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블랙딜>은 공공재의 민영화가 도래할 경우 우리의 삶이 어떤 위험에 처하는지 조목조목 그리고 무섭게 예시한다. 각종 민영화 시행 이후 폐단을 겪고 있는 7개국의 사례를 차분하고도 설득력 있게 짚어나간다. 이 수긍할 수밖에 없는 ‘교육영화’를 보고 나면 민영화의 문제점에 대해 이렇게 쉽고 흥미롭게 알려주어 고맙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전적으로 그건 이훈규 감독의 역량이다.” 고영재 대표는 그렇게 자주 강조했다( ‘감독 인터뷰’는 961호 참조). 하지만 우린 <블랙딜>의 최초 제안자이면서 기획자이고 제작 내내 든든한 책임자였던 인디플러그 고영재 대표의 말도 듣고 싶었다. <블랙딜>은 수년 만에 기획, 제작자로 돌아온 그의 야심찬 복귀작이기 때문이다.
-“<블랙딜>은 내가 추구하는 영화의 전환점”이라고 밝혔다.
=한동안은 장르 불문하고 좀 될 것 같은 걸 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걸 하는 것이 내가 사는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내가 생각하는 세상, 삶, 이런 이야기만 하고 살아도 앞으로 남은 인생이 짧구나, 하고 느끼게 된 거다. 이제는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 시기가 온 거다.
-하고 싶은 것들 중에서도 민영화 문제에 주목한 건데, 계기가 있나.
=사람들이 지나치게 상부구조에만 관심이 많더라. 다 정치평론가다. 그러는 사이에 정작 중요한 하부구조에 대한 관심은 외면받고 있더라. 본인들의 삶에 천착해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야 하지 않겠나. 실은 이 문제는 2006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투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FTA의 악영향은 이미 이 사회 전반에 스며들어 있고 그중 하나가 민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 민영화 문제에 관해 여러 사람과 의견을 나누면서 내가 직접 프로듀싱하고 제작하는 영화라면 이런 걸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거다.
-영화제작으로 이어진 구체적인 단계들에 대해서도 듣고 싶다.
=2012년 12월 말쯤에 지금은 국회 보좌진으로 있는 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해외의 민영화 폐해 사례에 대한 영화를 만들려면 돈이 얼마나 들겠느냐고 묻더라. 못해도 3억원은 든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말해줬다. 내가 요즘 그런 고민 하고 있는 걸 어떻게 알았나, 내가 한번 고민하고 만들어보겠다. 그렇게 하고 나니 감독으로 이훈규 말고는 떠오르는 사람이 없더라.
-사안을 분류하고 논점을 집중화하는 데 있어서 감독의 능력이 뛰어나다.
=이훈규 감독과는 한-미 FTA 저지 투쟁을 같이 했다. 이훈규 감독 작품에는 파고드는 르포의 맛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전부 집회 현장을 찍으러 다닐 때 이 친구는 치밀한 논리 구성이 담긴 걸 귀신같이 찍어오곤 했다. 기획, 취재 능력이 탁월했던 거다.
-하지만 제작자로서도 분명 의견을 냈을 것이다.
=감독을 한번 믿은 이상 간섭 같은 건 없었다. 죽이 워낙 잘 맞았고. 다만 작업을 처음 시작할 때 이렇게는 제안했다. 영화에 수치가 등장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거 <100분 토론> 아니다, 무조건 피해 사례만 나열하는 그런 것도 지양하자,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구성이다, 민영화에 대해 잘 모르는 평범한 시민들이 봐도 잘 알고 호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때 감독이 속으로 그랬다고 한다. 저 형이 과연 제작비나 다 마련할 수 있어서 저런 소리를 하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웃음)
-해외 촬영이 많기 때문에 제작비가 일반 다큐멘터리보다 훨씬 많이 들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것저것 다 합쳐서 3억7천만원 들었다.
-처음부터 7개국 탐방기를 목적으로 둔 건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아니다. 처음부터 해외사례를 모으는 게 목적이었다. 해외를 다 찍고 국내를 찍을 것이고 어쩌면 국내는 안 찍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이유였나.
