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버린 노래를 다시 부를 순 없’(<앵콜요청금지>)다고 했다. ‘가야 할 곳을 모르고 있’(<잔인한 사월>)다고도 했다. 밴드 브로콜리 너마저의 윤덕원이 써내려간 가사들에는 체념 섞인 막막함이 흐른다. 그런 그가 다가오는 8월 솔로로 자신의 첫번째 정규 앨범을 발매한다. 지난 6월9일 선공개한 타이틀곡 <흐린 길>에서도 그는 여전히 ‘이 흐린 길에 어디쯤에 있는지’ 알 수 없다고 고백한다. 어느새 지나쳐버린, 이미 사라져버린 날들과 그때의 어떤 마음을 곱씹게 만드는 그의 노랫말이 이번에는 또 어떤 후일담들로 채워졌을까. 올해로 밴드 활동 10년차이지만, 그는 자신을 “신인가수”라고 소개하며 음악하는 사람으로 사는 길에 대해 차분히 이야기한다. “오버하지 않는 음악”을 내놓고 싶다는 그가 부르는 노래를 미리 만나봤다.
-브로콜리 너마저가 아닌 솔로로 활동을 준비 중이다.
=브로콜리 너마저 멤버 중 한명이 결혼하고 현재 출산을 앞두고 있다. 그러다보니 지난해 말부터 밴드가 활동을 쉬게 됐고, 자연스럽게 솔로 음반을 준비하게 됐다. 음악 활동에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도 있다.
-그동안 해왔던 음악과 비교했을 때, 이번 앨범은 어떤 풍의 음악인가.
=<흐린 길> <갈림길> 모두 2011년에 작업해둔 곡이다. 조금 더 부드럽고 섬세한, 90년대 발라드 스타일로 편곡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왔다. 두곡 다 내가 좋아하는 더 클래식의 박용준 선배에게 편곡을 부탁했다. 정규 앨범 수록곡 모두 기본적으로 밴드 음악의 편성을 가지고 간다. 차이가 있다면 어떤 연주를 하느냐일 텐데. 밴드할 때는 외부의 도움 없이 뚱땅뚱땅 우리 안에서 끝내다보니 딱 그만큼만 나온 것 같다. 일단 우리 안에 있는 것만 써야 하니까. 어떻게 보면 제약이 있는, 제약을 일부러 가한 거다. 반면 솔로로 하다보니 필요한 연주자, 작업자를 찾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물론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겠지만.
-1990년대 한국 대중가요가 자신의 음악 작업에 큰 영향을 미친 건가.
=아무래도 그 시절에 청소년기를 보냈기 때문에 그때 들은 음악이 좋더라. 가사가 깨끗하게 들리고 마음을 움직이는 발라드성 곡들을 특히 좋아한다. 더 클래식도 그중 하나다. 초등학생 때 친구가 생일 선물로 더 클래식의 테이프를 줘서 듣게 됐다. 사실 그 친구는 레코드숍에 가서 “클래식 음반을 달라”고 한 건데, 그때 마침 더 클래식의 앨범이 나온 터라 주인장이 그걸 준거다. 그 테이프는 지금도 가지고 있고 엊그제도 들었다.
-우연일까. <흐린 길>과 <갈림길> 모두 길이라는 모티브에서 시작한 노래처럼 들린다.
=길을 염두에 둔 건 아니었다. 다만 두곡을 같은 시기에 쓰다 보니 조금씩 닮아간 게 있다. 또 이 곡들과 전체 음반이 전하려는 이야기가 감정적으로나 가사의 측면에서나 이어지게 작업했다. 이를테면 <흐린 길>에서는 힘든 상황에서도 누군가와 함께 간다는 것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그다음 곡에서는 어쩔 수 없이 헤어짐의 순간이 오고, 또 다음 곡에서는 헤어짐을 더욱 클로즈업했다. 그러다 결국 <갈림길>에서는 헤어지고 상대방에게 축복을 빌어준다. 이후에는 혼자 남아서 생각하고 마음이 얼어붙고 쓸쓸해지는 거다.
-브로콜리 너마저 때부터 직접 가사를 써왔다. 당신의 가사에는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자신이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에 대한 슬픔이 묻어 있다.
=체념과 좌절의 마음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사랑과 이별 얘기를 많이 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나는 교제에 관한 얘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사람 사이의 관계, 만나고 헤어지고, 살고 죽고 이런 것들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에 대한 좌절감이 막 쏟아져 나온다. 이번 음반은 그게 좀 심하다.
-그런 안타까움의 정서가 증폭된 이유라도 있나.
=체념하면서 우리가 어디까지 비겁해질 수 있는가를 생각해봤다. 사실 <흐린 길> <갈림길>은 착한 척을 하는 곡들이다. 다른 수록곡들에서는 착한 척의 뒷면을 보려고 했다. 힘들다고 해서 우리가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건가 싶은데, 그러다가 결국에는 치명적인 이별의 순간을 맞는다. 나는 (널) 잡고 있는데 내 손이 끊어져서 어쩔 수 없었어, 라고 말한다면 그것도 어떻게 보면 고통을 이기지 못한 내 의지가 아닌가. 내가 힘이 달리니까 놓은 거다. 그러고는 보낼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나는 다시 묻게 된다. ‘정말?’
-<흐린 길>의 뮤직비디오에서는 부동산에 들러 방을 구하는 청년으로 직접 등장하기도 한다.
=내가 아이디어를 냈다. 그 곡을 쓰면서 ‘아, 정말 사는 거 팍팍하구나, 힘이 들고 다 놓고 싶은데 놓을 수도 없구나’ 싶었다. 부동산에 방을 구하러 다닐 때 이런 생각이 절로 들지 않겠나 싶었고. 처음에는 아이를 데리고 방을 구하러 가는 컨셉이었는데 너무 신파 같다며 뮤직비디오 감독님이 말리시더라. 그래서 지금처럼 나 혼자 출연하는 걸로 갔다.
