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마크 러팔로] <땡스 포 쉐어링>
2014-07-15
글 : 정지혜 (객원기자)
마크 러팔로
<나우 유 씨 미 : 마술사기단>

<땡스 포 쉐어링>은 팬티 바람에 무릎까지 꿇고 기도하는 마크 러팔로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건실한 중년남인가’라는 생각이 들려는데 가만, 어딘가 석연치 않다. “오늘로 5년째. 한때는 5일도 못 참던 나였다”로 이어지는 그의 고백 때문이다. ‘아니, 대체 뭘 참았다는 건가, 아니 그렇게까지 참을 건 또 뭐람.’ 이런 생각을 읽기라도 했다는 듯 그는 뜸들이지 않고 곧장 말한다. “나는 섹스중독자죠.”

섹스중독. <땡스 포 쉐어링>에서 마크 러팔로가 연기하는 아담의 병명이다. 그는 지금 섹스 때문에 하루아침에 인생을 날려버릴지도 모르는 자신과 같은 섹스중독자들과 함께 상담 치료를 받고 있다. 각자가 그동안 어떤 식으로 통제 불가능한 성욕을 참아왔는지, 또 어떻게 해야 그걸 계속 참아낼 수 있는지 말하고 들으며 인내의 방법을 공유한다. 그들 사이에서 아담은 참는 데 도가 튼 모범생으로 통한다. 이럴 때 보면 마크 러팔로의 지극히도 평범한 외모가 한몫 단단히 하는 것 같다. 누구나 인정할 정도의 미남자는 아니지만 편안하고 안정돼 보이는 그의 인상 말이다. 그런 얼굴을 한 사람이 섹스중독자라고 하니 되레 ‘그래?’ 하며 다시 한번 보게 되는 효과가 분명히 있다. 동시에 이런 인상의 소유자라면 섹스중독자들 중에서도 ‘바른생활맨’으로 거듭날 만하지 싶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섹스를 여전히 사랑보다는 죄의식으로 느끼는 아담이 사랑하는 피비(기네스 팰트로) 앞에서 갈팡질팡할 때도 마크 러팔로의 매력이 발동한다. 기세등등하기보다는 어딘가 주눅들어 있는 분위기로 사랑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남자를 보여준다.

특기에 가까운 그의 이런 외모와 분위기는 전작들에서도 계속 활용돼왔다. <눈먼자들의 도시>(2008)에서 눈이 머는 전염병에 걸린 안과 의사일 때도 그는 혼란스러운 수용소에서 나름 이성적인 해법을 제시하지만 광폭한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의 만행 앞에서 곧 후퇴해버린다. <셔터 아일랜드>(2010)에서 주인공인 연방보안관 테디(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동료인 척 아울을 연기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테디의 뒤에서 그를 돕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수사에 방관자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의 이런 연기는 감정을 쏟아내는 게 아니라 꾹꾹 눌러가며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는 편에 가깝다. 그래서 당장 눈에 띄는 캐릭터는 아니지만 지나고 보면 자신만의 그림을 그려내는 스타일이다. 소란스럽지 않게, 신중하게 작품 안에 자신을 새겨넣을 줄 아는 배우다.

