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으로는 걱정이다.” 정두홍 무술감독이 말한다. <군도: 민란의 시대>(이하 <군도>)의 조윤이 너무 아름답고 사연 많은 악당이라 여성 관객에게 수많은 동정표를 얻을 것 같다는 이유에서다. 흐트러짐 없는 선비 복장을 하고, 긴 칼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군도>의 조윤은 그렇게 선인들의 존재감을 위협하는 매력적인 악인이다. “귀한 곳에서 태어나면 제왕이 될 운명”이었지만, 탐관오리의 아들로 태어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된 남자. 그런 조윤을 연기하는 강동원이 주목한 키워드는 ‘인간다움’이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얻고 싶었던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서자 출신의 조윤은 세상에 대한 분노를 긴 칼끝에 실어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베어버린다. 이러한 강동원의 모습에서 처음으로 남성적이고 파괴적인 힘을 느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형사 Duelist>(이하 <형사>)의 ‘슬픈 눈’은 날렵하고 우아했다. 하늘을 자유롭게 활강하는 전우치(<전우치>)는 경쾌하고 가벼웠다. 어떤 역할이든 이제까지 강동원이 연기했던 인물들은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얼마간의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군도>는 다르다. 흙먼지 자욱한 19세기 조선시대로 뛰어든 강동원은 특유의 신비로움을 벗어던진 대신 리얼리티라는 새로운 옷을 입었다. 한 배우의 변화를 이끌어내기에 4년이란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던 것 같다. 무엇이, 어떻게 달라진 걸까. 강동원에게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하는 인터뷰는 4년 만에 처음이다.
=그렇다. 거의 4년 만이다. 개봉을 앞두고 긴장이 많이 된다. 오랜만에 찍은 영화인데 잘돼야 한다는 생각도 들고, 주변에서 기대도 많이 하시는 것 같아서…. 개봉 전날엔 잠도 안 올 것 같다. (웃음)
-2012년에 군 제대를 했다. 공백기가 꽤 있었다.
=2012년에 소집 해제한 뒤, 바로 <군도>의 촬영을 위한 훈련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영화 촬영이 좀 늦어졌다. 중간에 김지운 감독님이 영화(<더 엑스>)를 찍자고 하셔서 잠시 촬영을 했고.
-보통 군대를 가면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고 하던데.
=마지막까지 다른 생각은 전혀 안 했고, 빨리 복귀하고 싶다, 그 생각만 했다.
-제대하고 난 뒤 작품 제의를 많이 받았을 거다. 그중에서 <군도>와 <두근두근 내 인생>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했다. <군도>는 몸의 연기를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영화였을 거고, <두근두근 내 인생>은 감정의 결이 중요했을 영화인데, 완전히 다른 두 영화를 선택한 건 의도였을까, 우연이었을까.
=그런 의도로 선택한 건 아니었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정말 그렇다. 두 작품은 서로 극단에 위치한 영화다. <군도>는 사실 윤종빈 감독님을 뵙자마자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속으로 ‘복귀작은 감독님과 하겠구나’ 하는 ‘감’이 딱 왔다고 할까. 감독님이 언젠가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다가 앞으로 어떤 배우와 작업해보고 싶냐는 질문을 받고선 “강동원씨와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더라. 그 얘기를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히 감독님과 술자리를 갖게 되었다. 당시에 생각하고 있는 작품이 있다고 하셨고 그 영화가 <군도>였다. 시나리오를 보고 싶다고 말씀드렸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감독님이 다른 작품을 준비하시다가 날 만나고부터 도저히 그 작품을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더라. 그쪽 제작사에 양해를 구하고 바로 <군도>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하셨다고 들었다.
-윤종빈 감독은 배우 강동원을 생각하면 어쩐지 “오이디푸스적인 인물과 잘 맞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군도>의 시나리오 작업 과정에서도 그런 인상이 조윤 캐릭터에 반영된 것으로 알고 있다. 조윤이라는 인물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나.
