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영화제] 유럽과 할리우드, 영화로 여행하기
2014-07-30
글 : 박인호 (영화평론가)
영화의 전당 시네마테크 여름 기획전 ‘서머 스페셜 2014’

영화의 전당에서 계절에 걸맞은 특별전이 상영된 지 세 번째 여름을 맞았다. 특별전의 이름은 조금씩 달라져도 바캉스 느낌을 주는 영화들, 연인들에 대한 영화, 지중해나 아름다운 도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상영되었다. 올해의 특별전인 ‘서머 스페셜 2014’가 준비한 여행의 간단한 가이드를 시작하려고 한다. 기간은 7월29일부터 8월27일까지다. 먼저 ‘프렌치 미스터리’ 섹션은 애거사 크리스티, 건조한 심리소설의 대가인 조르주 심농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들로 채워진다. 1940년대 작품부터 2013년에 만들어진 <호수의 이방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감독들이 포착한 미스터리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두 번째 섹션인 ‘북구방향’은 북유럽의 차가운 겨울과 서늘한 여름의 풍광을 느낄 수 있는 영화들인데 죽음도 불사한 사랑을 다룬 <엘비라 마디간>(1967)을 비롯해 소년 펠레의 눈동자가 영원히 각인된 <정복자 펠레>(1987), 소녀들의 사랑과 성장을 다룬 <쇼 미 러브>(1998), 여성감독이 만든 최초의 도그마 영화인 <초급자를 위한 이태리어>(2000), 복수와 용서라는 테마를 심도 깊게 파헤친 <인 어 베러 월드>(2010), 사실적인 터치로 약물중독자의 내면을 관찰하는 <오슬로, 8월 31일>(2011)을 상영한다. 마지막으로 ‘마음의 행로’에서는 1980년대 할리우드의 다양한 멜로드라마를 만날 수 있다. 현재 왕성한 활동을 하는 연기자들의 앳된 얼굴과 풋풋함도 눈길을 끄는데 숀 펜, 피비 케이츠, 데브라 윙거, 에드 해리스, 존 말코비치, 리버 피닉스의 연기를 경험할 수 있다. 할리우드와 다른 리듬을 가진 프랑스 미스터리, 북유럽을 배경으로 한 다양한 삶의 방향으로의 여행이 또 다른 지도로 옮겨지기를 기대한다.

<패닉>
1930년대의 시적이고 우아한 이미지와 비관적인 세계관이 응축된 <망향>(1937), <무도회의 수첩>(1937)을 만들었고 <나의 청춘 마리안느>(1955)로 유명한 줄리앙 뒤비비에의 1946년 작품이다. 조르주 심농의 소설을 샤를 스팍과 뒤비비에가 각색했다. 작은 마을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을 둘러싼 조사과정보다 젊음과 늙음, 거짓과 진실, 방종과 지혜, 유혹과 충고의 심리극에 중점을 두고 진행되는 이 영화는 타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배타적인 집단에 의해 궁지로 몰린 개인의 죽음을 다루고 있다. 부서진 카메라와 비로소 드러나는 진실의 순간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놀이기구와 요란한 음악에 묻히는 마지막 시퀀스는 인간의 위선과 추악함을 압도적으로 드러낸다.

<고양이>
<암흑가의 두 사람>(1973)을 본 관객은 나이 들어도 프로페셔널하고 멋진 모습의 장 가뱅을 기억할 것이다.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페이르 그라니에-드페르의 <고양이>에 등장하는 가뱅은 퉁명스럽게 아내를 쳐다보거나 대화조차 거부하는 고약한 노인이지만 그 매력은 여전하다. 철거촌에 노부부가 살아가는 낡아빠진 집이 있다. 식어버린 사랑으로 혐오와 경멸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이들의 시한부적인 삶은 소음 가득한 파괴의 현장과 연계되면서 단순한 부부간의 단절을 넘어서는 감정을 보여준다. 오랜 시간을 견디고 살아왔지만 냉소를 벗어날 수 없는 노인들이 다가올 죽음만 기다릴 때, 25년이란 세월이 함부로 내쳐질 것이 아님이 문득 드러나는 장면은 쓸쓸함을 불러온다. 시몬느 시뇨레와 가뱅의 노년의 연기만으로도 충분히 설득력을 지니는 영화다.

