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탁동시>(2011)의 광고전단에 소개된 말을 빌리자면 김경묵은 이른바 ‘문제적 감독’이다. 앞서 스무살에 만든 장편 데뷔작 <얼굴 없는 것들>(2005)은 한국의 <살로 소돔의 120일>이라 불릴 만큼 강도 높은 동성애 묘사로 일부 관객에게 강력한 반발을 샀다. 세 번째 장편 <줄탁동시>는 해외에선 호평이었지만 국내에선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고 관객을 만나지 못할 뻔했다. 그런 김경묵 감독이 이제까지와 전혀 다른 색깔의 영화를 들고 나왔을 때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경묵 감독의 네 번째 장편영화 <이것이 우리의 끝이다>는 전에 없이 밝고 화사한 톤으로 관객에게 새롭게 말을 건다. 여전히 김경묵 감독 특유의 문제의식과 질문과 어두운 정서를 깔고 있지만 확실히, 변했다. 극적인 변화를 맞이한 김경묵 감독에게 <이것이 우리의 끝이다>가 무엇에 대해 ‘끝’을 고하는 영화인지 물었다. 이것은 오늘의 끝과 새로운 내일에 관한 이야기다.
-벌써 네 번째 장편영화다. 전작들과 상당히 달라진 분위기가 눈에 띈다. 대중에게 다가가려는 화법이랄까.
=전체적인 톤을 결정할 때 고민을 많이 했다. 처음에는 편의점 노동자들에 관한 우울한 이야기였다. 노동의 지루함이라 부를 만한, 그런 내용을 다루려고 했던 것인데 시나리오를 다듬는 과정에서 좀더 밝은 느낌으로 표현하고 싶어 방향을 바뀌었다. 일부러 다른 느낌의 작업을 해보고 싶었던 것도 있다.
-소재만 놓고 보면 여전히 우울한 면이 있다.
=처음 기획할 때는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무거운 이야기였다. <줄탁동시>를 마치고 나서 성매매 여성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었는데 성매매 여성이 처한 상황을 계속 접하다보니 마음이 무거웠다. 개인적으론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많이 힘들었다. 주변에서 내 영화를 본 사람들로부터 어렵다, 힘들다는 이야기를 계속 듣다보니 나는 그런 사람인가? 반문하게 되더라. 스스로 어두운 감정을 가지고 살풀이하듯 영화를 찍다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전체적으로 가라앉아 있던 시기여서 좀 다르게 찍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성매매 여성 관련 다큐멘터리를 잠깐 멈추고 <이것이 우리의 끝이다>의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코믹한 요소를 담아 블랙코미디 톤으로 바꿔보자고 결심한 게 그즈음이다.
-시나리오에는 개인적인 체험이 많이 녹아들어갔나.
=물론이다. 편의점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20대에 관한 이야기라는 2가지 컨셉으로 방향을 잡았다. 편의점은 흥미로운 공간이다. 일상에 필요한 모든 것을 편의점에서 다 해결할 수 있다. 물건을 사는 것 뿐만 아니라 현금인출도 하고 세금도 내고 택배도 보낸다. 그런데 그곳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과는 매일 마주치면서도 1년 넘도록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본 적이 없더라. 그게 신기했다. 말하자면 편의점은 이방인의 공간이다. 동네 구멍가게와는 전혀 다른 정서가 있다. 그게 한국 사회의 단면을 닮아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론 20대에 관한 이야기를 찍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이번 영화를 시작한 게 내가 스물여덟 무렵이었는데 20대가 가기 전에 나름의 기념이랄까, 20대에 관한 영화를 한번 찍어보자 싶었다.
-편의점을 둘러싼 에피소드들을 엮다보니 어찌 보면 편의점이란 공간이 주인공인 영화처럼 느껴진다.
=공간에서 출발한 이야기다. 공간이 중요한 상징이 된다는 점에서 보면 전작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전 영화에서도 인물을 구상할 때 공간에 의미를 두고 의인화한 적이 많았다. 공간성 안에서 인물을 건져올린다고 하면 적당할까. <청계천의 개> 때는 일부러 인공적인 것에 대해 많이 언급했고 <줄탁동시> 때도 양쪽의 공간이 대비되는 형식으로 뼈대를 세웠다. <이것이 우리의 끝이다>에서는 자본에 의해 움직이는 공간을 어떻게 표현할지에 대해 고민이 많았던 것 같다. 혼자 시나리오를 쓸 때는 공간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컨셉이었다. 그런데 막상 쓰기 시작하니 인물과 사건 중심으로 가더라. 고민을 많이 했다. 내가 이렇게 서사가 중심에 있는 영화를 잘할 수 있을까, 혹은 코미디를 잘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들. 하지만 애초에 해보지 않은 것을 해보자고 목표했기 때문에 자신이 없어도 한번 해보자 싶었다.
