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언더 더 스킨>과 영화 <언더 더 스킨>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의 달인을 소개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수십년간 산속에서 혼자 살며 생활하는 사람이 나온 적이 있다. 마당에 솥을 걸어놓고 밥을 지은 다음, 텃밭에서 갓 뽑아낸 오이와 고추와 방울토마토 등을 함께 먹는 게 주식이었다. 다른 반찬은 아무것도 없고, 소금이나 간장, 고추장도 없이 밥과 채소만 먹으며 생활한다는 것이었다.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일까.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제작진이 희한한 행동을 했다. 달인에게 작은 선물을 해주고 싶다며 라면을 끓여준 것이었다. 과연 그게 옳은 일이었을까, 고개를 갸웃거릴 새도 없이 화면 가득 환하게 웃고 있는 달인의 표정이 보였다. 눈물이라도 곧 흘릴 것 같았다. 라면은 10년 만이라고 했다. 라면을 맛있게 먹은 달인은 취재진에게 삶은 감자를 내주었다. 취재진의 기습 질문. “라면이 좋아요, 감자가 좋아요?” 달인은 멋쩍은 얼굴로 대답했다. “옛날에는 몰랐는데요, 지금은 라면이 좋네요.”
아마도 달인에게 라면은 특별한 음식이었을 것이다. 달인은 라면만 끓여 먹을 수밖에 없었던 시절에 대해 잠깐 얘기했다. 라면을 보는 순간 그 시절이 떠올랐을 것이고, 라면을 먹는 순간 그 시절의 공기를 함께 마셨을 것이다. 음식에는, 특히 라면과 같은 자극적인 음식에는 맛과 함께 추억을 밀봉하는 특별한 기능이 숨어 있게 마련이다.
외할머니의 죽음을 떠올리면 나는 돼지고기가 떠오른다. 외할머니의 장례 때 외갓집 마당에서 숯불에다 구워 먹었던 삼겹살의 쫄깃한 맛이 떠오른다. 외할머니의 죽음이 슬펐지만 고기는 달고 달았다. 불고기만 보면 나는 고향집이 떠오른다. 대학 때 대구에서 자취를 했는데 일주일에 한번 김천 고향집에 갔다. 기차역에서 내려 집으로 갈 때면 늘 불고기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매일 밥을 거르고 다닐 게 뻔하다는 어머니의 판단 때문에 (정확하십니다!) 거의 매주 불고기를 해놓으셨다. 삼청동에만 가면 닭고기가 생각난다. 삼청동의 친구 집에 얹혀살던 시절, 나는 집에 들어가기 전이면 늘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뭐 필요한 거 있냐?” 친구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프라이드치킨.” 동네의 닭집은 하나뿐이었고, 집에서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나는 얹혀산다는 미안함을 늘 프라이드치킨으로 보상했다. 도대체 닭을 몇 마리나 먹었을까.
육식은 자극적이다. 씹고 뜯기 때문에, 우리와 비슷한 어떤 동물을 먹는 것이기 때문에 자극적일 수밖에 없다. 한달 동안 채식을 해본 친구가 이렇게 말했던 게 기억난다. “채식의 좋은 점이 뭔 줄 알아? 채식을 하고 나면 고기가 훨씬 더 맛있다는 거야.” 웃자고 하는 말이겠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농담이다. 육식이냐 채식이냐는 어려운 문제다. 비참하게 사육되는 동물들의 모습을 볼 때나 인간들의 이기심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동물들을 알게 됐을 때, 당장 육식을 끊고 싶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육식의 시간에 길들여져 있고, 고기의 맛에 중독돼 있다.
소설가 조너선 사프란 포어는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육식과 채식을 나누기 전에 과연 ‘동물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부터 해결해야 된다면서 인류학자 팀 잉골드의 사례를 소개한다. 사회 문화 인류학, 고고학, 생물학, 심리학, 철학, 기호학을 공부하는 각각의 집단들과 다양한 학자들에게 ‘동물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졌지만 모든 집단을 충족시켜줄 만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모든 학자들이 ‘동물’이라는 단어를 파고들수록 결국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민감한 소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과 동물을 구별짓기 위해서 ‘짐승’이라는 말을 만들어냈고, 동물보다 우월한 존재임을 입증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살생을 저지르고 있다.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한 미헬 파버르의 소설 <언더 더 스킨>은 (조금 과장하자면) 육식 외계인과 채식 외계인의 대결을 다룬 소설이다. 과연 인간이란 무엇이며, 살아 있던 동물의 고기를 먹는다는 게 어떤 일인지 일깨워주는 소설이기도 하다. 외계인들은 포획해온 인간들을 (마치 우리가 푸아그라를 먹기 위해 거위를 사육하는 것처럼) 집중 사육한 다음 스테이크로 팔아치우는데, 재미있는 건 소설에서의 호칭법이다. 외계인들은 자신을 인간이라 부르고 기존의 인간을 보드셀(vodsel)이라고 부른다. 작가가 네덜란드 사람인 점을 감안했을 때 보드셀은 아마도 네덜란드 말 보드셀(voedsel)을 가리키는 것일 테고, 이 단어의 뜻은 ‘음식’이다. 그러니까 외계인들은 걸어다니는 인간들을 ‘음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주인공 이설리는 걸어다니는 ‘음식’들을 자신의 커다란 가슴으로 유혹한 다음 납치하는 일을 맡고 있다. 이설리가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장면에서 이런 대목이 나온다. “진열대에서 먹을 것을 골라보았다. 종류는 ‘핫도그’, ‘치킨 롤’, ‘비프 버거’ 등 세 가지였다. 세 가지 모두 하얀 종이로 포장되어 있어 내용물이 보이지는 않았다. 이설리는 치킨 롤을 골랐다. 텔레비전에서 쇠고기는 위험하다, 심지어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보드셀이 죽을 정도라면 자신은 어떻게 될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핫도그는… 불과 며칠 전에 개 한 마리를 살리려고 상당한 수고를 아끼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개를 먹는다는 건…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다.”
소설에서는 사육된 인간을 도축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이 장면이 너무나 끔찍해서 도저히 영화를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읽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영상으로 보면 열배는 끔찍할 것 같았다. 그래도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흠, 스칼렛 요한슨이 전라 연기를 감행했다고 해서는 절대 아니고, 외계인들의 묘사가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내 기대를 무참하게 무너뜨렸다. 무섭기는커녕 아름다웠고, 한없이 느릿느릿했다. 마지막에 아주 잠깐 외계인의 모습이 등장하긴 하지만 내 기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누구에게나 추천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니지만 소리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는 추천하고 싶다.
영화 <언더 더 스킨>은 소설 <언더 더 스킨>보다 훨씬 청각적이다. 이상한 말 같지만 영화 <언더 더 스킨>은 소설의 사운드트랙 같은 모습이다. 소설에서 외계인이 ‘바라보는’ 지구를 강조했다면, 영화에서는 외계인이 ‘듣는’ 지구를 강조했다(수많은 뮤직비디오를 만든 감독이었기에 이런 영화가 가능했을 것이다). 실제 외계인들은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다. 지구상에도 보는 것보다 듣는 게 중요한 동물들이 많으니, 외계인들 역시 그럴지도 모른다.
어떻게 먹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고민하고 있는 문제다. 나 역시 그렇다. 살아 있기 위해 살아 있는 것을 먹지만, 잘 살아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언더 더 스킨>의 영화 버전과 소설 버전은 무척 다르지만, (당연하게)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메시지는 비슷하다. 소설 속 한줄의 대사가 그 메시지를 압축하고 있다. “한 꺼풀만 벗기면 모두 다 마찬가지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