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 유럽 영화사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이 숫자는 체코 영화사를 이야기할 때도 결코 빠트릴 수 없을 것이다. ‘프라하의 봄’이 피로 물들었던 바로 그해. 그전까지 체코 영화계에서는 공산주의 체제 약화와 자유화 운동에 따른 검열 완화 아래 새로운 물결이 일고 있었고 밀로스 포먼, 이리 멘젤, 베라 히틸로바, 얀 네멕 등이 그 흐름을 이끌었다. 하지만 역사에 기록돼 있듯, 소비에트의 무력침공에 녹았던 물줄기도 다시 얼어붙고 말았다. 그 짧았던 봄과 체코의 역사를 6월17일부터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릴 ‘2014 체코영화제: 역사적 순간들’을 통해 새롭게 만날 수 있다.
1960년대에 만들어진 두편의 상영작이 가장 주목할 만하다. 먼저 포먼의 <소방수의 무도회>(1967)는 당시 사회의 권위주의와 관료주의를 신랄하게 비웃는 블랙코미디다. 어느 작은 마을의 소방서에서 전임 서장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성대한 파티를 계획한다. 하지만 경품 추첨 상품들이 차례로 없어지고, 미인대회 후보들도 하나둘 달아나버리고, 인근에서 화재 사고까지 벌어지면서 파티는 우스꽝스럽게 끝나버린다. 나중에 할리우드로 망명해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1976) 등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기도 한 포먼의 세 번째 극영화로, 다큐멘터리적 터치와 풍부한 코미디 테크닉이 절묘하게 결합돼 있는 작품이다. 그로테스크한 소극 속에서 시대상에 대한 삐딱한 시선을 감지하기 어렵지 않다.
반면 보이테흐 야스니의 <모두 착한 사람들>(1969)은 실로 목가적인 분위기의 역사극이다. 이야기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무렵인 1945년 5월, 모라비아라는 작은 농촌 마을에서 시작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함께 음주가무를 즐기며 절친히 지냈던 일곱 친구들은 이후 마을에 공산주의 바람이 불어닥치면서 서로 다른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들이 통과해나가야 하는 지난한 세월을 때로는 부조리극처럼, 때로는 서사시처럼 띄엄띄엄 훑어 내려가는 영화는, 풍부한 서정을 담고 있는 동시에 그 속에 날카로운 비판의식 또한 품고 있다. 특히 집단 농장화 과정이 당의 주도하에 얼마나 억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집요하고 장황하게 묘사한다. 이렇듯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불신과 환멸이 짙게 배어있는 이 작품은 1968년에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그 직후 소비에트 정부에 의해 상영 금지에 처해지기도 했다는 점에서 당시의 분위기를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반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다른 네편의 영화 역시 각자의 방식으로 체코의 과거를 여행한다. 2편은 장르적 접근이 두드러진다. 밀로쉬 우르반이 쓴 동명 팩션이 원작인 <산티니의 말>(2011)은 체코의 유명 건축가 얀 블라제이 산티니의 작품들을 소재로 300년 전 체코 역사를 재구성한 댄 브라운풍의 역사 스릴러다. 그보다 더 단단한 만듦새를 자랑하는 <인 더 섀도우>(2012)는 전후 체코에서 한 형사가 단순 강도 사건으로 조작된 유대인 축출 음모를 파헤치는 과정을 그린다. 그런가 하면 아그네츠카 홀란드의 <타오르는 불씨>(2013)는 ‘프라하의 봄’의 배경과 맥락을 현대적 시점에서 다시 파헤치며, <흘러간 나날들>(2013)은 죽음을 앞둔 화가와 두 여인의 복잡한 관계와 심리적 풍경을 섬세하게 그려냄으로써 산 자들이 새로 써나가야 하는 역사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작품들을 통해 체코 영화사의 궤적을 온전히 훑어보는 것은 무리겠지만, 이 영화들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의 간극을 넘나들며 체코의 과거와 현재를 새롭게 이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시간의 다리가 열리길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