<생 폴의 시계상>
베르트랑 타베르니에의 70, 80년대 걸작은 주로 프랑스 문화원에서 상영되었을 뿐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생 폴의 시계상>은 사실주의적인 태도로 동시대 프랑스인의 사회적인 문제와 개인의 관계를 관찰한 타베르니에의 장편 데뷔작으로, 살인을 저지른 아들을 통해 정치적으로 의식화되어가는 아버지의 심리를 묘사하고 있다. 또한 사회비판적인 시선을 통해 현대인의 소외, 타자와의 관계, 역사와 사회적 관습에 대한 반성적인 시선을 보편적인 이야기 구조로 포착하는 타베르니에의 연출력을 엿볼 수 있다. <판사와 살인자>(1975), <7일간의 휴가>(1980), <대청소>(1981), <시골에서의 일요일>(1984)을 통해 도덕적으로 우월한 계급이라는 허위에 대한 비판, 교육의 현실, 제국주의의 악몽, 예술과 시간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었던 타베르니에의 진솔한 영화를 기억하는 관객에게 권한다.

<호수의 이방인>
<도주왕>(2009)의 초록색 숲과 아늑한 오두막집을 거쳐 알랭 기로디가 호숫가에 도착했다. <호수의 이방인>은 필사적인 도주를 통해 해방과 자유, 그럼에도 도달하지 못했던 파라다이스를 한적한 만남의 장소로 옮겨왔다. 외로움과 고립이라는 원초적인 감정 상태가 사랑을 나누는 숲속, 아름답고 나른한 햇살이 넘치지만 죽음의 흔적조차 무화시키는 호숫가를 번갈아 보여주며 기묘한 서스펜스를 만들어낸다. 현재 프랑스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직관적인 감독이라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듯, 사랑과 열정이 공허함으로 변하고 친밀함이 후미진 곳으로 버려질 때의 서늘함을 포착하는 기로디의 힘은, 유머러스함이 실존의 험난함과 인접하고 일상의 고요함과 우발적인 사건이 한 인물, 한 장소에서 벌어질 때 위력을 발휘한다.

<정복자 펠레>
잉마르 베리만 이후 스웨덴을 대표하는 빌 어거스트의 대표작이다.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해준 이 작품은 19세기 덴마크로 이민을 떠난 가난한 부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름다운 촬영과 음악, 섬세하고 디테일한 연기와 차분한 연출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이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성장기 소년의 좌절과 실패, 늙은 아버지가 겪는 수치심과 회한의 시간을 묘사하는 방법이다. 어거스트는 감정의 극대화된 표출보다 잠자코 숨을 죽일 수밖에 없는 침묵과 흐느낌, 하얀 눈에 덮인 가난과 죽음을 겪으면서 하나씩 깨닫게 되는 세상의 잔혹한 법칙을 무심코 드러내고 있다. 그렇기에 마지막에 펠레가 아버지의 곁을 떠나 바다를 향해 걸어갈 때 소년의 발걸음에서는 통렬함마저도 느껴진다.

<킬러들의 도시>
<킬러들의 도시>가 포착한 벨기에의 브루게는 여타의 도시 영화들과 달리 그 도시만의 풍광을 직접적으로 전시함으로써 아름다움과 기억을 자극하는 방식을 채택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딕양식의 건축물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죽음의 그림자에 집중하고 있다. 브루게로 피신한 킬러들은 도처에서 출몰하는 죽음의 흔적, 마약과 술로 인한 환각과 고딕적이고 우울한 판타지를 거쳐 자신들의 죽음에 이르게 된다. 플랑드르파의 대표적인 화가인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최후의 심판>과 똑 닮은 그들의 심연, 모순적인 룰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 아이러니한 인간의 운명을 보여준다. 관광지로서의 도시가 아닌 죽음과 삶의 카니발을 보고 싶은 관객에게 추천한다.

