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조성규] 여름에 마시는 시원한 와인처럼
2014-07-23
글 : 김성훈
사진 : 최성열
네 번째 연출작 <산타바바라> 만든 영화사 조제 조성규 대표

누가 미식가 아니랄까봐. 영화사 조제 조성규 대표는 인터뷰 하루 전날 인터뷰 장소를 카페에서 연남동의 한 라멘집으로 바꾸자고 했다. “단골집이다. 카페에서 사진을 찍으면 그림이 비슷비슷하잖나. 지난주 일요일에 와서 라멘집 사장님께 인터뷰 좀 하겠다고 말씀드렸다”면서 말이다. 누가 감독 아니랄까봐. 사진 촬영 장소까지 정해주는 그다. 조성규 대표, 아니 감독이 벌써 네 번째 연출작 <산타바바라>(7월17일 개봉)를 만들었다. 전작처럼 이번에도 미식가, 와인과 음악 애호가로서 그의 취향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음악감독 정우(이상윤)와 광고회사 AE 수경(윤진서), 두 남녀가 미국 캘리포니아의 유명한 와인 산지 샌타바버라까지 간 사연은 무엇일까.

-댁은 근처인가.
=홍은동. 지난해 12월 옥수동에서 이쪽으로 이사왔다.

-<산타바바라>에 연남동, 서교동, 상수동이 나온다. 세곳 모두 집 근처다.
=친구들이 이 동네에 살고 있는 데다가 여기서 주로 놀다보니…. 제비다방, 춘삼월, 편집됐지만 대복식당 등 영화 속 카페나 식당 모두 단골집이다. 이 라멘집도 다음 영화에 나올 거다. (웃음)

-벌써 네 번째 연출작이다.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라서 편수와 순서에 큰 의미를 두진 않는다.

-그래도 과거에 비하면 대표라는 직함보다 감독이 익숙할 것 같다.
=전혀. 얼마 전 권칠인 감독님을 오랜만에 만났는데 나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시더라. 호칭은 중요하지 않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대표라는 호칭을 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샌타바버라는 영화 <산타바바라>를 찍기 전에 가본 적이 있다고 들었다. 그곳에서 로케이션 촬영한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영화 <사이드웨이>와 와인을 좋아해서 찾았다고.
=2007년쯤인가, 해외 출장을 많이 다니던 때였다. 그때 그런 욕심이 있었다. 출장 갈 때마다 근처에 있는 와이너리를 찾았다. 칸 마켓 때 파리에서 차를 빌려 보르도에 갔고, 베니스영화제 때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 베로나가 있는 베네토 지방을 찾았다. 스페인 산세바스티안영화제 때 유명한 와인 산지 리오하에, 아메리칸필름마켓 때 캘리포니아의 와인 산지 샌타바버라에 갔다. 사실 일주일 가까운 출장 일정에서 하루 시간 내서 와이너리를 찾는 건 쉽지 않다. 차라리 그 시간에 영화 한편 더 보고, 영화 구매하는 게 낫다. 하지만 영화를 오래 수입하면서 안 사는 게 돈을 버는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놀 수 있으면 놀자 싶어서 평소 가고 싶었던 그곳에 간 거다.

-실제로 가본 샌타바버라는 <사이드웨이>에서 보던 느낌과 다르던가.
=영화에서보다 내 눈으로 직접 본 실제 공간이 훨씬 좋았다. 기본적으로 와인이 재배되는 동네가 날씨가 좋다. 와인을 마시는 것 이상으로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영화 얘기 좀 해보자. 전작이 그랬듯이 영화 <산타바바라> 역시 연애담이다. 어떻게 구상하게 됐나.
=예전부터 생각만 했지 경험해보지 못한 게 있다. 연인이 생기면 와이너리 투어를 하는 것. 꿈이자 로망이다. (앞에서 얘기했던 와이너리들을 여자와 함께 간 게 아니었나, 라는 질문에) 칸은 김C, 샌타바버라는 LA에 살고 있는 김정중 감독(<오이시맨> 연출), 회사 직원과 함께 가서 로맨스 같은 게 전혀 없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혼자 가서 낭만은커녕 고생한 기억밖에 없다. 어쨌거나 사랑하는 남녀가 와이너리에 가는 로맨스를 만들어보려고 했다.

