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병에 담긴 시간
2014-06-19
글 : 김혜리

*5월16일 일기에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로크>는 매우 독창적인 85분 길이의 캐릭터 스터디다. 영화에서 흔히 보는 인물 유형에서 벗어나는 주인공(톰 하디)의 성격도 흥미롭고,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장거리 운전의 단일한 설정으로 탐구한 형식도 확신에 넘친다. 한데 승용차 운전석 중심으로 공간이 설계된 <로크>는 적절한 마스킹 시설을 갖추지 않은 상영관에서 훼손되기 쉬운 대표적 사례이기도 하다. 밤의 고속도로를 배경으로 2.35:1의 비율로 촬영된 <로크>의 구도는, 화면 속 암부(暗部)나 차창의 테두리가 마스킹되지 않은 스크린의 검은 여백과 뒤섞이면 흐트러지기 십상이다.

5/16

7년 만에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연출한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를 보고 뭉클했다. 한 영화의 훌륭함을 판단하는 일과 별개로, 사적으로 소중히 여기게 되는 경우는 해당 영화를 마치 한 사람의 살아 있는 인간처럼 느끼는 과정을 포함하는데, 브라이언 싱어판 <엑스맨> 영화들도 내겐 그렇다. 하지만 왜? 싱어가 연출한 세편의 <엑스맨> 영화와 직접 메가폰을 잡지 않은 프랜차이즈의 나머지 사이의 차이는 뭘까?

엑스맨의 차별성은 타고난 초능력이 수치와 영광, 둘 모두의 근원이라는 설정에 있다. 한데 브라이언 싱어의 연출은 액션 블록버스터에 필수적인 스펙터클과 쾌감을 책임지는 영광의 요소 못지않게, 주류 사회에서 축출된 뮤턴트들의 모멸감에 작가/감독으로서 비상한 관심을 보인다. <엑스맨> 창세기의 1장1절 격인 어린 매그니토의 유대인 수용소 장면은 이 경향을 함축한 예고편이다. 첫 번째 <엑스맨> 서사의 큰 부분은 기댈 사람도 갈 곳도 없는 처지인 울버린과 로그가 눈 덮인 캐나다를 방랑하는 이야기다. <엑스맨2>의 명장면 중 하나는 아이스맨 바비(숀 애시모어)가 가족 앞에서 정체성을 커밍아웃하고 사실상 절연당하는 실내 시퀀스이다. 2편에서 브라이언 싱어는 자연사 박물관에 견학 간 자비에 영재학교의 학생과 교사들이 호모 사피엔스 관람객들로부터 받는 두려움과 경멸의 시선 사이를 빠져나오는 일화를 시간과 정성을 들여 만들기도 했다. 달리 말해, 브라이언 싱어의 <엑스맨>에 있고 다른 <엑스맨> 영화에 없는 요소는 바로 다수자 호모 사피엔스의 시선으로 대상화된 뮤턴트의 이미지다. 싱어의 엑스맨들은, 설정만 마이너리티고 일단 영화 내부로 들어가면 부러운 능력을 뽐내는 우월한 권력자들이 아니다. 다수자의 시선으로 프레임에 갇히는 순간 뮤턴트들은 무서운 괴물 아니면 동정해야 할 존재로 주변화된다.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에서는 파리평화협정 조인식 장면이 눈길을 쓴다. 미스틱(제니퍼 로렌스)의 무기개발자 암살을 예방하려고 달려간 엑스맨들의 시도는 빗나가고, 예기치 못한 소동이 뒤따른다. 창밖으로 탈출한 미스틱은 조인식을 보러 몰려든 기자들과 시민들의 무리 가운데 돌연변이의 파란 몸으로 떨어지고 그녀를 뒤쫓아 뛰어내린 매그니토(마이클 파스빈더)와 비스트(니콜라스 홀트)도 뮤턴트의 모습을 노출한다. 브라이언 싱어는 이 대목에서 옳다구나 앞다투어 뮤턴트들을 촬영하는 70년대 방송 카메라의 4:3 비율 화면으로 스크린 사이즈를 바꾼다. 관객은 갑자기, 신기하고 징그러운 구경거리 앞에 경악하며 웅성대는 군중의 시점숏으로 우리의 주인공들을 쳐다보게 된다. 액션의 상황도 상황이지만, 사실적인 질감으로 흔들리는 뉴스 카메라 화면에 잡힌 엑스맨들은 훨씬 불리하고 연약해 보인다. 겨우 도망친 미스틱은 레이븐의 모습이 되어 파리의 한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는다. 이때 조금 전 우리가 본 뉴스 카메라 화면이 TV에 보도되자 간호사가 동정을 표한다. “저렇게 태어나면 얼마나 끔찍할까요? 그녀에게도 가족이 있을까요?”

