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배우 진경입니다”로 시작하는 문자가 왔다. 장문의 문자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스승 오순택(사진 위)의 공연 소식이 담겨 있었다. 오순택의 첫 제자 이윤택이 연출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제자들이 출연하는 연극 <리어를 연기하는 배우, 미네티>로 오순택 선생이 오랜만에 무대에 선다. 그는 1933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 1959년 미국 유학을 떠났고, 1970~80년대 할리우드와 브로드웨이에서 배우로 맹활약했다. 그의 출연작 <007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 TV시리즈 <미녀 삼총사> <하와이 5-0 수사대>를 기억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드라마 <참 좋은 시절>에 출연 중인 진경(아래)은 바쁜 시간을 쪼개 스승의 연습실을 찾았다. <리어를 연기하는 배우, 미네티>에 함께하지 못한 것이 못내 미안했는지, 빼곡하게 글이 적힌 A4 3장짜리 질문지를 들고서.
진경_공연까지 며칠 안 남았는데 체력엔 문제없으시죠?
오순택_문제없었는데, 아침에 제자가 찾아왔기에 ‘오늘은 (연습실) 가기 싫다’ 했어요. 나도 놀랐어요. 그런 마음이 들어서.
진경_절 만나는 게 싫었던 건 아니시죠?
오순택_그렇구나. 경이가 오니까 내가 가기 싫었던 거구나. (웃음)
진경_(빼곡한 질문지를 보며 어색해하다) 선생님과의 첫 만남으로 얘기를 시작할게요. 2001년 한예종 연극원 대학원 1학년 2학기 ‘연기 실습’ 수업 때 처음 뵀어요. 전 1998년에 연극원 학부를 졸업했고, 작업을 찾아 헤매는 것에 지쳐 있을 때 어머니의 권유로 도피처로서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어요. 수업엔 큰 관심이 없었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선생님의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제가 지금까지 연기를 할 수 있었을까 싶어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같은 마음일 거예요. 그래서 이번 공연에도 제자들이 서로 참여하겠다고 발벗고 나선 거겠죠. 저도 대학원 졸업하고 신인 연기자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어요. 좋은 배우가 꼭 좋은 선생님이 되는 것도 아니고, 좋은 선생이라고 해서 꼭 좋은 배우인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선생님께선 훌륭한 선생님인 동시에 훌륭한 배우시잖아요. 이 시점에서 질문! 배우로서 요구되는 능력과 티처로서 요구되는 능력은 분명 다를 텐데, 어떻게 굿 티처와 굿 액터가 될 수 있는 거죠?
오순택_우와,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네.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에요. 배우는 항상 나만의 비밀이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자기의 전부를 노출하지 않는 것. ‘눈을 뗄 수 없다’는 표현이 있잖아요. 그다음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으니까 눈을 못 떼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연기는 작품의 맥락 속에서 치밀하게 계산되지 않으면 안 돼요. 그런데 계산한다고 해서 계산한 대로 연기가 되는 것도 아니에요. 상대 배우는 내 계산을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액팅 이즈 리액팅’(Acting is Reacting)이에요. 준비를 철저히 하면 상대방을 놓치지 않아요. 꼭 지금 강의실에 앉아 있는 것 같은데, (웃음) ‘액팅 이즈 리액팅’이 되면 상대 배우가 연기하기 쉬워져요. ‘액팅 이즈 두잉’(Acting is Doing), 즉 자기 할 것만 밀어붙이는 배우가 많은데, 그러면 상대 배우가 힘들어지고. 준비가 되면 될수록 ‘액팅 이즈 리액팅’이 돼요. 그럼 관객도 참 재밌지.
진경_굿 티처는요?
오순택_난 굿 티처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굿 티처들은 어떻게 가르치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인간인고로 처음 티칭을 할 때는 내가 고생해서 연구한 것을 사람들에게 노출할 필요가 있나, 그런 저항감을 느끼긴 했어요. 다만 한국 와서 놀란 게 한국 애들이 미국 애들보다 재능이 더 많아요. 재능이 없거나 게으르거나 했다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을지도 몰라요.
