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뜻 뚱뚱해졌다고 걱정하는 말 속뜻 사랑이 식었는지 확인하는 말
주석 요즘 폭풍공감 그림이 유행이다. 똑같은 귀요미 애인이 틀린 그림 찾기 속에서 묻는다. 머리 묶는 게 나아, 푼 게 나아? 앞머리 있는 게 나아, 없는 게 나아? 가방 드는 게 나아, 메는 게 나아? 머리 기르는 게 나아, 자르는 게 나아? 당신은 바로 시험에 든다. 머리띠나 이마는 기억나지도 않는데, 가방이 무슨 상관인지 도무지 모르겠는데, 머리카락 고작 1~2cm 잘랐을 뿐인데, 뭐가 낫냐고? 그래도 이런 질문은 성의껏 대답하면 그만이다. 묶는 게 좋은데. 자기는 턱선이 예쁘니까. 푸는 게 좋아. 자기는 머릿결이 좋잖아. 가방은 둘 다 별로네. 내가 멋진 거 사줄게. 머리 자르지 마. 나의 소중한 몸을. 유유. 이런 식으로.
진짜 시험은 그다음에 온다. ‘예, 아니요’만을 요구하는 질문, 어느 한쪽에는 반드시 부비트랩이 설치되어 있는 질문. 나 요즘 살쪘지? (자매품도 있다. 나 요즘 피부 별로지?) 아니요, 라고 대답하면 파스타, CGV의 콤보세트, 치맥 시리즈가 기다리고 있다. 응, 이라고 대답하려면 절교 선언을 각오해야 한다. 어떤 대답이 좋을까?
옛날 사람들은 사물이 질료와 형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었다. 만물은 그 둘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질료는 무엇인가가 될 수 있는 재료이며 형상은 그 질료로 채워질 무엇인가다. 형상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것이라는 점에서 질료를 가능태(dynamis)라 부르고 질료가 현실적인 것이 되었다는 의미에서 형상을 현실태(energeia)라 부른다. 돌이 질료이고 팔등신 미녀의 모습이 형상이라면, 그 둘의 복합체가 비너스상이다. 좀 징그럽게 풀이하자면 “나 요즘 살쪘지?”라는 질문은 ‘나의 질료가 내 형상 너머로 넘쳐 나왔지?’라는 질문이다. 살이 다이너마이트(dynamite)처럼 폭발하고 있지? 모습이 에너지(energy)로 충만해 있지? 아, 하지만 똑같은 그녀다. 가능태가 현실태와 만난 게 그녀이므로 그녀의 살이 가닿은 곳에 그녀의 형상이 있을 뿐이다. 그녀는 변하지 않았다.
변한 건 당신이다. 기억은 마모작용을 이기지 못하고 형상을 깎아낸다. 어깨가 둥글어진 것은 꼿꼿하던 어깨를 망각이 깎아냈기 때문이고, 가파르던 아랫배가 출렁이는 것은 그 깎아낸 질료를 기억이 엉뚱한 데 가져다 붙였기 때문이다. 기억이 희미해지면 윤곽이 흐릿해진다. “나 요즘 살쪘지?” 하고 그녀가 물을 때 당신은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사랑해.” 처음 그 말을 했을 때와 똑같이.
용례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에서 할(잭 블랙)은 최면에 걸린 뒤에 쭉쭉빵빵 미녀 로즈메리(기네스 팰트로)를 만난다. 최면이 그녀를 미녀로 바꾼 것이 아니다. 그녀는 실제로도 가볍다. 다만 그녀의 존재감이 의자를 부술 만큼 무겁거나 속옷을 트리플엑스라지로 바꿀 만큼 거대할 뿐. 겉보기엔 시인인데 안에는 여럿이 산다. 중구난방을 받아 적다보니 그동안 시집, 비평집, 신화책, 동물책 들을 여럿 냈다. 이번 글의 목표는 ‘구비전승의 바이블’ 쓰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