=영화를 촬영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윤 캐릭터가 바로 감독님이구나! (웃음) 현장에서 감독님과 많은 얘기를 나누다보니 그런 느낌이 들었다. 감독님이 조윤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면 현장에서 목격한 윤종빈 감독의 모습을 조윤 캐릭터에도 반영한건가.
=그건 아니다. 현장에서 스탭들끼리 정말 재밌게 놀았다. 그런 모습을 보며 약간의 아이디어를 얻은 건 있다. 좀더 호탕한 모습을 보여주자, 좀더 웃자, 라는 생각을 했다.
-<군도> 예고편에서 문을 단칼에 베어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동안 액션 장면이 중요한 영화는 많았다. <형사> <전우치> <의형제> 등이 있을 거다. 그런데 <군도>에서처럼 힘을 강하게 싣는 액션 연기는 처음인 것 같다.
=맞다. 지금까지 출연했던 작품을 통틀어 <군도>에서의 액션 연기가 가장 빠르고, 힘이 있다. 리얼하게 가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조윤의 주요 무기는 ‘긴 칼’이다. 긴 칼을 썼을 때만 나올 수 있는 액션의 특징이 있을 것 같다.
=보통 1자 칼을 ‘검’이라 부르고 휘어 있는 칼을 ‘도’라고 부른다. <형사> 때 썼던 칼이 ‘검’이다. 검을 쓸 때는 상대방을 찌르고, 다른 칼과 ‘챙챙챙챙’ 맞붙는 액션이 중요하다. 반면 ‘도’를 쓸 때에는 힘을 실어 무언가를 자르는 액션이 중요하다. 처음에는 목검으로 연습하다가 그 검을 제어할 수 있을 때 긴 칼로 바꾸어 연습했다. 넉달 정도 훈련했다.
-액션 장면에서 거의 대역을 쓰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렇다. 내가 원래 다른 사람을 잘 못 믿는 성격이라…. (웃음) 누구에게 뭘 믿고 잘 맡겨두질 못한다. 대역을 맡은 분이 윤현이 형이라고, <전우치>에서도 내 대역을 맡았던 분인데 그때도 거의 믿고 맡겨두지 않았었다. (웃음) 너무 위험한 장면만 부탁 드리고, 대부분의 액션 연기는 내가 직접 했다. 어쨌든 시나리오를 볼 때부터 이 영화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액션 연기를 잘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인물은 (하)정우 형의 돌무치이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이 영화를 화려하게 만들 수 있는 액션 장면을 잘 소화해내는 것이었다. 사실 연기자가 직접 액션 장면을 연기하지 않으면 좋은 장면이 나올 수 없다. 롱테이크로 갈 수도 없고, 대역하는 분의 등만 찍는 거라 자세히 촬영할 수도 없다. 그래서 정말 열심히 훈련했다. 이번에 말도 처음 타봤는데, 타기가 쉽지 않더라.
-고삐를 잡지 않고 점프해서 말을 타는 장면도 있다고 들었다. 그 장면도 직접 소화했다고.
=무술팀 분들이, 이건 우리 비장의 무기인데 나에게 전수를 하겠다고 하시더라. (웃음) 그 기술을 소화하려면 키도 커야 하고, 운동신경도 있어야 해서 웬만한 배우들에게는 잘 안 가르쳐줬다고. 겨우겨우 배워서 할 수 있게 됐는데 감독님이 그 장면을 콘티에서 뺐다. 열심히 연습했다, 할 수 있다고 말씀드려서 다시 그 장면을 추가했는데, 막상 촬영날 가장 큰 말이 현장에 왔다. (좌중 폭소) 그레이스라고…. 할 수 있다고 장담은 했는데 큰 말이 와서, 결국 올라타긴 했는데 좀 힘들었다. (웃음)
-<형사> 때는 현대무용을 배운 경험이 액션에 도움이 됐다고 들었다. <군도>에서도 특별히 진행한 연습이 있나.