진경_앞서 ‘연기 실습’ 수업이 어마어마했다고 말씀드렸는데 핵심은 이거예요. ‘moment to moment’, 즉 순간에서 순간으로. 선생님 수업에선 1초라는 시간이 엄청난 힘을 가져요. 학생들이 준비한 10분짜리 장면은 그저 10분의 시간덩어리에 불과한데, 선생님은 그 10분의 덩어리를 잘게 쪼개고 해체해요. 그 짧은 시간에 얼마나 많은 것을 수행할 수 있는지 깨닫게 해주죠. 상대 배우와도 관계를 맺어야 하고, 공간과 소도구와도 관계를 맺어야 하고, 관객과 관계 맺으면서 캐릭터도 보여줘야 하고…. 그러면 10분 중에 단 1초도 허투루 지나가는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게 돼요. <광부화가들>이란 연극에서 인상깊었던 대목이 있어요. ‘삶은 잡아내지 않으면 결국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을 잡아내는 것이 예술이다.’ 선생님은 그 순간을 잡아내는 방법, 순간을 영원으로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어요. 이젠 <리어를 연기하는 배우, 미네티>를 통해 선생님께서 삶을 잡아내게 되셨는데, 우선 제자들과 함께 연극 준비하시는 감회가 궁금해요.
오순택_제자들이 섭섭해할지 모르겠지만, 공연이 곧 시작인데 아직은 불이 타고 있지를 않아요.
진경_왜 그럴까요.
오순택_모르겠어. 작품의 문제인지, 대본의 문제인지, 연습장의 문제인지, 연출하는 분의 문제인지.
진경_이윤택 선생님하고 잘 안 맞으세요?
오순택_아니. 연출하는 애(웃음), 애라고 해서 미안한데, 이윤택씨는 서울예술대학에서 가르칠 때 제일 재능 있던 첫 번째 제자예요. 지금도 그때의 열정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대단한 분이지. 결국은 잘 모르겠어. 우리는 남한테 책임을 전가하려는 습관이 있잖아. 주연으로서 주위의 에너지를 흡입해서 끌고가는 힘이 부족한 게 아닌가 자성할 때도 있고.
진경_이윤택 선생님은 미네티 역에 선생님을 캐스팅 하면서 미네티가 가진 예술에 대한 고집 혹은 예술가로서의 지성이 선생님과 통하는 데가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오순택_(미네티는) 리어왕을 연기하기 위해 30년을 기다린 배우예요. ‘난 30년 동안 무대에 서지 못했다. 나는 연기를 못했다’라는 독백이 있는데, 집념이라면 집념이지. 조금 걱정이 되는 건 난 운이 좋아서 계속 작품을 했잖아요. 그런데 이 인물은 30년 동안 리어를 하고 싶어서 리어왕의 가면까지 만들어 가지고 다니는 인물이란 거예요. 그 집념이 연기하는 과정 어디엔가 풍겨야 하는데, 그 순간을 아직 정확히 잡지 못했어요. 내 생각엔 이렇게 열심히 연기를 하고 싶어 하는 인물이 30년간 리어왕을 연기하지 못했다면 이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미네티가 명배우라면 연출자나 제작자가 30년을 그냥 두진 않았을 것 같아요.
진경_선생님과는 다른데요. 선생님은 명배우셨잖아요.
오순택_명배우는 아니지만, 어쨌든 대본을 읽고는 ‘왜 가면이 필요했을까’ 생각했어요. 시기적으로 가면을 쓰고 연기하던 시대는 지났는데. 어떤 의미에선 배우든 연극이든 연기 스타일이든 시대가 지나면 변하기 마련이고, 거기에 적응하지 못한 배우는 무대에 설 자격이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닐까 싶어요. 하여튼 재밌는 작품이야.
진경_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박제된 늙은 예술가의 비참한 최후, 이런 거죠?