브라이언 싱어는 외부자의 시선이 엑스맨들에게 주는 차가운 금속성의 촉감을 안다. 그는 액션 복판에서도, 더 넓은 세계에서 돌연변이들에게 배정된 좌표를 잊지 않는다. 다수자들은 마이너리티와 마주칠 때에만 스스로가 지닌 관점을 깨닫지만 소수자들은 삶의 모든 순간 ‘정상인’들의 시선을 통렬히 의식한다. 싱어 스스로가 게이라는 사실도 이 결과를 끌어낸 하나의 필요조건일 것이다. 그러나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서명이 담긴 <엑스맨> 영화들이, 이야기 밖 연출자의 스토리텔링이라기보다 엑스맨의 일원이 들려주고 보여주는 세계처럼 느껴지는 까닭은 영화 내부에 있다.

5/19

브렛 래트너, 매튜 본 감독의 3, 4편보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1, 2, 5편을 선호하는 <엑스맨> 관객 열명 중 일곱명은 ‘우아함’을 거론한다. 새삼 사람들은 어떤 대상에 우아(優雅)하다는 표현을 쓰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보다 넓은 의미이긴 하지만 철학자 테오도르 립스는 오래전 ‘우미’(優美)라는 미적 범주를 “딱딱하거나 날카롭거나 거칠지 않은 것”, “숭고를 배척하지 않고 크기와 고요함, 깊이를 갖는 것”과 연관해 설명했다. 반면 더 좁은 의미의 우미, 그러니까 우리가 요즘 흔히 말하는 우아함과 비슷한 아름다움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철학자 E. V. 하르트만은 “숭고와 대립되는 가련함”, “도덕적 의지에 대한 떳떳함”을 조건으로 나열한 바 있다.

<엑스맨2>나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가 우아하다는 전반적 인상을 남기는 이유는 각각의 요소를 전체로 통합하는 방식과 액션 시퀀스의 특징에서 찾아볼 수 있을 법하다. 싱어의 슈퍼히어로영화는 가장 큰 쾌감을 개인 숭배적인 캐릭터 묘사나 최종적인 승리의 후련한 스펙터클에서 구하지 않는다. 재미에 접근하는 스타일이 간접적이어서 덜 아등바등해 보인다고도 말할 수 있다. (좀더 부정적인 관객은 이 특성을 “잔재미만 많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앙상블 영화로서 당연한 요건일 수도 있지만 <엑스맨> 시리즈의 큰 재미는 주요 인물 두셋의 카리스마나 일대일 갈등이 아니라, 사방으로 가지를 치며 사안에 따라 합종연횡하는 인물들의 유동적 그물망에 있다. 예컨대 미스틱은 극중에서 많은 남성 뮤턴트들과 각각 다른 의미로 연결된다. 프로페서 X 찰스는 그녀에게 아빠 같은 오빠고 비스트는 로맨틱한 남자친구지만 생각의 차이로 인해 관계가 답보된 상대이며 매그니토는 연상의 연인 분위기를 풍기는 정치적 멘토다. 울버린과는 국면에 따라 격투를 벌이기도 하고 유혹하기도 하는데, 무정부주의 단독자인 미스틱이 보기에 본인과 닮은 면이 있으면서도 줄곧 프로페서 X 진영에 머무르는 울버린은, 공연히 그냥 도발하고 싶어지는 상대가 아닐까 짐작하게 된다. 한편 프로페서 X와 매그니토는 미스틱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표면적 경쟁 아래에서, 서로를 가장 잘 파악하고 자극하는 친구를 향한 애증 싸움을 전개한다. 인물들의 관계는 좀처럼 고정되지 않는다. 심지어 울버린은 <엑스맨> 1, 2편에서 프로페서 X로부터 배운 지혜를,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에 이르러 젊은 프로페서 X에게 거꾸로 가르친다. 멋진 서클이다. 브라이언 싱어는 영화 잡지 <엠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 “여러 가지 사건이 동시에 발생하는 장면을 사랑한다”고 취향을 밝힌 적이 있는데 영화를 보면 수긍이 간다.