=현대무용은 <형사>에 출연할 당시 배워놓은 게 정말 큰 재산이 됐다. 배우로서 어떤 연기를 해도 다 도움이 된다. 일단 제스처가 달라진다. 연기자라면 현대무용은 꼭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고, <군도>를 찍을 때도 도움이 되었다. 이번에는 특별히 따로 연습한 건 없고, 그때그때 앵글에 맞는 가장 효과적인 움직임이 무엇일지를 고민했다. 기본적으로 이런 연습을 했다. 액션스쿨 분들이 처음에 ‘합’을 가르쳐주겠다고 하시길래 합보다도 정말로 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기본적인 베기를 다 가르쳐달라고 말씀드려서, 액션스쿨의 대식이라는 친구가 정식으로 기본 베기를 배워와 함께 연습했다.
-돌무치(하정우)의 작은 칼과 조윤의 큰 칼이 부딪칠 때, 정말로 세게 ‘도’를 내리치는 것 같아 스릴감이 있더라.
=정우 형이 많이 무서워했지. (웃음) 내가 큰 칼로 내리치면 정우 형이 작은 칼로 막는데, 내 칼이 형의 손과 너무 가까웠으니까. 형에게 계속 이런 말을 했다. 나를 믿어라. 나는 지금 검의 달인이 됐다. (웃음) 절대 헛되이 치지 않는다. 그걸 위해 지금까지 4개월 동안 훈련했다. 그런데도 믿지 않고 날 무서워했다. (웃음)
-하정우와 함께 연기한다는 점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을 것 같다.
=물론이다. 정우 형은 현장 상황에 정말 유연하게 대처한다는 느낌이 있었다. 반면 나는 굉장히 경직되어 있는 상태였다. 4년 만에 연기를 시작하니 목덜미가 뻣뻣해지고, 정말 신인으로 다시 돌아간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연기가 너무 안 되더라. 대사도 잘 안 되고, 호흡도 느려지고…. 그 원인을 찾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나중에 보니 내가 거의 숨을 안 쉬면서 연기를 하고 있더라. (웃음) 호흡 돌아오는 데에만 몇 개월이 걸렸다.
-<군도>처럼 남자배우들과 함께 연기하는 장면이 많은 출연작이 드물다. 남자배우들이 많은 현장에서 느낄 수 있는 특유의 에너지가 있을 것 같다.
=그렇다. 이상한 에너지가 있다. (웃음) 텐트 안에 덩치 큰 사람들이 수두룩하게 앉아 있으면 삭막하고 갑갑하지. (웃음) 대신 다들 거침없이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는 됐다. 정말 재미있었다. 왜 그렇게 재미있었을까 생각해보니 나이대가 다들 비슷하더라. 정우 형과는 세살 차이고, 진웅이 형도 나이차가 크게 나지 않고. 이렇게 비슷한 나이대의 남자배우들과 함께 연기하기는 처음이다.
-조윤은 사연 있는 악당이다. 아버지와 조윤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낼지가 고민이었겠다.
=아버지에 대한 조윤의 감정은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이해가 다 되더라.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아들의 감정은 경상도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거다.
-그런가?
=경상도 출신 아버지들이 칭찬을 안 한다. 내가 이제까지 살면서 아버지에게 칭찬 들은 게 딱 한번이다.
-그게 언제였나.
=지금 생각하면 웃긴데(웃음) 초등학생 때 아파트 15층에 살았었다. 어렸을 때부터 창밖을 내다보는 걸 정말 좋아했다. 그래서 국어선생님이 내 별명을 ‘꿈꾸는 소년’이라고 지어준 적도 있다. “우리 동원이는 꿈꾸는 소년이야, 만날 창밖만 보고 있어….” (좌중 폭소) 언젠가 집에서 창밖을 내다보다가 방충망을 떨어뜨린 적이 있다. 15층에서 떨어져서 네 조각이 났더라. 방충망을 잇는 기역자 모양의 플라스틱 이음새가 박살이 났더라고. 난 죽었다. 엄마 아빠가 집에 오시면 창밖을 내다봤다고 혼날 텐데…. 집안 형편도 넉넉지 않아 방충망 사는 것도 엄청난 부담이고. 그래서 오만 가지 생각을 하다가 아무도 몰래 수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플라스틱 대신 끼워넣을 것을 찾다가 아파트 분리수거함을 뒤져 알루미늄 캔을 기역자 모양으로 다 잘라서 방충망에 연결했다. 한달 뒤에 아버지가 문득 베란다 창문을 보시다가 “어? 이게 뭐지?” 하시는 거다. 그거 제가 예전에 떨어뜨려서 고쳐놓은 거라고 그랬더니 아버지가 대단하다고, 정말 잘했다고 칭찬해주셨다. 그게 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어본 칭찬이었다. (좌중 폭소) 그러다보니 이해하기가 상당히 쉬웠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감정이란걸.
