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공 멜라니 로랑은 영화가 시작된 지 45분이 지나고서야 등장한다. 그녀가 몇 마디 대사를 던진 뒤에도 영화는 한동안 멜라니 로랑을 비추지 않는다. 누군가의 기억의 일부로 존재하는 멜라니 로랑이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등장하는 장면은 출연분을 전부 합쳐도 단 몇분뿐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스크린에 등장한 이후부터 관객의 모든 관심과 호기심은 순식간에 멜라니 로랑에게로 쏠린다. 제레미 아이언스, 마르티나 게덱 등의 걸출한 선배들마저 순식간에 잊어버리게 만드는 멜라니 로랑의 매혹의 비결은 뭘까.
멜라니 로랑은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살라자르 독재정권에 맞서는 레지스탕스 여인, 스테파니아를 연기한다. 순간기억능력으로 레지스탕스에 큰 도움을 주는 동지 스테파니아는 함께 투쟁하는 연인 조지(오거스트 딜)를 “미치게 만드는” 매력적인 ‘여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스테파니아는 조지의 친구이자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난 아마데우(잭 휴스턴)에게 끌리고 비밀경찰을 피해 그와 함께 도피길에 오른다. 판사의 아들이라 가계를 걱정할 일도 없고, 똑똑하고 매너까지 좋은 아마데우와 행복한 삶을 꾸리면 되련만 스테파니아는 사랑을 고백하며 자신과 떠나자고 권유하는 아마데우를 기어이 뿌리치고야 만다. 앞으로 모든 것을 함께 나누자며 애정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아마데우에게 스테파니아는 잘라 말한다. “그럼 난 무얼 할 수 있지? 그건 네가 원하는 것들이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야.” 감독이 멜라니 로랑에게 스테파니아를 연기하게 한 건 어쩌면 이 대사를 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옳다고 믿는 것을 향해 똑바로 전진하는 강단 있는 캐릭터. 그것이야말로 멜라니 로랑이 가장 잘하는, 그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연기이기 때문이다.
특기대로 멜라니 로랑은 단단하고 심지 굳은 캐릭터들을 줄곧 연기해왔다. 가스파르 울리엘과 훌륭한 화학작용을 보여준 <마지막 날>(2004)의 루이스는 관객의 눈에 이상하게 보일 정도로 대담하고 자신의 의지에 충실한 소녀였다. <잘 있으니까 걱정 말아요>(2006)의 릴리는 가족을 잃고 충격을 받아 죽음 직전까지 갔지만 결국 모든 것을 견디고 다시 삶을 찾는다. 불안에 떨고 혼란스러워하며 죽음에 가까워져 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잘 있으니까 걱정 말아요>는 제31회 세자르영화제에서 멜라니 로랑에게 신인여우상을 안겼고, 많은 영화인들이 그녀를 주목하도록 만들었다. <멜로디의 미소>(2007)에서도 트라우마를 딛고 유괴사건의 범인을 집요하게 추격하는 열정적인 형사 루시를 연기했다.
멜라니 로랑의 “두 스승” 중 한명인 쿠엔틴 타란티노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2009)의 유대인 쇼산나는 나치로부터 도망쳐 은신하다가 신분세탁을 한 뒤 나치 영웅의 마음을 사로잡아 통쾌한 복수극을 펼친다(다른 한명의 스승은 뮤지션 데미안 라이스다). 실제로 멜라니 로랑은 유대계 프랑스인이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나치의 횡포를 피해 살아남은 유대인이었다. 멜라니 로랑은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선 프랑스인으로 신분을 위장한 유대인을 연기해 자신의 두 가지 정체성을 제대로 써먹었고, 또 다른 방식으로 홀로코스트를 다루는 <라운드 업>(2013)에서는 유대인 수용소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헌신적인 간호사를 연기했다. 멜라니 로랑은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과 프랑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캐릭터에 활용할 줄도 알았던 것이다. 쇼산나가 히틀러, 괴벨스, 괴링, 보르만까지 네명의 나치 수뇌부를 상영관에 몰아넣고 폭탄을 터뜨려 한꺼번에 날려버리는 장면은 지금껏 보아온 어떤 복수보다도 화끈하고 의미심장하다. “대본을 촬영 들어가기 넉달 전에 받았어요. 엔딩에 관해서 대본에는 그저 ‘그녀가 5분간 악마처럼 웃는다’라고만 돼 있었죠. 알다시피 난 프랑스인이에요. … 프랑스인은 무척 게으르거든요! 이걸 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넉달 동안 생각했는데 촬영이 바로 내일로 다가와버린 게 아니겠어요? 걱정하는 나에게 타란티노는 ‘걱정 마요. 당신은 틀림없이 나한테 악마 같은 웃음을 보여줄 테니까’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촬영이 시작됐고, 난 정말로 ‘무언가’를 해냈죠.” 폭탄이 뻥뻥 터지고,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 불바다가 된 상영관에서 스크린에 클로즈업된 채 미친 듯이 웃어대는 쇼산나의 얼굴은 괴상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그 얼굴은 그녀의 필모그래피에도 의미 있는 한획을 그었다.