브라이언 싱어판 <엑스맨> 영화 세편을 통틀어 최종 액션 클라이맥스를 가장 인상적인 신으로 기억하는 관객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는 솔직히 약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싱어는 누가 봐도 최고의 액션감독이 아니다. 다만 싱어의 대표적 액션 신들은, 세부를 소거하고 나면 궁극적으로 ‘주먹 싸움’ 내지는 큰 물리력의 충돌로 수렴되는 여타 슈퍼히어로영화 속 전투와 확실히 구별된다. 예컨대 <엑스맨2>의 오프닝에서 백악관에 침투한 나이트 크롤러(앨런 커밍) 액션에서 무술보다 기억에 남는 요소는, 텔레포트 궤적을 따라 펑펑 터지는 푸른 잔상의 시각효과와 존 오트먼의 유려한 편집, 그리고 관능적으로 꿈틀대던 자객의 꼬리다.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에서 시간을 미분하는 능력을 지닌 퀵실버(에반 피터스)의 펜타곤 주방 액션은 사실 액션 장면이라고 부르기도 주저된다. <매트릭스> 이후 ‘불릿 타임’을 제일 멋지게 시각화한 이 장면은 그냥 소년의 유희다. 액션은 우리 머릿속에서 비로소 일어난다. 초고속 움직임이라는 점을 공유하는 두 장면을 브라이언 싱어는 전자는 인간의 관점으로 아주 빠르게, 후자는 뮤턴트의 시점으로 아주 느리게 연출했다. 이는 물론 나이트 크롤러의 파워는 텔레포트고 퀵실버의 능력은 “그냥 빠른 것”이라는 차이점과도 맞물린다. 두 장면은 한스 짐머 스타일의 쿵쾅대는 액션영화 스코어와 딴판인 음악으로 반주된다. 아니, 정의된다. 싱어가 두 액션을 위해 고른 모차르트 레퀴엠의 <신의 분노>와 70년대 팝송 <타임 인 어 보틀>은 관객에게 매우 친숙한 곡들로서, 영화 밖으로부터 강력한 정서를 끌고 들어와 두 액션 장면의 목표를 완성한다. 백악관 신의 목표는 비장미이고, 펜타곤의 그것은 유머다. 브라이언 싱어의 야심만만한 액션 신들은 싸움이라기보다 공연이다.