-코미디가 처음이라 쉽지 않았을 텐데 참고한 작품들이 있나.
=최초엔 <파산의 기술> 같은 다큐멘터리의 톤을 염두에 뒀다. 노동의 고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공간을 묘사하고 싶었다. 참고하기보다는 염두에 뒀다고 하는 편이 적절할 것 같다. 영화에 장르적인 색깔을 더하기로 마음먹은 이후로는 코언 형제의 블랙코미디를 상상하며 작업했다. 막판에 시나리오를 수정하면서 결국 상황극에 가까운 이야기가 되어 나중에는 다 의미가 없어졌지만. (웃음)
-에피소드별로 다른 장르를 차용한다. 동일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다른 사건을 두고 영화 여러 편을 찍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맞다. 에피소드마다 장르를 다르게 가려고 했다. 전체적으로는 일정한 톤을 유지하지만 각각의 장르로 이런저런 표현을 더하고 싶었다. 가령 첫 번째 에피소드가 샤방한 로맨틱 코미디라면 오디션 지망생이 나오는 두 번째는 시트콤스러운 방식으로 접근했다. 탈북자 아르바이트생이 나온 세 번째 에피소드는 굳이 분류하자면 사회 드라마에 가깝고 네 번째는 미스터리다. 근데 이 미스터리가 참 어렵더라. 조명도 많이 쳐야 하는데 장비를 마음대로 쓸 수 없어 한계가 많았다. 아무리 해도 조잡해지기에 아예 B급 공포의 느낌으로 갔는데 그게 나쁘지 않았다. 현장 상황에 대해서도 많이 배운 것 같다.
-음악 사용이 과감하다. 장르적인 차이를 음악을 통해 전하려 한 건가.
=그런 것도 있다. 가령 편의점 바깥에 벽을 설치해서 인공적인 느낌을 주면서 상황에 따라 계속 다른 공간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예산의 한계가 있었다. 할 수 있는 선에서 장르적인 색을 분명히 해주고 싶어 음악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에피소드별로 촬영 컨셉도 달랐는데 가령 어떤 부분은 핸드헬드로 찍고 어떤 장면은 원신 원컷으로 촬영했다. 그래도 해결이 안 되는 부분은 결국 후반작업에서 음악을 과감히 사용해 구멍을 메운 측면도 있다.
-분위기도 바꾸고 여러모로 밝고 화사한 톤으로 작업했는데 이번에도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았다.
=사실 15세 관람가를 생각하고 심의를 넣었는데 청소년 관람불가가 나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나도 배급사도 심의 결정에 심정적으로는 동의하지는 않는다. 불복하고 재심을 청구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간 진행해온 일정이 있어 그대로 가기로 했다.
-등급 심사의 사유가 무엇이었나? 특정 장면의 문제인가.
=가장 많이 언급된 것은 욕설과 비속어 사용이었다. 특정 장면을 문제 삼진 않았다. 예전에 <씨네21>의 제한상영가 특집 인터뷰에서 이상우 감독님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바비>가 청소년 관람불가가 나온 걸 보고 자기가 소위 ‘찍혀서’ 그런 게 아닌가 싶었다고. 심정적으로 힘들어서 저런 생각까지 하나보다 했는데 막상 내가 이런 판정을 받고 나니 문득 그때 그 말이 떠오르더라. 근거가 납득이 안되니 진짜 이유는 뭘까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물론 다 개인적인 추측에 불과하지만.
-이번 영화는 어깨에 힘을 빼고 만들었다고 할 수도 있는데 작업 과정은 이전과 어떻게 달랐나.
=출발은 그랬지만 과정은 오히려 반대다. 기본적으로 내 안에 있는 정서가 아니기 때문에 접근할 때 고민이 많았다. 잘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이게 맞나 싶기도 하고. 물론 현장 분위기는 즐거웠고 시나리오 쓸 때도 재미있었다. 전작들은 시나리오 쓸 때 마음이 무겁고 가라앉았기 때문에. 글을 쓸 땐 어느 정도 전염되는 게 있다. 이번에는 즐겁게 썼지만 쉽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그래도 이런 작업을 해본 적이 없었기에 일단 해보고 싶은 마음이 제일 컸다. 내 안에 가렵고 궁금한 부분이 생기면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 이번 영화도 그런 질문에 대한 스스로의 답이다. 아, 나는 이제 이런 장르의 영화는 굳이 안 해도 되겠구나 싶은 깨달음? (웃음)
-새로운 방식에 대한 갈망이 있는 것 같다. 비디오 아트에 가까웠던 초기 영화들에서 이제는 장르영화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다.
