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엔 정말 돈이 없어 밥을 굶기도 했다(하지만 한병에 천원짜리 소주의 힘으로 살은 빠지지 않았다. 배만 보면 사장님, 근데 지금도 배만 보면 사장님). 과외를 하면 좋았겠지만 성격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어 힘든 일이었고(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들을 싫어했다. 이 구역의 버르장머리 없는 건 나 하나로도 넘친다, 였달까), 그래도 밥은 먹어야겠기에 숱한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그리고 숨겨진 재능을 발견했다. 나는 재고라면 뭐든 팔아치우는 인간이었다.
돌이켜보면 사기의 나날이었다. 옷집에선 그저 평범한 티셔츠 하나 사고 싶었을 뿐인 남자 고시생에게 창고 바닥에서 건진 연분홍 티셔츠를 입혔고, 술집에선 비싼 만큼 빨리 취한다며 가난한 대학원생들에게 생맥주가 아닌 병맥주를 먹였다. 그렇게 몇달 만에 처음으로 맥주 냉장고가 텅 비던 날, 사장은 나에게 무제한 생맥주와 오징어를 허했다. 나는 신이 났다. 이 험한 정글에서 비료도 없이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은 잡초가 된 것 같았다(그런데 잡초가 되었다고 뭐가 그리 신이 났을까. 다음 세상에선 온실 속의 화초로 태어나리라).
나는 내친 김에 학생회 재고 물품도 팔아치워 학교 앞에 깔린 학생회 외상을 정리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삭풍이 부는 중부 산간 지대 대학 광장에서 좌판을 깔고 외쳤으니… 당시 한창 욕먹고 있던 한총련의 멸망을 예언했던 것이었다. “내년엔 없습니다, 지금 아니면 영영 못 사! 한총련 배지 사세요! 티셔츠도 있어요! 추억의 한총련 기념품이 왔어요, 요, 요, 요!” 지나가던 88학번 선배의 까만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학생운동의 성지 한복판에서 한총련의 종말을 외치는 패륜아가 나의 과 후배다! 게다가 그 뒤로도 오랫동안 한총련은 망하지 않았으니… 나한테 속아 한총련 배지와 티셔츠 패키지를 (말만 패키지고 할인은 안 된 가격으로) 샀던, 학우여, 미안하다!
그처럼 우량 점원이었던 내가 단 한번의 실패를 기록한 업종이 있었다. 책방이었다. 내 손에 한번 닿았다 하면 주술 풀린 미라처럼 쪼글쪼글해지는 포장지와 비닐로 책 표지를 싸면서 나는 무료했다. 이럴 게 아니라 미치도록 잡고 싶었다, 손님을. 쓸모없는 물건을 팔고 싶었다, 제값으로. 하지만 책방에선 그럴 수가 없었다. 호객이 불가능한 지성의 전당, 나한테는 슬픈 침묵의 공간. 난 컬러에 하드커버인(그리고 비싼) 데다 내용 또한 유익하기 짝이 없는 <섹스북>을 참으로 팔고 싶었으나 학우들은 조용히 앉아 알튀세르나 지젝을 읽곤 했다. 알튀세르, 지젝, 당신은 누구시길래.
그리고 십몇년이 흘러 <음란서생>을 보며 나는 깨우쳤다. 판매의 길이란 멀고도 험하구나, 내가 부족했다. 그 영화에서 음란서적의 기획과 제작 및 유통과 대여를 책임지는 황가(오달수)는 사투리가 심하고 말을 더듬는다. 1분에 800타 수준으로 상품 설명을 쏟아내는 나에 비하면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다. 저래도 팔린다는 거지? 인생, 그렇게 쉬운 거였나? 하지만 그에겐 그 어떤 감언이설보다도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 은근한 눈길과 손짓, 내놓을 듯 감출 듯 감질나게 유혹하는 황가의 존재 그 자체.