5/20

목적지까지 약 12시간 비행기를 타야 하는 출장길에 올랐다. 연도는 가물가물하지만 항공기 이코노미 클래스에 개인용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이 도입된 걸 처음 보았을 때 세상이 좋아지고 있다고 자못 흥분했던 기억이 있다. 언제 어떤 영화를 볼지 내가 결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차하면 착석하자마자 기내지를 뒤적여 나만의 미니 영화제를 프로그래밍할 수도 있지 않은가? 미개봉작도 꽤 있고! 하지만 이상과 현실의 낙차는 여객기 비행 고도 3만 피트보다 크다. 우선, 나이 듦에 따라 장거리 비행의 실체는 돈 내고 자초한 고문과 비슷해지고, 이코노미 클래스 좌석 공간은 어째 점점 좁아진다(고 적어도 체감한다). 겨우 이륙해서 아침부터 공항에 지각하지 않으려고 경직했던 근육이 풀리는가 싶으면, 이내 무릎 밑으로 피가 통하지 않는 시간이 도래하고 안구는 바짝바짝 메말라간다. 재활용 산소를 들이쉬고 내쉬다 보면 정신은 점점 몽롱해진다. 요컨대 도저히 지적, 감정적 도전을 요구하는 영화를 감당할 컨디션이 아니다. 아무리 영화평론계의 태두라 해도 장거리 비행 중에는 가벼운 영화를 고를 게 분명하다고 스스로를 위안한다(게다가 태두의 반열이라면 장년에 접어들었을 테니까). 게다가 손바닥 두개만 한 스크린에 최적화되느라 좌우상하가 잘린 화면과 조악한 화질도 예전과 달리 심각하게 마음에 걸린다. 오로지 새 영화를 공짜로 본다는 사실에 몰입해 눈에 보이는 게 없던 순수의 시대가 내게도 있었건만. 결국 비행기 여행 중 선택하는 영화는 “지상에서는 일부러 보러 갈 일이 없을 듯한, 그러나 향후 업무에는 도움이 될 타이틀”로 귀착되고 만다. 그리하여 최근 끝까지 관람한 영화가 <나우 유 씨 미: 마술사기단> <리스본행 야간열차> <잭 라이언: 코드 네임 쉐도우> 등이다. 오히려 영화가 훌륭해지려는 조짐을 보이면 좋은 영화의 풍미를 관람의 악조건이 망칠까봐 겁나 창을 닫게 된다. <머드>가 그랬다. 나는 ‘하늘을 나는 멀티플렉스’에서는 영화의 가치가 달라지는 현상을 화장실에 다녀오다 다시 실감했다. 하얗게 빛나는 수십개 스크린의 1/4 정도가 <뽀롱뽀롱 뽀로로>와 <겨울왕국>에 점령돼 있었고, 그들이야말로 어린 승객들의 짜증과 보챔으로부터 우리 비행기의 쾌적함을 지켜주는 수호신이었다.

‘나만의 작은 영화제’라는 애초의 낭만적 상상 가운데 실현된 대목이 없잖아 있긴 하다. 연속으로 서너편을 꾸역꾸역 관람한다는 것, 졸다가 깨다가 하며 영화를 본다는 것, 한번 그 안에 들어가면 떠날 수 없다는 강제 등이 영화제와 항공기 영화 감상의 공통점이다. 그렇지만 이번 여행 중 개인용 스크린에서 내가 본 가장 감격적인 영상은, 비행기 전방과 하부에 설치된 카메라에 잡힌 창공과 저 아래 펼쳐진 지상의 풍경 이미지였다. 언제부터 시작된 서비스인지는 모르겠지만 폐소공포증 해소에 큰 보탬이 됐을뿐더러 무척 아름다웠다. 내가 죽기 전에 서울에서 열차를 타고 다른 대륙의 나라로 여행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린다면 어떤 액정도 스크린도 아닌 차창 밖만 바라보고 싶다. 그 풍경의 띠가 나만의 영화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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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큘러스>의 훌륭한 누나

마이클 플래너건 감독의 <오큘러스>는 흑마술을 부리는 거울을 모티브로 삼은 오컬트 호러지만, 어린아이들에게 마음의 균형을 잃어버린 부모와 그들의 불화가 얼마나 거대하고 근원적인 공포가 되는지 생생히 그리는 애절한 드라마이기도 하다. 현재와 과거 시제가 교차되는 이 영화에서 가장 애틋한 인물은, 주인공 남매 중 누나 케일리(아날리즈 바소)다. 이 빨간머리 말괄량이는 동생과 비비탄 싸움에 열중하고 무서운 걸 보면 도망치는 평범한 소녀지만 집안에 위기가 닥치자 가장으로 손색없는 용기를 발휘한다. 동생을 위해 목숨을 거는 희생을 불사하고 참담한 결과 앞에서도 가족의 불명예를 억울해하며 “나중에 커서 강해지면 꼭 우리가 바로잡자”고 다짐한다. 사랑과 논리로 무장한 그녀는 악마의 거울이 수세기 동안 대적한 최강의 적수였을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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