=시작은 언제나 내 안의 질문에서 비롯된다. 다음 작업을 구상할 땐 기존 작업들의 한계를 느끼면서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을지, 내게 있어 ‘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내가 느끼는 것을 영화를 통해서 얼마나 표현할 수 있는지를 먼저 고민한다. 그간 내가 하는 작업이 극영화인지 다큐멘터리인지 실험영화인지 신경 쓰지 않았기에 초기에 <나와 인형놀이> <얼굴 없는 것들> 같은 작업들을 할 수 있었다. 그 작품들은 내가 세상에 대해 느끼고 감각하는 것에 좀더 가까운 표현방식이다. 이후 영화를 본 사람들의 ‘이것이 영화인가?’, ‘아마추어적이다’ 등의 반응을 보며 그제야 ‘사람들이 생각하는 영화는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아마 그러한 생각들이 다음 작업을 할 때 영향을 주었던 것 같고. 이전보다 스토리를 갖추면서 장르적인 코드가 있는 작품을 시도한 것도 그런 영향이 없지 않다.
-‘나를 위한 영화’를 우선하던 내적인 기준에서 이제 관객의 시선도 염두에 두는 영역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고 봐도 되나.
=비슷한데 조금 다르다. 작업을 하고 나면 매번 ‘그러니까 이게 내가 원한 영화였었나’ 하는 괴로움이 뒤따른다. 사람들에게 영화에 대한 평가를 받는 건 그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불편하기는 매한가지인데, 돌이켜보면 그것으로부터 내가 영향받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다르게 말하면 영화에 대한 반응과 나 자신과의 관계를 잘 맺지 못했다. <이것이 우리의 끝이다>는 이전 작품들이 ‘어둡고, 이해하기 힘들다’는 사람들의 말에 대한 나 나름의 답이다. 다른 방식으로 작업하며 자괴감도 많이 들었지만, 결과적으로 후회할 일이더라도 피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잘하는 것과 재밌는 것을 확인하고 자신감 있게 움직일 수 있는 영역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다. 직접 만들어보지 않았다면 모른 채 지나갈 것들, 비록 그 결과물을 보고 난 뒤엔 고통이 함께 올지라도 배움만은 좋았다.
-이전보다 한층 여유가 생긴 것 같다. 자신감도 느껴진다.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에 접근해오며 이제야 깨달은 부분이 있다면, 영화는 창작자 자신을 위해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의 규정과 관념에 얽매일 필요가 전혀 없다. 내가 만드는 것이 영화적인지 아닌지 고민할 필요도 없다. 그건 이후에 사람들이 이름 짓는 방식일 뿐이다. 어찌 보면 영화를 처음 만들 때와 같은 지점으로 오게 된 것 같다. 다만 10년 전과 다른 점은 그때는 경험이 없었기에 확신이 없었고, 지금은 내 원칙에 대한 나름의 자신감을 조금은 얻게 됐단 거다. 앞으로도 자신의 감각을 믿을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이전까지 이런저런 헛발질을 많이 해봤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어’식의 과감함이 아니라, 내가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찾아나가는 과감함. 어찌됐건 이걸 버려도 좋을지에 대한 확인은 필요하다. 매 작업 이런 감정으로 시작한다. 막상 다 찍고 편집할 때쯤이면 호기심이 다 풀려 이미 마음에서 멀어져 있지만. (웃음)
-이번 영화도 앞으로의 작업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될까.
=매번, 모든 작품이 다음 영화의 가이드라인이다. 끝날 때 즈음엔 항상 이것이 나의 끝이 되지 않도록 반성한다. (웃음) <이것이 우리의 끝이다>란 제목이 참 좋다. 원래 쾅프로그램이란 인디밴드의 <이것이 우리의 끝>이라는 노래 제목인데 느낌이 좋아서 허락을 구해 시나리오 초기 단계부터 썼다.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 말들을 좋아한다. 영화에서도 ‘이것이 우리의 끝이고, 새로운 시작이다’라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개인적으로도 해보고 싶은 걸 하면서 20대를 정리하는 기분이다.
-차기작은 무엇인가.
=일단 <이것이 우리의 끝이다> 때문에 멈춰뒀던 다큐멘터리를 지금 한창 마무리 중이다. 본격적인 다큐멘터리는 이번이 처음인데 올해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내기로 해서 정신없이 작업 중이다. 영등포 집창촌의 재개발 문제에 대한 이야기로 가제는 <영등포 천일야화>다. 2011년에 촬영을 시작했으니 이제는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제대로 마무리짓고 그다음은 찬찬히 생각해 보려 한다. 그러다보면 궁금한 게 또 생기겠지. 늘 그래왔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