20세기 미국을 풍미한 책 도둑들을 다루는 논픽션 소설 <북로우의 도둑들>을 보면 희귀본 장물아비들 또한 바로 그 기술을 구사한다. “당장은 여기 없거든요.” 근데 있다, 바로 등 뒤 금고에. 중요한 것은 그 책이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없기에 내가 가지러 가야 하고, 그렇게 왕복하는 사이 다른 서적상들이 난입할지도 모르며, 그러니 당신은 눈 뜨고 에드거 앨런 포나 허먼 멜빌이 사인한 초판본을 빼앗기고 말 거라고 암시하는 것이다. 절대 노골적이지 않도록, 은근슬쩍, 감질나게. 그러면 값이 오르고 도둑은 안전해진다. 그 누가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 했던가. 하지만 그러다 물욕에 눈이 멀어 책을 잘못 건드리면 큰일이 난다. <잉크하트: 어둠의 부활> <네버 엔딩 스토리>는 모두 오래된 책을 건드렸다가 새 세계로 빠져든 미아들이 나오는 판타지영화이다. 특히 <네버 엔딩 스토리>의 책방 주인 할아버지 덕분에 억울한 꼬마는 판타지 세계를 구하는 중노동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보다 큰일이 뭔지 아는가, 헌 세계마저 끝장이 나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 조선시대에는 ‘책쾌’라는 직업이 있었으니, <나인스 게이트>에 나오는 것과 같은 희귀본 거래상이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나인스 게이트>의 조니 뎁은 악마의 서적을 거래했고, 영조시대 책쾌들은 조선왕조를 부정하는 명나라 역사책을 거래했다는 사실이다. ‘책쾌’ 100여명을 처형당하게 만든 <명기집략>은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이며 여러 임금을 시해했다 기록했다고 하였으나… 국사학과만 나왔지 드라마 <정도전>(박영규가 이인임이라고)을 보지 않은 나로서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악마의 책이든 날조된 역사책이든 금서의 거래는 피를 부른다.
책을 사고파는 것은 또한 연애와 비슷하다. 책이 어떻게 변하니? 책은 안 변해도 값은 변한다. <북로우의 도둑들> 주석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멋진 책들을 잠깐 갖고 있다가 기꺼이 넘겨줄 수 있는 능력은 이런 사업에서 꼭 필요한데, 이는 성공한 모든 서적상들의 공통된 자질이기도 하다. 실로 이 자질의 유무에 따라 수집가와 서적상이 갈린다.’ 잡을 때는 악착같지만 보낼 때는 미련 없이. 차마 바로 보낼 수는 없으니 14일이라도 음미하다가 보내지만 매달리진 않는다, 그대와 행복하고 싶었으나 다만 침묵할 뿐, 이제 마음껏 칼럼 쓰고 간증하세요. 아니, 내가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책방에서도 할 수 있다, 조용하게 호객하는 두세 가지 방법
꿩 대신 닭 영화 <84번가의 연인>에는 84번가는 나와도 연인은 나오지 않는데, 이 84번가에서 책을 파는 점원이 제대로다. 바다 건너 미국에서 꿩을 찾아달라고 요구한 고객에게 그는 편지를 쓴다, 꿩 대신 닭이 있는데…(진짜 꿩을 달라고 한 건 물론 아니다). 이렇게 고정 고객을 확보한 그는 심지어 책을 팔아 고기를 얻는다. 식량이 배급제였던 전후 런던으로 미국인 고객이 보낸 선물, 고기, 고기, 고기가 배달된 것이다. 비록 통조림이지만 그날 저녁 서점 직원들의 집에선 일제히 탄성이 터진다. “고기다!”
꽃미남 직원 영화도 그렇지만 책도 여자가 많이 산다. 한번은 어느 외국 에세이 독자의 50%가 남성이라는 기현상이 벌어져 회사에선 블루오션을 발견했다며 긴급 분석 회의가 열릴 정도였다. 그러니 서점에 남자보다 여자가 많을 거라는 건 당연하고도 논리적인 추론이며, 미남 직원을 채용하면 좋을 거라는 것도 당연하고 논리적인 추론이다. <천국의 책방>의 책방 아저씨가 채용한 아르바이트 직원을 보라. 일본 배우 다마야마 데쓰지, 그를 보면 책을 한달에 100권은 읽고 싶다. ‘꽃미남 이사’라고 홍보했지만 그냥 ‘총각 이사’로 밝혀졌던 이삿짐 업체는 각성하라.
죽치는 손님 헌책방 주인 A씨는 녹차와 바움쿠헨을 좋아하는 마음 여린 30대 남성으로 하얀 피부와 고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여자 단골이 많겠어요.” “… 동네 할아버지들이 자꾸 와서… 호통치고 잔소리하고… 집에도 안 가시고요….” 그의 고운 목소리가 젖어들었다. 하지만 책방에 사람이 아예 없는 것보단 책만 보고 가더라도 한두명 상주하는 편이 낫다고 한다. 안 그러면 영업 안 하는 줄 안다고. <해피엔드>의 최민식처럼 매상에 도움 안 되는 손님도 반갑다는, 자영업의 지옥에서 전해온 소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