=이미 20~30년 전에 민영화를 시행했던 나라를 가서 봤더니 결과는 이렇게 참담하더라,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바로 이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그동안 민영화에 반대해온 국내의 전문가들이 들으면 섭섭해할지 모르지만, 정부와 노동자, 정부와 노조의 싸움이라는 양상으로 가면 백발백중 다 진다. 노조가 열심히 싸워서 민영화를 막는다고 해도 그게 진정으로 막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공공적 목소리를 시민들 스스로가 내는 분위기가 되어야 진정으로 이기는 거라고 봤다. 그러기 위해서 논증적인 해외 사례들이 필요했다.
-맞다, 효과적이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그 사례들을 보고 나니 끔찍하고 두려워지더라.
=우리 마을에서 열심히 상영회 추진한 친구가 그러더라. 이건 호러영화라고.
-민영화에 대해 피상적으로 듣기만 했지 구체적으로 잘 모르는 입장에서는 영화가 쉽고 분명하게 요점을 설명해주니 좋았다.
=그런 점에서 <블랙딜>이 TV다큐 같다는 말을 많이들 하는데 나는 그걸 칭찬으로 듣는다. 정권이 바뀌고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나빠진 것 중 하나가 언론이다. 알아서 기는 데다 쟁점 형성 능력과 취재력도 예전보다 못하다. <블랙딜>이 그걸 대신했다고 본다. 시사회에 언론 종사자들이 꽤 왔었는데, 보고 나서 그러더라. 부끄럽고 미안하다고. 방송이 해야 할 역할을 영화가 지금 대신하고 있다고.
-그런데 한편으론 한국적 블랙딜(관과 민간 업체 사이의 검은 거래)에 대한 부분이 더 거론됐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의견들이 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민영화 다큐를 찍는다면 다소 다를 수도 있겠다. 익히 알고 있는 사실들 안으로 더 밀도 있게 들어갈 수도 있을 거다. 최근에 밝혀지지 않았나. 철도공사 비리에 대해서. 하지만 <블랙딜>을 시작할 당시에는 그런 드러난 것들이 다소 부족했다. 그리고 1년 안에 끝내자는 계획도 있었고. 해외 사례를 모아서 다가올 위험을 직시하도록 하는 게 더 중요했다.
-의료민영화에 대한 내용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의견도 있는데.
=전적으로 맞는 지적이다. 한계라고 인정한다. 그런데 이제 그 문제들에 대해서는 한계를 짚어주는 그분들이 찍으면 된다. (웃음) 결코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블랙딜>이 문제제기를 했으니 그걸 바탕으로 더 나아가 달라는 뜻이다. 사실상 의료민영화의 경우는 이 문제에 얽혀 있는 주체들의 취재 협조가 원활하지 못했다. 쟁점을 잡기 위해서 여러 가지 제보를 부탁했는데 주체가 되는 의사들이 인터뷰에 응하는 걸 무척 꺼렸다. 말하자면 의료민영화라는 쟁점에 대해 우리가 알고는 있지만 그걸 영상으로 표현해내기에는 영상 소스들이 부족했다. 그래서 실은 <블랙딜>이 잘되면 이 영화를 기반 삼아 의료, 물, 가스 등 각각 분야별로 파보려고 했는데….
-현재로선 손익분기점에 한참 못 미치는 관객수다. 좀 힘든 시기겠다.
=솔직히 힘들다. 다른 것보다 정신적으로 힘들다. 왜 안 보는 걸까 하는 생각에.
-공동체 상영회 등은 어떤가.
=그건 벌써 80여 차례 넘어섰다. 힘들다가도 이런 걸 보면 기쁘다. <블랙딜>을 갑자기 부가판권으로 팔아넘기지 않겠다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하면 민영화에 대한 문제는 토론화되지 않고 소비되고 그저 잊히는 거다. 어느 날부터 갑자기 민영화에 대한 쟁점이 불붙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올해 지나 내년을 지나 그리고 훗날 다가올 대선까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질 문제다. 그런 과정에서 누군가 교육하고 세미나를 해야 할 때 <블랙딜>은 좋은 영상 교재가 될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짧게 보지 않고 길게 보려고 한다. 많은 이들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거다. 아, 이들이라면 믿고 봐도 되겠구나 하는 제작 주체로서의 신뢰감을 얻기를 기대한다. 관객의 수치만으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긍정적인 면모들, 그런 게 바로 일종의 제작 집단에 대한 관객의 신뢰도 아니겠나.
