘몰아치고 빠지는 설정으로 갔다. <순류역류>의 폭파 장면은 CG가 좀 조악해서 “엥 뭐야?” 그럴 수도 있는데 그전까지 워낙 액션 디자인이 잘돼 있어서 서극 감독이 그냥 ‘마지막에 이 정도야 뭐 어때’ 한 것 같다. 존경스러운 태도라고 생각한다. (웃음) <우는 남자>는 전체적으로는 다큐처럼 다가오는 아파트 전투 신과 달리, 라스트에서 모경(김민희)이 근무하는 벤추라홀딩스 건물에서 벌어지는 ‘감정 대 감정’의 싸움과 균형을 맞춰야 하는 문제도 있었다.

-<열혈남아>의 설경구와 나문희, <아저씨>의 원빈과 김새론과 비교하면 <우는 남자>의 장동건과 김민희는 가장 비슷한 나이대의 남녀다. 그래서 멜로드라마를 기대하는 관객도 많을 것이다.
=내가 그런 감정을 잘 다루지 못하는 것도 있는데, 언제나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도 바로 얘기하지 못하고 떠난 뒤에 뒤늦게 자책하는 스타일이다. 내 영화 속 남자들도 좀 그런 것 같다. 솔직하지 못할뿐더러 성적 긴장감도 제로다. (웃음) 자신이 죽인 아이의 엄마와 사랑에 빠지는 게 괜찮은 걸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무엇보다 <우는 남자>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한 남자의 길고 긴 여정으로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초췌하게 쓰러져 앉아 있는 곤을 보면서 <친구>(2001)에서 역시 장동건이 연기한 ‘동수’ 생각이 난다는 사람도 꽤 있더라. 이제 중년으로 접어든 한 남자배우에게 멋진 순간을 선사하고 싶었다. 맨 처음 그와 의기투합할 때도 준혁(장동건의 아들)이가 나중에 ‘우리 아빠 진짜 멋있다’라고 느낄 만한 진한 누아르 영화 한편 하면 어떻겠냐고 했다.

-그러면서 또한 감정 과잉이라고 느껴질 만큼 곤이라는 캐릭터의 과거까지 깊숙이 들어간다. 곤이 한국에 있던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갔던 대중목욕탕을 다시 찾을 정도다.
=곤에게 어떤 기억이 남아 있을까 생각했다. 나 역시 돌이켜보면 어렵게만 보이던 아버지와 벌거벗고 목욕탕에 가서 온몸이 시뻘겋게 때밀림을 당한 뒤 바나나우유를 먹던 느낌이 생생하다. (웃음) 바로 그곳에서 곤이 비참했던 미국 생활을 잊고 다시 순수한 아이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공간에 대한 의미 부여가 중요했던 두곳이 바로 목욕탕과 엘리베이터다. 그런 정서에 관객이 얼마나 공감해줄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나 내가 영화를 만들면서 맨 처음 상정하는 것은 남성 관객이다. 또한 맥주보다는 소주가 생각나는 영화였으면 좋겠다. <파이란>을 보고 나왔을 때 도저히 그 기분 그대로 집에 돌아갈 수 없었던 그런 느낌. (웃음)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당신이 그냥 상남자 감독인 것 같다. (웃음) <아저씨>와 <우는 남자>의 공통적인 요소는 악당들이 형제라는 점이고, 주인공이 눈빛으로 존경을 표하는 또 다른(하지만 이겨야만 하는) 상대가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지적인 트릭보다는 남성적 체취가 묻어나는 정서가 보다 비중 있게 영화를 이루고 있다.
=두기봉의 <미션>에서도 남자들이 그저 아무 말, 표정 없이 휴지 뭉치로 축구하듯 툭툭 주고받는 장면을 가장 좋아한다. 물론 기타노 다케시의 <소나티네>(1993)도 좋다. 내 정서가 좀 그렇다. 그래서인지 최근 <무간도>(2002)나 <절청풍운>(2009) 같은 홍콩영화들을 보면 너무 지적으로 꽉 짜여 있는 게 부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조금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영웅본색>이나 <첩혈가두>(1999)의 끈끈한 정서를 그리워하다보니, <무간도> 시리즈도 그런 옛 정서가 스며든 2편을 가장 좋아한다. 뭔가 작위적인 트릭을 잘 짜지 못하는 것도 나라는 인간이 단순해서 그렇다.

-지금까지 만든 세편의 영화를 ‘삼부작’이라 불러도 될까. 그렇다면 다음 작품이 어떨지 궁금하다.
=<우는 남자> 시나리오를 쓰면서 뒤늦게 깨달았던 건데, 내 영화들은 하나같이 남자주인공들이 울면서 끝나더라. <우는 남자>까지 해서 ‘우는 남자 3부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음에는 안 우는 영화를 하고 싶다. 엄마 그늘에서도 벗어나고, 하여간 그 세계에서 좀 벗어나고 싶다. (웃음) 물론 액션 누아르 장르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겠지만, 이제 15세 관람가 영화를 찍고 싶다는 마음하고도 연결된다. ‘우리는 왜 이런 소설이 없을까’ 신선한 충격을 줬던 가네시로 가즈키의 <레벌루션 No.3> 같은 고등학생 얘기를 해보고 싶다. 최근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그런 마음이 더 증폭된 것 같다. 이제 울지 말자, 힘내서 살자, 그런 마음이랄까.

이정범 감독은 매력적인 상남자와 여린 소년의 이미지, 그 묘한 극점을 오가는 사람으로 느껴졌다. 마치 ‘아저씨’처럼 <첩혈가두>의 ‘으리으리한’ 의리에 대해 얘기하며 좋아하는 옛 홍콩영화들을 열거할 때는 ‘그런 정서로는 요즘에 영화하기 힘들 텐데’라는 장난스런 생각이 들면서도, 도입부에서 소녀가 총에 맞아 죽는 장면에 대해 얘기할 때는 그의 깊은 배려심을 느낄 수 있었다. “할리우드영화에서는 아이를 죽이는 장면 자체가 금기시되지 않나. 나도 아이가 있는 아빠라 최대한 절제해서 찍고 싶었다”라는 그는 “지금도 영화에서 총을 맞은 아이의 가슴에서 피가 번져나오는 장면을 보면 미칠 것 같다. 단지 그 한 장면만 등장하는 아역배우의 부모에게도 미안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동시녹음기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제 아파서 피가 나와, 자 가슴을 만져볼까, 저기 아저씨 한번 쳐다보고 뒤로 돌아, 그리고 넘어지는 거야’라며 현장에서 아이가 딴생각을 하지 않도록 내내 말을 걸어 지도했다. 영화 속 곤에게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은 그 장면이 이후 감독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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