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혁의 바디무비]
[김중혁의 바디무비] 머리카락에 숨은 거시기
2014-07-24
글 : 김중혁 (작가)
일러스트레이션 : 이민혜 (일러스트레이션)
옷을 입고 벗는 순간에 예민한 K, 진화와 털, 옷입기의 상관관계를 고민하다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아서 공감을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반려견에게 옷을 입히는 마음을 이해하기가 힘들다. 산책길에서 반려견을 만나는 사람들이 혹시나 놀랄까봐, 반려견이 사람들에게 온몸을 노출하는 걸 민망해할까봐, 혹시 추울까봐, 또는 또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옷을 입힌다고, 반려인들은 주장하지만 내 눈엔 그렇게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옷 입은 개들을 어색하게 여기는 건 어쩌면 나의 취향 탓인지도 모르겠다. 사물의 의인화가 지나치게 많은 애니메이션영화를 잘 보지 않으며 (<토이 스토리>는 의인화가 아니라니까요!) 동물이 인간처럼 말을 하는 소설에 몰입하는 걸 무척 힘들어한다. 인간은 인간, 개는 개, 고양이는 고양이, 뱀은 뱀인 작품들을 더 마음에 들어 한다. 개에게 옷을 입히는 건 개를 의인화시키는 것 같아서 보기에 불편한 것이다. 취향의 문제일 수 있다. 어쩌면 반려견들은 옷 입는 걸 실제로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어이, 반려인, 좀더 좋은 옷은 없었어? 요즘 반려견들 사이의 유행이 뭔지 몰라? 공원 나가기 창피해 죽겠어. 이 덜떨어진 도트 무늬는 대체 뭐냐고!” 이렇게 투덜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옷을 입지 않은 개들은 옷 입은 개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따뜻한 걸 부러워할까, 개 멋있다고 생각할까, 개의 자존심을 망각한 개라고 놀릴까, 그냥 그러려니 할까. 아무래도 나는 인간이라서 개의 마음을 읽을 재간은 없다.

2011년에 개봉한 영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이하 <진화의 시작>)에서 가장 흥미진진했던 대목은, 인간의 손에 길러진 주인공 ‘시저’가 유인원들의 무리에 처음 들어갔을 때였다. 인간과 함께 자란 탓에 시저는 인간의 말도 좀 이해할 줄 알고, 인간의 음식을 즐기며 살아왔고, 게다가 인간의 옷을 입고 있었다. 유인원 무리는 시저를 만나자마자 조롱하면서 그의 옷을 찢어서 벗겨버린다. ‘넌 대체 뭐냐, 쪽 팔리게 인간의 옷을 입고 뭐하는 짓이냐?’라며 조롱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시저를 폭행한다. 시저의 고민이 시작됐다. 나는 대체 누구일까. 생긴 건 유인원이 분명했지만 알츠하이머병의 치료제 시미안 플루 탓에 보통의 유인원들보다는 머리가 좋았고, 인간의 품에서 자랐지만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침팬지의 본성이 숨어 있는, 나는 대체 누구일까. 시저는 자신을 길러준 양아버지 ‘윌’에게 수화로 묻는다. “나는 결국 애완동물인 거지?” 윌이 대답한다. “아냐. 넌 애완동물이 아냐. 내가 너의 아버지야.” 다스 베이더의 ‘아임 유어 파더’에 버금가는 의미심장한 대사가 아닐 수 없다. <진화의 시작>은 결국 윌이 입혀준 옷을 벗고 진정한 침팬지로 거듭나는 시저의 성장기인 셈이다.

지구상의 모든 종들 중에서 인간과 침팬지는 가장 많은 DNA를 공유하고 있다. 인간을 하나의 거대한 가족이라 생각한다면, 침팬지는 가장 가까운 친척인 셈이다. 인간과 침팬지의 가장 큰 차이는 (물론 외모도 많이 다르지만) 한쪽은 옷을 입는 존재들이고, 한쪽은 털이 많은 존재들이란 점이다.