-이훈규 감독은 물 분야에 대한 다큐를 이미 준비 중이라고 하던데.
=개봉용은 아니다. 인디플러그에 의뢰가 들어온 걸 이훈규 감독 개인에게 전달한 거다. 말그대로 교육용 30분짜리 다큐다.
-얼마 전에는 “대한민국 노동조합을 화두로 한 작품을 찍고 싶다”고도 했다. 그 생각은 어떻게 되어가나.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에 대한 거다. 하지만 대한민국 노조 전체를 말하게도 될 거다. 전교조가 결성된지 거의 25년 됐다. 그리고 2014년 들어 법외노조 판결을 받았다. 전교조의 역사가 대한민국 역사의 한 단면을 표현하는 거라고 본다. 인터넷 댓글들을 보면 참 이상하다. 그래도 민영화의 경우에는, ‘민’자만 나와도 그건 안 되지 하는 반응들이 꽤 많이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 부류에 대해서는 안그렇다. 진보의 ‘진’짜만 나오면 빨갱이 운운한다. 또 하나가 전교조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전교조가 법외노조 판결을 받았는데도 반응들은 대개 이렇다. 그게 뭐? 이것이 우리의 현재 모습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노동조합 만세? 그런 거 아니다.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기 위해서는 이 시점에 한번쯤 이 문제를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리서치를 해볼 생각이다. 인기 없는 다큐가 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영화가 될 거다.
-그 밖의 다른 프로젝트들은.
=구상 중인 극영화가 있다. 교사의 성장과 부모의 성장이 주제가 될 것 같다. 경쟁 논리에 휘둘린 모순된 부모, 전문성을 갖추고자 하나 더디게 성장할 수밖에 없는 교사에 대한 이야기랄까. 하지만 이건 시간을 두고 좀더 영글어야 할 주제다. 아직 구상만 있다.
-또 다른 건.
=<열세 번째 아이>라고 국내 소설이 있는데,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을 준비 중이다. 생명공학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우성인자들만 결합해서 아이를 만든다든지 그 아이 곁에 감정을 지닌 감정로봇이 있다든지 하는. 그런데 가만히 보면 여기에 계급 문제가 빠지질 않는다. 자본주의적 모순을 말할 여지가 있다. 그래서 원작에 충실하되 각색 작업을 열심히 해서 빨리 시나리오를 탈고하는 게 목표다.
-이런 이야기로 마쳐보자. 얼마 전에는 페이스북에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제가 하겠습니다” 시리즈를 제안했다(최근 영진위 위원장 최종 후보로 두 사람이 올랐다. 그중 강력한 후보로 지목되고 있는 한 사람이 영화계와는 거의 관련없는 인물인 걸 두고 고영재 대표는 그 부당함을 지적하기 위해 일종의 풍자 퍼포먼스를 벌였다).
=성명서 내는 건 너무 재미없다. 안 그런가? 똑 같은 글에다 이름 얹는 건 지루하기도 하고 따분하기도 하고. 기대한 건 이런 거였다. 나 촬영 10년차다, 내가 저분보다 영화계에 대해 더 잘 아니까 내가 하겠다. 나 영화기자 10년차다, 그분께서는 영화기자 2년 했다면서, 그럼 차라리 내가 하겠다. 뭐 이렇게 풍자적으로 이어지기를 바랐던 거다. 사람이 그렇게도 없는지, 그걸 비꼬고 싶었던 거다.
-주변 반응 중 가장 재미있었던 건 뭔가.
=음… 얼굴이 잘생겼으니까 영진위 위원장 그냥 네가 해라 하고 말해준 거? (웃음)
<블랙딜>이 얼마나 훌륭한 영화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을 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블랙딜>이 민영화라는 우리의 긴급한 공공적 쟁점을 냉정하고 정확하게 지적하는 영화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을 더하기 어렵다. 이 영화는 누군가에게 비범하지 못할지라도 모두에게 필요한 영화다. 관객의 반응과 답변이 당장에 조금 모자라고 느리더라도 그렇다. 그건 고영재 대표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최근에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다큐멘터리 제작자는 늘 기다려야 한다. 진중하게 질문하되 답변의 시한은 늘 가변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신이 조급하면 모두가 조급해진다.” 긴급한 것을 다루되 조급해지지 않을 것. 어쩌면 그게 지금 막 영화의 전환점을 돌아선 그의 화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