-정우와 수경이 함께 술 마신 다음날, 수경이 “전날 밤 우리 사귀기로 한 거 아니냐”라고 얘기하면서 두 남녀의 관계가 시작된다. 평소 꿈꿨던 판타지인가. (웃음)
=적당한 술의 힘은 관계를 어느 정도 진행하는 데 필요하다. 남자들이 술을 안 마시고도 여자를 사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지 않나. 나도 그러고. 또 하나는 대부분의 남자들이 여자보다 술을 잘 마신다고 과신한다. 하지만 남자보다 술을 잘 마시는 여자들이 분명 있다. 그때 된통 당하는 거다. 정우가 술을 마신 뒤 수경으로부터 그런 얘기를 듣는 게 이런 케이스다. 판타지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게 남녀 관계가 가까워지는 일반적인 방식인 것 같다. 술과 음식은 남녀 관계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과 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소 같다.

-정우 역을 연기한 이상윤은 <인생은 아름다워>(2010), <내 딸 서영이>(2012) 등 드라마에서 주로 활동하던 배우다. 어떻게 캐스팅했나.
=(이)상윤이 같은 스타일을 좋아한다. 바르게 자란 스타일. 내 눈에는 되게 괜찮은데 여러 이유로 아직 주목받지 못하는 배우의 이면을 끄집어내고 싶은 욕심이 항상 있었다. 그런 면에서 상윤이는 또래 배우 중에서 잘될 것 같은데 악역 같은 캐릭터 연기보다 생활 연기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경 역의 윤진서는 오래 알고 지낸 사이 아닌가.
=장률 감독의 <이리>(2008)를 제작할 때부터 알고 있었다. 연기로 영어를 잘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영어를 잘하는 배우가 수경 역할을 해줬으면 싶었다. 영어를 잘하는 여배우들이 몇 있는데 그중 진서가 역할과 가장 잘 어울렸던 것 같다.

-캐스팅이 끝난 뒤 배우들에게 특별히 주문했던 건 뭔가.
=연출을 정식으로 배운 게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가급적이면 배우들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는 편이다. (윤)진서는 직장 생활을 한 적이 없어 변호사인 그의 친언니를 과하지 않게 참고하되 나머지는 편하게 하라고 주문했다. 수경이라는 배역 이름은 그의 본명에서 따왔다. (이)상윤이 역시 가급적이면 연기를 하지 말라고 했다. 색으로 치면 채도를 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현장에서 두 사람을 많이 풀어주려고 했다. 촬영날 일찍 촬영장소에 가서 공간의 분위기를 익히게 하면서 말이다.

-연남동, 서교동, 상수동 등 한국 분량 장소는 익숙한 반면 샌타바버라는 제작진에게 낯선 공간이었을 텐데.
=특히 이희섭 촬영감독이 힘들어했다. 예산과 시간 문제 때문에 촬영 전 로케이션 헌팅을 가지 않았다. 샌타바버라 공간을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진행 동선이 너무 길었다. 숙소에서 촬영장소인 와이너리까지 가는 데만 40, 50분 걸렸고, 석양을 찍기 위해 말리부쪽으로 미친 듯이 갔지만 해는 이미 졌고. 동선을 대비해야 했는데…. 나중에 렌트카를 반납할 때 차량 주행 기록을 보니 열흘 동안 2천km를 달렸더라. 하루에 200km씩 달리면서 영화를 찍었던 것이다. 처음 와본 공간에서 고민을 많이 했던 촬영감독에게 미안하다.

-엔딩크레딧을 보니 샌타바버라 관광청과 샌타바버라 필름커미션이 올라가더라. 두 기관의 지원을 받았다고 해도 해외 로케이션은 예산적으로 부담이 컸을 텐데.
=부담감이 컸다. 샌타바버라 관광청과 필름커미션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두 기관이 장소 섭외도 도와주고, 어떤 장소에서는 사용료도 대신 처리해줬다. 덕분에 전체 예산의 1/4에 달하는 비용과 진행 시간을 절약했다.

-남녀의 연애담을 주로 그렸던 전작과 달리 주인공이 가족에 대한 고민을 한다. 정우의 여동생 소영(이솜)을 통해 정우와 엄마의 관계를 환기시키고, 수경 역시 남다른 가족사를 간직하고 있다.
=원래는 정우 엄마 내용이 많았는데 큰 줄기가 편집됐다. 한동안 가족이라는 존재를 많이 잊고 살았다. 하지만 최근에 생각이 바뀌었다. 친구도 연인도 좋지만 스스로에게 큰 힘이 되는 게 가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혼자 살다가 지난해부터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다. 가족 이야기를 영화에 좀더 많이 넣고 싶었지만 기술적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어설프게 다룰 바에는 좀 빼는 게 낫겠다 싶었다. 어쨌든 영화는 봄에서 여름까지 이어지는 이야기인데, 여자와 가족을 통해 한 남자가 어른스러워지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지금 연애하고 있나.
=있겠나? 있으면 이런 걸 만들고 있겠나. (웃음)