데즈먼드 모리스는 <털 없는 원숭이>를 통해서 ‘털이 없어진 우리가 민감한 피부를 노출시키며 에로티시즘 성향을 증가시켰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죽음과 섹스>의 저자인 도리언 세이건은 인간과 가장 닮은 영장류인 ‘보노보’의 예를 통해 데즈먼드 모리스의 가설에 반박했다. 보노보에게는 여전히 수많은 체모가 남아 있지만 (인간의 기준으로 보자면) 인간보다 ‘더욱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것이다. 한참 동안이나 혀로 키스하고, 정상 체위로 성교를 하며, 성관계와 오럴섹스를 인사와 갈등 해소, 화해에 사용한다. 성교는 그들의 언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성교와 언어에 대해서는 조만간, 제대로 다시 한번!).

도리언 세이건은 인간의 체모가 사라진 것은 털이 빠진 돌연변이가 ‘자연에 의해 강력히 선택’됐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탈모로 인해 열 방출이 잘 이뤄졌고, 더운 지방에서 열 방출이 잘 일어남으로써 더 오랫동안 걸을 수 있게 됐으며, 결국은 네발로 걷던 영장류가 두발로 걷게 됐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이다. 인간은 탈모 덕분에 가장 깨끗하게 땀을 흘리는 동물이 됐고, 땀을 잘 흘릴 수 있게 되면서 체온조절도 더 잘할 수 있게 됐다. 뜨거운 침팬지에서 ‘쿨한 인간’으로 바뀐 것이다. 털이 없어지는 게 진화의 방향이라면, 결국 우리 인간들에게 털이란, 흠….

많은 여자들이 (그리고 요즘엔 많은 남자들도) 미용실에 가는 걸 좋아하는 이유는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향수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유인원들은 서로의 털에 붙어 있는 기생충을 골라내며 시간을 보내지만, 인간에게 남아 있는 털이라곤 머리카락뿐이다. 머리카락을 허락하는 것은 무방비 상태로 자신을 노출하는 일이며, 가장 편안한 상태로 휴식을 취하는 일이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감겨줄 때 계속 졸렸던 게, 어머니의 흰 머리카락을 뽑아드릴 때 (따끔따끔 아플 텐데도) 당신이 그토록 좋아했던 것도, 누군가를 귀여워할 때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애정을 표현하는 것 역시, 싸울 때면 서로의 머리카락을 움켜쥐는 것도 (음, 이건 다른 이유일까?)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머리카락은 우리에게 남은 구세대의 마지막 몸인 동시에, 진화의 방해물일지도 모르겠다.

진화란 무엇일까. 2011년 영화 <진화의 시작>의 원제는 <Rise of the Planet of the Apes>이다. 어떤 분이 우리말 제목을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엄청나게 철학적이고 믿을 수 없이 강렬한 제목이다. 유인원 특유의 능력, 예를 들면 나무를 타고 오르고 높은 곳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능력을 여전히 지니고 있지만 시미안 플루 때문에 지적 능력이 향상된 생물체가 바로 ‘진화의 시작’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영장류의 진화 방향이 두뇌의 정교화에 있다고 믿지만, 제목을 지은 분은 ‘운동 능력의 퇴화 없이 두뇌가 정교해지며, 언어를 관장하는 신피질’이 극대화되는 존재가 진화의 미래라고 생각한 것이다. 음, 그럴듯하다.

최근 개봉한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이하 <반격의 서막>)을 보고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진화의 시작>의 감동은 없었으며, 사람이 유인원으로 바뀐 액션물에 지나지 않았다. <진화의 시작>에는 침팬지와 인간에 대한 성찰이 있었지만 <반격의 서막>에는 그저 정치적 입장이 다른 여러 세력만이 있었을 뿐이다. <진화의 시작>에서 애써 시저의 옷을 벗겨놓았더니 다시 인간의 옷을 입혀놓은 격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옷 입은 개가 떠올랐다.

<반격의 서막>의 원제는 <Dawn of the Planet of the Apes>다. 이거 수상하다. (조지 로메로의 작법이 생각나기도 하고) 혹시, ‘일어나서(Rise) 새벽을 맞고(Dawn)’ 다음에는 아침을 맞고, 늦은 아침이 되고, 점심이 되고 그렇게 계속 시간이 이어지는 유인원들의 하루를 다루는 시리즈를 기획한 것일까? 그럼 앞으로 스무편도 넘게 남았겠는데? 마지막 편 <Midnight of the Planet of the Apes>를 살아생전에 볼 수나 있을까. 어찌되었건 다음 편에는 제발 침팬지에게 옷을 입히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시저의 한마디를 인용하겠다.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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