-앨범 수록곡 수가 애초에는 다섯곡이었다가 최종적으로 아홉곡이 됐다고 들었다.
=음반 작업을 하는데 정말 좋은 거다. 평소에 함께 작업해보고 싶었던 기타에 함춘호, 베이스에 민재현, 드럼에 신석철 선배가 함께해주셨다. 연주에 참여한 푸른 곰팡이 선배들 또한 엄청난 분들이라 녹음 현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신나고 재밌고 배울 게 많았다. 내가 고양돼서 그런지 곡을 더 쓰고 싶어졌다. 원래 녹음 도중에 곡을 쓰는 게 어려운 일인데. 마감의 위기도 있었지만 다행히 빠른 시간 안에 정리가 됐다.
-다른 환경에서 새로운 세션 멤버들과의 작업이 좋은 에너지를 불러일으켰나 보다.
=확실히 그런 것 같다. 새로움이 있었다. 예를 들면 예전에는 몇개 없는 것 중에 어떻게든 골라야 했기에 머리가 아팠지만, 지금은 참고자료가 부족하면 도서관에 갈 수 있게 된 상황 같달까.
-밴드 브로콜리 너마저가 결성된 지 어느덧 10년이다. 그런데 이번 앨범을 통해 자신을 “신인가수 윤덕원”이라고 소개했다.
=“뭐 하는 분이냐?” “인디밴드다” , 그러면 또 옆에서 누군가가 “인디밴드치고는 유명해”라고 말하는 일련의 과정을 겪어왔다. 인디밴드라는 말이 이것도, 저것도 설명하는 마법의 양탄자 같기도 하고, 때론 방패막이가 돼준 것도 있다. 이제는 인디밴드가 뭔지 모르는 분들에게도 내가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는 걸 얘기할 수 있길 바란다. 인디밴드, 아티스트라는 말 뒤에 숨기보다는 부딪혀보고 싶다. “네가 무슨 가수냐”라고 묻는 분도 계실 테지만 그런 말을 들을 각오를 했다. 그런 각오를 한번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인가수라는 말은 결국 내 마음의, 자세의 문제인 거다.
-신인가수답게 홍보가 남다르다. 2천명의 팬들에게 <흐린 길>의 음원을 들을 수 있는 인터넷 주소가 적힌 초대장을 직접 우편 발송했다.
=힘들었다. 엽서 제작에 해외 배송까지. 우표비만 100만원이 넘게 들었다. 근데 보람이 있었다. 많은 분들이 잘 받았다며 인증 사진도 트위터에 올려주시고. 예전에는 음반 매장에 직접 간다는 게 특별한 일이었지만 요즘은 음반을 내기도 쉬워졌고 음악 청취도 특별한 일이 아니게 됐잖나. 결국 내 음악을 좋아해주는 사람들을 내가 직접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음악을 어떤 식으로 전달할지도 고민해봐야 한다. 이번 이벤트도 그래서 기획한 거다.
-새 곡들로 팬들과 만난 첫 쇼케이스 현장은 어땠나.
=굉장히 긴장됐다. 8개월 만에 무대에 올랐다. 열분만 모시고 진행된 소규모 공연이라 더 긴장되더라. 노래도 처음 부르고 새로운 사람들과 호흡을 맞추려다 보니 식은땀도 나고. (웃음) 오죽하면 앞에 계신 관객이 긴장을 하시더라. 다행히 무대를 한번 끝내고 나니까 편해졌다.
-스튜디오 브로콜리를 직접 운영하며 자체적으로 앨범 제작을 해왔다. 다른 뮤지션의 음반 기획자로도 나설 생각인가.
=그럴 계획으로 지난해부터 컴필레이션 작업을 해보려고 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좌초됐다. 이번 앨범 작업이 끝나고 자리가 잡히면 꼭 내가 작곡한 곡이 아니더라도 재밌는 걸 더 많이 해볼 생각이다.
-솔로 윤덕원과 브로콜리 너마저 윤덕원의 올해 계획은 뭔가.
=음악적으로 아직 할 것도 배울 것도 많다는 것, 가사나 멜로디 면에서는 좀더 섬세하고 수준 있는 곡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 나를 이끄는 힘이다. 브로콜리 너마저로 활동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예전만큼 꾸준히 활동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일단 나는 올해 콘서트를 하기 위해서 현재 밴드를 구성 중이다.
-이번 앨범을 팬들이 어떻게 들어주길 바라나.
=흘러가듯 들어달라. 그러다 마음에 와닿는 부분이 있다면, 좋은 사람들과 같이 들으면서 서로 많이 달랬으면 좋겠다.
한 걸음 뒤에서 쓴 노랫말
윤덕원은 1집 음반 ≪흐린 길≫의 발매에 앞서서 <흐린 길> <갈림길> 두곡이 수록된 싱글로 먼저 팬들과 만났다. “사실은 미세먼지에 관한 곡”이라는 <흐린 길>을 포함해 총 9곡의 “어덜트 컨템퍼러리”가 촘촘히 들어 있다. 그중 <별이 빛나는 밤>은 영화 <U.F.O.>의 공귀현 감독의 신작 다큐멘터리에 삽입될 예정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불같이 뜨거운 감정도, 얼음같이 쨍한 감정도 아닌 한 걸음 뒤에서 관조하고 내뱉는 한마디” 같은 가사를 쓰게 된다는 윤덕원. 뜨거운 한여름에 찾아올 그의 선선한 노랫말을 미리 듣다보면, 어느새 여름날이 지척에 와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