-전작 <내가 고백을 하면>을 찍을 때 신경을 너무 써서 “다시는 영화를 안 하겠다”고 했다던데. 계속해도 되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뭔가.
=<맛있는 인생>은 아무 생각 없이 찍었다. 세상에 내놨더니 <씨네21>로부터 별 반개를 받았다. (웃음) <설마…그럴리가 없어>는 계약 때문에 찍어야 했던 영화이고. <내가 고백을 하면>을 만들지 않으면 영원히 ‘별 반개짜리 감독’으로 남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영화를 찍고 나니 영화 만드는 게 재미있더라. 지금 같은 방식으로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무언가를 계속 찍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영화사 대표든 감독이든 직함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지만 감독을 하면서 회사 운영이 달라진 점도 있을 것 같다.
=조성규라는 사람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좋아하는 일을 취미처럼 하는구나라고 오해할 수도 있다. 전혀 그렇지 않다. 과거 여러 영화를 제작하면서 많은 빚을 졌던 까닭에 여러 편의 영화를 찍어서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다. 오랫동안 이 업계에 있으면서 한방에 돈을 버는 분들을 많이 봤다. 한방에 전세를 역전시켜야지, 그런 생각을 나라고 왜 안 했겠나. 그게 되는 사람이 있고, 안 되는 사람이 있다. 지금의 나는 한달이든 열흘이든 작은 영화를 많이 찍어서 수익 구조를 맞추는 게 중요하다. 다행스럽게도 앞의 연출작 세편 모두 손해는 보지 않았다. 조금씩 돈을 벌었다. 이번에도 제작비를 많이 쓰지 않았다. 단 한편이라도 손해를 본다면 더이상 영화를 안 찍을 거라는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영화 만드는 일은 즐기는 게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앞에서 수입을 더이상 하지 않는 게 손해를 보지 않는 일이라고 짧게 얘기했다. 그런 점에서 수입사로서 영화사 조제는 어떤 고민을 하고 있나.
=한때 칸영화제 경쟁부문 작품 대부분을 구매한 적 있다. 그때만 하더라도 우리가 아니면 다른 회사들이 구매하지 않을 것 같아 사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수입사들이 너무 많잖나. 마켓에 매번 가는 게 아님에도 정말 구매하고 싶었던 작품은 틈틈이 샀던 것 같다. 최근 개봉했던 <스타로부터 스무 발자국>도 오스카상 받기 전에 구매했고, 베를린영화제 기간 알랭 레네의 유작 <사랑은 마시고 노래하며>를 샀다. 어쨌거나 많은 사람들이 구매하고 있는데 굳이 나까지….

-요즘 물리학에 빠졌다고 들었다.
=문과 출신이라 이과, 특히 물리학은 치를 떨었다. 몇년 전 삶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웃음) 그때부터 물리학 책을 읽으면서 공부하고 있는데 정말 어렵다.

-차기작 <플랑크 상수>는 현재 후반작업 중이라고. 제목이 양자역학의 기본적인 상수 중 하나다.
=다중우주론, 4차원 공간을 다룬 이야기다. 미용실, 카페, 극장, 겨울 산에서 벌어지는 각기 다른 네개의 에피소드들이 연결되어 하나의 우주로 이어지는 옴니버스 형식이고. 배우 김재욱과 함께 작업했다.

-와인 애호가로서 <산타바바라>를 와인에 비유한다면.
=여름에 마시는 화이트 와인 중 소비뇽 블랑 같은 와인. 달달하지도 않고, 보르도 와인처럼 뒤끝이 세지도 않다. 마실 때 시원해서 기분이 딱 좋아지는 와인. 영화를 보는 동안 스트레스를 잊고, 꼭 샌타바버라가 아니더라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좋아하는 장소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으면 좋겠다. 영화가 만들어진 지 1년이 넘었는데도 겨울에 개봉하지 않는 것도 한창 더울 때 극장 가서 본 뒤 시원해졌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지금 더우니 개봉 날짜가 너무 좋다. (웃음)

“컨트롤하기 쉽지 않은 감독. (웃음)” 조성규 대표와 함께 영화사 조제를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는 조은운 대표에게 들은 ‘감독 조성규’에 대한 평가다. 제작자인 자신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뜻이라기보다 누구보다 자신의 장단점을 잘 알고 있는 까닭에 자신의 취향을 고집한다는 뜻이다. 데뷔작 <맛있는 인생>(2010) 이후 약 5년 동안 총다섯편의 영화를 만들었음에도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그대로”라는 주변 사람들의 평가도 그런 의미에서 나온 얘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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