-엄청난 에피소드다. (웃음) 조윤의 아버지를 배우 송영창이 연기하는데, 그분과 인연이 깊다. <형사>와 <전우치>에서도 밀접한 관계를 맺는 인물로 등장했다.
=그러니까. <형사> 때도 친아버지는 아니었지만 아버지 같은 존재로 나왔다. 이번에는 진짜 아버지를 연기하시고. 안 그래도 송영창 선생님이 아버지 역할로 출연하신다고 하니까 이명세 감독님이 “아이고, 결국에는 (송영창 배우가) 진짜 아버지가 됐구나” 말씀하시더라. 선생님과 몇 작품을 함께하다보니 잘 맞는다. 선생님도 날 많이 좋아해주셔서, 공연할 때마다 불러주신다.
-이건 그냥 문득 든 생각인데, 예전보다 말수가 많아진 것 같다.
=그런가? 아마 <군도> 팀들과 같이 있다보니 그런가보다. 이 팀이 엄청 재미있고, 독특한 말투를 쓴다. 처음에는 내가 못알아들으니 윤종빈 감독님이 옆에서 통역을 해줄 정도였다. (웃음) 그분들과 계속 함께하다보니 나도 어느새 그들을 닮아가는 것 같다. 그분들이 쓰는 은어도 쓰고. (웃음)
-<두근두근 내 인생>에서는 아버지를 연기한다. 지금 단계에서 많은 이야기를 할 순 없겠지만, 배우로서 어떤 경험을 한 작품인가.
=시나리오가 정말 좋아서, 보자마자 무조건 하겠다고 한 작품이다. ‘나이 든 아이’와 ‘가장 어린 부모’의 이야기. 영화의 주요 내용이 그렇다. 내가 아들의 감정은 알지만 부모의 감정은 알 수가 없어서 처음에 몰입하기 다소 어려웠던 점은 있다. 다만 나를 정말 잘 아는 사람들은, <두근두근 내 인생>의 대수가 나와 정말 닮았다고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대수가 성격적인 면에서는 이제까지 연기한 인물들을 통틀어 가장 나와 닮았다. 그래서 연기하는 데 수월했던 지점이 있다. 말투도 거의 바꾸지 않았다. 사투리를 그대로 썼고.
-두 작품을 마치고 나니 몸이 좀 풀린 것 같나.
=그렇다. 다시 좀 사람답게 연기하게 됐다. (웃음) <두근두근 내인생>을 찍으면서는 카메라 안에서 정말 신나게 놀았다. <군도>에서는 신나게 액션을 했고. 그런데 갈수록 드는 생각이, 현장에 있을 때 정말로 좋다는 거다. 현장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특히 <군도>로 오랜만에 영화 현장을 찾았는데 하루하루가 너무 좋더라. 내가 한번도 촬영 끝나고 운 적이 없는데, <군도>를 마치고는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물론 회식 자리에서 술을 약간 마신 탓도 있겠지만. 그때 제작 과정을 담은 사진들을 음악 깔고 슬라이드로 보여줬는데, 혼자 엄청 울고 있더라. 창피해가지고….
-그건 아쉬움의 눈물이었을까.
=캐릭터에 정을 붙일 만하니 끝난다는 게 아쉽기도 했고, 그렇게 훈련을 했는데 몇명 더 베어보고 싶기도 하고…. (좌중 폭소) 어제 장률 감독님과 윤종빈 감독님을 뵈었는데, 윤종빈 감독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 <군도>가 잘되면 중국으로 진출해서 거기서 한번 칼을 휘둘러보라고.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