사실 연기자가 평범하고 편안한 인상을 가졌다는 건 득이 되기보다는 독이 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건 마크 러팔로 자신이었다. 데뷔하기까지 수천번의 오디션에서 “안 된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오죽하랴. LA에서는 “네 얼굴은 LA 필이 아니다”라고 하고 뉴욕에서는 “뉴욕 필이 아니다”라는 말을 들어왔다. 하지만 의지의 러팔로는 2%로 부족한 외모에도 연기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스텔라 애들러 아카데미에서 연기 공부를 마치고 친구와 함께 작은 극단을 만들어 10년 가까이 30여편의 연극을 무대에 올리는 에너지를 보여줬다. 직접 각본을 쓰고 무대를 만들고 연기와 연출까지 병행하며 자체적인 연기 단련에 힘을 쏟은 것이다. 9년 가까이 바텐더 생활을 하고 도어맨, 페인트공, 나무 심기 아르바이트까지 해가며 수백번 오디션장 문을 두드려댔다. 그의 지극정성이 마침내 하늘에 가닿은 걸까. 그는 <갱스 오브 뉴욕>(2002)의 시나리오작가인 케네스 로너건의 연극 <이것이 우리의 청춘>(1998)에 캐스팅되는 행운을 맞았다. 모든 게 허무한 열아홉 청춘을 연기한 그는 이 작품으로 뉴욕 비평가들에게 “젊은 말론 브랜도”라는 말을 들으며 주목받았다. 그의 연기 인생에도 길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알고 보면 마크 러팔로는 마성의 남자인지도 모른다. 한번 그와 작업한 사람은 그를 꼭 다시 찾는다. 케네스 로너건은 자신의 감독 데뷔작 <유 캔 카운트 온 미>(2000)의 남자주인공 자리에 영화 경험이 거의 전무하다시피한 마크 러팔로를 앉혔다. 그는 싱글맘인 누나(로라 리니) 앞에 느닷없이 나타난 시한폭탄 같은 남동생 테리 역을 무리 없이 소화했고 그해 토론토와 밴쿠버 등을 포함한 다수의 지역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과 조연상을 챙겼다. 이 작품에서의 그의 연기를 눈여겨본 사람이 있었다. 바로 감독 겸 각본가인 리사 촐로덴코다. “영화 보면서 운 적이 거의 없다”는 그녀를 마크 러팔로가 울린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와, 도대체 저 청년은 누구지?’라는 생각을 계속했다. 멍청이 같아 보이는 테리에게 연민을 느꼈고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킨 배우 러팔로가 아직 충분히 많은 영화에서 활용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연출작 <에브리바디 올라잇>(2010)에 러팔로를 불러들였다. 이 영화의 여주인공인 줄리언 무어는 <눈먼자들의 도시>에서 호흡을 맞춘 러팔로에게 같이 출연하자며 손을 내밀었다는 후문이다. 게다가 리사 촐로덴코와 공동각본가로 이름을 올린 스튜어트 블룸버그는 자신의 감독 데뷔작 <땡스 포 쉐어링>에 러팔로를 앞세웠다. 사실 <에브리바디 올라잇>을 찍기 직전까지만 해도 러팔로는 연기를 그만둘 생각까지 한 것 같다. 2002년 갑작스럽게 찾아온 뇌종양으로 몸이 마비되었고(다행히 지금은 회복됐다), 2008년에는 남동생이 총에 맞아 숨지는 사고를 겪었다. 고통의 시간을 뒤로하고 다시 “배우로서 내가 가야 할 길”을 찾는 분기점이 돼준 작품이 <에브리바디 올라잇>이다.

그렇게 시작된 마크 러팔로의 연기 인생 2막에서 단연 눈에 띄는 건 <어벤져스>(2012)의 헐크다. 그간의 그의 연기 스타일을 생각해보면 엄청난 변화다. 하지만 마크 러팔로는 자신과 프랜차이즈 스타를 등치시키지 못한 관객의 고정관념을 깨끗하게 날려버리며 화끈하게 등장했다. 그의 선택의 결과는 “상당히 재밌는 작품이 될 것”이라며 아이언맨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러팔로에게 했던 말 그대로였다. 러팔로는 앞으로 여섯 작품이나 더 마블과 함께 작업하기로 했고 마블이 헐크를 단독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제작할 거라는 소문까지 꾸준히 나오고 있다. TV 뉴스 프로그램에 출연해 이라크전쟁을 반대하고 관타나모 수감자들의 인권을 내팽개친 부시 정부를 비판했던 러팔로와 악당 헐크 사이의 간극을 지켜보는 재미도 꽤 크다. 인생에서 힘든 고비를 넘긴 뒤, 오히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한 듯한 러팔로의 행보가 나쁘지 않다. ‘건강한 중년남’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충분히.

magic hour

가족의 힘

<유 캔 카운트 온 미>에서 테리 삼촌 따라 당구장 간 여덟살 조카 루디(로리 컬킨). 생에 첫 큐대를 잡는 폼이 그럴듯하다. 테리가 영 못 미더운 누나 새미가 보면 경악할 장면이겠지만 이런 작은 일탈의 순간이 테리와 루디를 친구처럼 가깝게 만든다. 얼핏 철부지 부자처럼 보일 정도다. 실제로 마크 러팔로는 아버지와 친구처럼 살가운 사이였다. 이탈리안계인 그의 아버지는 고등학생 때 레슬링 선수로 챔피언 자리에 오를 만큼 카리스마가 넘쳤지만 가족에게는 항상 자상했다. 러팔로에게 극장이라는 곳이 있다는 걸 알려준 이도 그의 아버지다. 여덟살 때 러팔로는 아버지 손에 이끌려 이소룡의 <용쟁호투>(1973)를 봤고 이 영화가 그가 극장에서 본 첫 극영화다. 아들을 영화의 세계로 인도한 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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