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에 벌어졌던 연쇄살인, 일명 지존파 사건을 계기로 1990년대 초 한국 사회상을 돌아보는 다큐멘터리 <논픽션 다이어리>. 단숨에 눈을 사로잡는 출연자가 한명 등장한다. 전 서초경찰서 강력계 반장 고병천씨, 지존파를 검거한 장본인이다. 76년에 순경으로 입문하여 강력계 반장까지 올랐던 입지전적이고 유능한 인물. 게다가 그는 삼풍백화점이 붕괴되던 그날 그 현장에도 있었다. 90년대 한국 사회의 거대한 두 사건을 통과해온, 그리하여 영화에 예기치 못한 긴장의 바람을 불어넣은 그는 과연 베테랑 형사답게 묵직하고 정중하면서도 어딘가 매서웠다.
-어떻게 이 영화와 연을 맺게 된 건가.
=내가 서울영상위원회에서 형사물 관련하여 감독과 제작자를 상대로 강연을 좀 했다. 그러다보니 영화 관계자들이 제작과 관련하여 이런저런 의뢰를 많이 해왔다. 정윤석 감독의 경우는 석사 논문 제출용으로 지존파 사건을 다루고 싶다며 찾아왔었다. 학문적인 것이니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했다.
-영화에 잠깐 설명이 나오지만… 어떻게 서초경찰서 소속 형사가 전남 영광의 사건을 맡게 된 건가.
=내가 다니던 카페가 하나 있었다. 당시에 지존파로부터 탈출했던 이모 여인이 거기 종업원이었다. 그가 탈출해서 카페 주인을 불렀고, 카페 주인이 나를 찾은 거다. 처음에는 안기부(현 국가정보원)에 신고해야 한다고 했다더라. 그럴 만도 했다. 걔네들이 다이너마이트, 총 등을 갖고 있었거든. 처음에는 나도 믿기지가 않았다. 그런데 당시에 신고 접수됐던 실종사건의 정황을 말하기에 아, 사실이구나 했다.
-검거 당시 상황은 영화에 대략 나온다. 혹시 들려주지 못한 다른 이야기는 없나.
=지존파라는 이름은 내가 붙여준 거다. 나중에 일원 중 하나인 강동은이 나에게 여러 번 편지를 썼는데, “반장님, 저희는 이제 지존파가 아니라 하늘나라파입니다” 하고 썼더라. 기독교나 천주교에 귀의했다고 하면서.
-원망 대신에?
=검거 당시에는 내가 많이 혼냈지만 나중에는 잘해줬거든.
-반면에 고 반장님이 삼풍백화점 사고 현장에 있었던 건 감독도 인터뷰를 하면서 알았을 거다.
=그렇다.
-그날의 피해자가 될 뻔도 했다던데.
=경찰서 바로 옆이라 삼풍백화점 4층에서 손님을 자주 만났다. 그런데 그날따라 손님이 올라오기 싫다고 해서 옆 골목 지하 다방에서 차를 마셨다. 그러고 나왔는데 무너진 거다. 양쪽 벽은 멀쩡하고 가운데만 무너졌는데, 안에 들어가보니… 어렸을 때 본 지옥도를 생각하면 똑같다. 손 닿는 대로 구하다보니 찌그러진 엘리베이터 안에서 살려달라는 소리가 들리더라.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무진 애를 썼는데 결국 못 살렸다. 그게 내내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90년대 강남, 서초, 특히 압구정은 어떤 상징이었는데, 별별 사건이 다 있었을 것 같다.
=앙드레 김 의상실 협박사건이 있었다. 외항 선원 하나가 앙드레 김 앞으로 권총 한 자루와 실탄을 보냈다. 자기한테 권총이 한 자루 더 있는데 2억원을 안 내놓으면 그 총으로 해코지를 하겠다고. 가방에 돈이 든 것처럼 속이고 렌터카에서 빌린 추적기를 달아 검거한 적이 있다.
-영화 속에서 지존파나 삼풍백화점 운영권자나 종류가 다를 뿐 내용상으로는 차이가 없다고 강력히 비판했다. 그 말이 인상 깊었다.
=지존파 애들은 10억원을 벌겠다고 사람들을 죽였다. 삼풍백화점 피의자들은 수조원을 벌려다가 그런 사고를 냈다. 사고 3일 전부터 급격한 징후가 있었고 그걸 아는 상인들은 아예 나오지도 않던 때다. 그런데도 백화점이 수익에 대한 욕심 때문에 운영을 강행한 거다. 사망자만 500여명이다. 그런데 지존파 애들은 사형을 당했고, 삼풍 피의자들은 7년형을 받았다. 누가 더 질이 나쁘다고 말할 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