하지만 멜라니 로랑의 캐릭터들은 단단하면서도 억세 보이지 않고, 여성스럽다. 멜라니 로랑이 캐릭터를 통해 비전을 명확하게 펼쳐 보이면서도 자신이 가진 최대 무기를 적절히 이용할 줄 아는 영리한 배우인 덕이다. 무기란 그녀의 미모다. 크고 또렷한 눈을 치켜뜨고 있으면 영민함이 돋보였고, 웃을 땐 눈꼬리가 처지면서 사랑스러운 미소가 만들어졌다. 157cm밖에 되지 않는 작은 키와 마른 체구는 여성성과 연약함을 강조한다. ‘나쁜 여자’가 아닌, <사랑을 부르는, 파리>(2008), <에브리 잭 해즈 어 질>(2009), <비기너스>(2010) 등 평범한 로맨스영화의 주인공이 되었을 때에도 그녀는 맞춤옷을 입은 듯 자연스러울 수 있었다. 그러니 연인을 배신하고 그의 친구와 사랑의 도피를 했음에도 관객은 그녀를 긍정할 수밖에 없고(<리스본행 야간열차>), 자신을 향한 남자의 순정을 이용해 복수극을 짜는 모습까지도 매력적으로 보였을 터다(<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도전적인 예술가로서의 모습도 빼놓을 수 없다. 그녀는 열여섯살에 우연히 친구 아버지의 일터였던 <아스테릭스>(1999) 촬영장에 놀러갔다가 제라르 드파르디외를 만나며 영화계에 들어왔다. 그녀를 눈여겨본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자신의 영화에 출연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 것이다. “안 될 게 뭐 있어요?” 정확히 일주일 뒤 멜라니 로랑은 제라르 드파르디외의 연출작 <연못 위의 다리>에 작은 역할로 캐스팅됐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영화감독이 되길 원했던” 멜라니 로랑의 진짜 꿈은 “장편영화 연출”이었다. 시험삼아 연출한 첫 번째 단편 <점점 더 적게>(2008)가 제61회 칸영화제 단편경쟁부문에 진출하면서 그녀는 감독으로서의 재능도 인정받았다. 연출과 각본, 주연을 맡은 장편영화 연출 데뷔작 <마린>(2011)도 두루 호평을 받았다. “나는 항상 연출을 꿈꿔왔다. 어릴 때부터 연기를 해왔지만 그때부터 예술적 결핍을 느꼈고 연출가로 있을 때 가장 큰 예술적 충족감을 느낀다. (…) 내가 배우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캐릭터를 연결시키고 독려할 수 있다는 것과 실질적인 연기지도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씨네21> 883호) 2011년에는 “두 번째 스승”인 데미안 라이스와 함께 작곡, 연주한 앨범 ≪널 기다리며≫(En t’attendant)도 발표했다.
멜라니 로랑이 뒤집어놓은 건 할리우드와 유럽 영화계뿐만이 아니다. 제7대 유엔 사무총장 코피 아난이 이끈 세계 인도주의 포럼 행사장, 인도네시아의 댐 건설 현장, 어류 불법 남획을 저지하려는 블루마린재단의 싸움터 등 다큐멘터리에 등장할 만한 현장까지도 종횡무진한다. 그녀는 여배우들이 이미지 관리차 참여하는 의례적인 봉사활동과는 차원이 다른 진짜 싸움터에 서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예상하지 못한 행보에 당황스러워할 이들에게도 멜라니 로랑은 언제든 주저 없이 말할 것 같다. “그건 네가 원하는 것들이지. 나를 위한 것이 아니거든.”
magic hour
그녀의 열정을 지지한다
멜라니 로랑의 활약은 그뿐만이 아니다. 2010년엔 인도네시아의 열대우림과 이탄지대 개발에 반대하며 그린피스 활동가들과 함께 기후방어캠프를 방문해 방수댐 건설을 도왔다. 2012년 교토 의정서 종료를 앞두고는 각국 정부에 온실가스 감축 합의를 재촉하기 위한 ‘째깍 째깍 째깍(tck tck tck) 캠페인’에도 참여했다(째깍 째깍 째깍(tck tck tck) 캠페인은 네티즌이 캠페인 송 <Beds Are Burning>을 다운로드할 때마다 유엔 코펜하겐 기후변화정상회의에 참석하는 정상들이 긍정적인 결론을 내릴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의 수가 추가되는 캠페인이다). 멜라니 로랑은 이 자리에서 “코피 아난 사무총장의 의견을 지지한다”라며 “이번 캠페인을 통해 우리는 지구와 우리의 다음 세대에 더 나은 미래를 선물하게 될 거다. 우린 모두 그때를 준비해야 할 것”이라고 공식 발언하기도 했다. 이 매력적인 싸움꾼을 어찌하면 좋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