<오슬로, 8월 31일>
뭉크의 고통과 절망, 입센의 비판적인 시선과 일상의 삶이 결합한 듯한 <오슬로, 8월 31일>은 약물중독자의 하루를 관찰하는 카메라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영화다. 도시의 아름다움과 넘쳐나는 여름의 빛조차 자신에 대한 동정심과 자기비하로 이어가는 주인공의 흔들리는 심정과 그가 만나고 바라보는 도시인의 일상적인 삶의 현장이 정밀한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포착된다. 느슨한 리듬으로 이루어진 대화 장면과 서서히 인물에게 접근하는 카메라의 섬세한 다가섬은 삶의 희망과 절망, 재능의 낭비와 빛바랜 영감, 보잘것없는 자신에 대해 한계를 느끼는 우리를 되비춰보는 거울과도 같다. 기억과 현실, 우울함과 노스탤지어가 서로에게 침투하는 과정은 음울함과 씁쓸함을 자아내지만 삶은 지속될 것임을 드러내는 결말에서는 처연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애정의 조건>
제임스 L. 브룩스의 데뷔작인 <애정의 조건>은 가족 멜로드라마의 새로운 모범을 제시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스텔라 달라스>(1937), <슬픔은 그대 가슴에>(1959)가 모녀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영화라면 이 영화는 친구와 이웃으로까지 삶의 자리를 확대하고 있기 때문에 지리적, 심리적 거리감을 통해 관계의 친밀함과 멀어짐을 드러낸다. 깨어진 가족, 죽음으로 인한 이별이라는 삶의 순환적인 순간들을 삶의 리듬에 정통한 영화적 표현으로 채운 이 작품을 살리는 것은 시나리오의 교본 같은 정교한 각본과 편집증과 강박증을 지닌 괴팍한 인물들을 귀엽게 표현할 수 있는 생생함이다. 장례식 시퀀스에서 느껴지는 후회와 뉘우침, 삶의 비애가 마당에 모여 앉은 사람들 사이를 흐를 때 문득 살아감의 순간을 깨닫게 될지 모른다.

<마음의 고향>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의 각본을 쓰면서 할리우드에 입성한 로버트 벤튼이 각본과 연출을 겸한 영화로 자신의 고향인 텍사스를 배경으로 만들었다. 1930년대 공황기의 시대적인 결핍, 인종차별과 흑인 린치, 토네이도로 파괴된 마을, 첫 목화 수확 등의 사건이 벌어지는 동안 작은 공동체의 균열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삶의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여인과 그녀를 도와주는 헌신적인 흑인, 앞을 보지 못하는 1차 세계대전 참전군인이 새로운 가족을 이루어가는 과정에는 공황기를 바라보는 여타의 영화들과 다른 따뜻한 시선이 흐른다. 이 영화는 감사기도로 시작해서 성찬식으로 끝을 맺는데, 이 시퀀스가 감동적인 이유는 사랑과 평화를 염원해 모인 자들의 얼굴 때문이다. 흑인에 대한 차별도 없고, 죽음이나 미움도 없는 평화의 공동체가 포도주와 떡을 나누는 표정과 섬세한 손길은 어떤 말보다도 뭉클함을 선사한다.

<스탠 바이 미>
1959년의 여름 어느 날, 모험을 떠난 소년들의 이틀간의 여정을 담고 있는 이 영화는 소년기의 억압과 악몽, 깨달음과 성장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시체를 찾는 모험보다 감독 롭 라이너가 중점을 둔 것은 작은 마을을 벗어난 적 없는 소년들이 어딘가 있을 삶과 꿈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다는 사실이다. 산길, 강가, 철길을 따라 걸으면서 소년들은 어느새 세상을 발견하고 자신을 둘러싼 억압적인 것들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리버 피닉스를 비롯한 어린 배우들의 얼굴에 깃든 해맑은 웃음, 그 사이로 보이는 그늘과 마주할 때,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넘는 피닉스의 존재가 그리워질 것이다. 어떤 영화보다 절실하게 울리는 동명의 주제곡 <Stand By Me>도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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