오순택_맞아.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거지. 성공한 배우일수록 자기를 고집하는 게 있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 겁이 나네요. 이번에 공연하면서 고집을 안 부려야 하는데. (웃음)
진경_지난해 제자들이 선생님의 수업 내용을 정리한 책 <오순택 연기수업 칼을 쥔 노배우>를 출간했어요. 책 서두에 선생님께서 자신의 연기론에 관한 글을 쓰셨어요. 글을 보면 ‘배우란, 산다는 게 무엇인지 삶의 본질에 대해 관객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것이 배우의 사명이다’라고 되어 있어요. 또 선생님께서 21세기 연기미학으로 ‘신체시정적 접근법’을 제시하셨어요. 어떤 악기보다도 예민한 배우의 몸과 시인의 서정성을 품은 배우의 마음이 일치하는 순간 관객이 연기자와 더불어 삶의 본질을 공유하게 된다는 거예요. 굉장히 다가가기 어려운 경지죠. (웃음) 선생님께선 ‘액팅 이즈 빙’(Acting is Being), 연기란 존재하는 것이다, 관객과 배우의 실존이 부딪히는 것이다, 라고 하셨잖아요. 캐릭터라는 가면 뒤에 자신의 존재를 숨기는 20세기 연극미학인 ‘캐릭터 액팅’에서 머물지 말고 가면 뒤에 숨은 배우의 존재가 관객과 만나는 지점까지 가야 한다고 이해하면 될까요?
오순택_맞아. 배우의 영혼과 관객의 영혼이 만나 메아리치는 순간, 관객은 ‘산다는 게 이런 거구나’ 느끼게 돼요. 그것이 연기자의 궁극적인 목표지요.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영화가 있는데 거기서 피터 오툴이 참 연기를 잘해요. 극장에 앉아서 ‘저 사람 참 감동적으로 연기 잘한다’ 하고 분석하며 본 게 아니라 끌려가며 봤어요. 그렇게 끌려가다가 어느 순간 사막 장면이 펼쳐져요. 그 순간 얼마나 눈물이 솟던지. 그건 사실 연출하는 분이 잘한 건데, 그런 순간을 영화에서든 연극에서든 경험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경험한 적이 딱 두번 있어요.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봤을 때. 그리고 뮤지컬 <태평양 서곡>(1976)에 출연했을 때.
진경_브로드웨이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예전에 율 브리너의 공연을 보러 갔다가 생긴 에피소드도 있으시죠.
오순택_뮤지컬 <왕과 나>를 보러 갔어요. 극장 이사장이 나를 앞줄 세 번째 자리에 앉혔는데, 율 브리너 이분이 연기를 하는 게 아니고 폼만 재고 있는 거예요. 공연이 끝난 다음에 사람들이 모두 일어서서 일제히 박수를 치는데 난 안 일어났어요. ‘오늘 당신은 기립박수를 받을 만큼 연기를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계속 안 일어나니까 율 브리너가 나를 째려봐요. 그 눈빛 유명하잖아요. 끝까지 버티고 앉아 있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그 뮤지컬에 출연한 배우가 말하길 율 브리너가 암으로 아픈 상태였대요. 그 얘기를 듣고 율 브리너를 찾아갔어요. ‘너무 어지러워서 일어설 힘이 없었다’고 사과했죠.
진경_이제 연극 연습하러 가실 시간 다 됐으니, 마지막 질문 드릴게요. 후학 양성 혹은 연기, 언제까지 하고 싶으세요?
오순택_누가 와서 가르쳐 달라는 말을 안 해요. 무대에 서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아요.
진경_제자들이 부르면요.
오순택_(제자들이) 아쉬워하지 않을 텐데. ‘아이고 잘됐다, 드디어 사라졌구나’ 그러겠죠. (웃음)
<리어를 연기하는 배우, 미네티>
<리어를 연기하는 배우, 미네티>(원제 <미네티-늙은 예술가의 초상>)는 30년간 리어왕을 연기하고자 했으나 결국은 무대에도 서지 못하고 사회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한 어느 예술가의 초상을 그린다.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작품이 원작이며 국내에선 초연이다. <미네티-늙은 예술가의 초상>은 토마스 베른하르트가 연극배우 베른하르트 미네티에게 헌정한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리어를 연기하는 배우, 미네티> 역시 이윤택 및 제자들이 스승 오순택에게 바치는 헌정 작품이다. 7월12일부터 19일까지 서울 충무아트홀에서 공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