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원의 피카추]
[김정원의 피카추] 책을 사랑한 죄
2014-08-14
글 : 김정원 (자유기고가)
<내 남자는 바람둥이> <브리짓 존스의 일기> <행복한 사전> 등에서 찾아본 편집자의 도(道)
<브리짓 존스의 일기>

몇년 전에 어떤 철학자가 책을 내면서 편집자 이름을 표지에 올렸다. 오옷, 드디어 음지의 편집자들에게도 양지의 빛이 드는 것인가! 기쁘다 구주 오셨네! 선생님, 대박 나세요! … 했을 리가. 우리는 그냥 시큰둥했다. 그 사람은 “편집자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인문사회 출판 시장의 부흥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지만, 그보다는 그냥 월급을 높이는 것이 출판(시장은 아니고)의 부흥에 도움이 된다. 나도 원고료 두배로 주면 두배로 열심히 쓴다고, 널 놓치고 싶지 않아.

근데 진짜로 진짜는 그게 아니었다. 그때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은이의 심부름 또는 출판사 대표의 지시를 이행하는 데 그치는 다른 편집자와 달리 000씨는 편집자 정신이 뚜렷한 사람”이라고 했다. 편집자 한명을 높이느라 만명을 낮췄군. 우리는 비웃었다. 출판사 대표가 지시하는 대로 책을 만들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줘야겠다. 얘, 삼월아, 철학 에세이 표지에 꽃 그림 한번 실어드려라, 옆엔 과일도 놓고.

하지만 지은이의 심부름을 한다는 게 영 틀린 말은 아니다. 내가 아는 편집자는 지은이도 모자라 지은이의 오빠와 어머니와 남자친구와 대학 시절 은사 심부름까지 하고 있다(이렇게 쓰고 보니, 이름만 ‘지은’이인 세상의 모든 지은이에게, 미안하다!). 문제는 편집자가 심부름만 하는 게 아닌데 저자들은 그것만 기억한다는 거다. 왜 아니겠어, 공짠데.

그처럼 저자들은 기억력이 나쁘지만 편집자들은 기억력이 좋다. 그래서 해묵은 원한을 간직한다. “편집자 정신이 뚜렷”하다(고 한국의 저자들이 흔히 주장하)는 대국의 편집자들이라고 다를 게 없다. 제목만 봐서는 남자 낚는 영화인 것 같지만 원래는 젊은 출판 편집자의 성장기(인 척하지만 알고 보면 한국어 제목이 딱)인 <내 남자는 바람둥이>의 브렛(사라 미셸 겔러)은 자신이 기획한 책을 받아들고 실망한다. 그 책에 1년 반을 쏟았는데 감사의 말 한마디가 없다는 거였다. 철없는 브렛, 해맑은 브렛. 아직 쓴맛을 덜 봤지.

V. S. 나이폴, 존 업다이크, 노먼 메일러, 필립 로스 등의 (중기작도 아니고) 초기작들을 출판한 유능한 영국 편집자 다이애나 애실의 증언을 들어보자. 저자가 반항하는 걸 무시하고 애실이 거의 모든 문장을 고쳐서 훌륭한 서평을 받은 저자가 신문을 읽고 편지를 보냈다. “이 서평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내 문장은 나무랄 데가 없었어요. 나도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이 글은 거의 60년이 지난 다음에 애실의 자서전에 실렸다. 그러니, 편집자의 집착을 우습게 보지 말라. 대부분 편집자는 성실하게 자료를 모으고, 나처럼 게으른 나머지 편집자들은 자료를 버리는 게 귀찮아 어쩔 수 없이 모은다.

<미스 포터>

이처럼 사장과 저자라는 2대 공적과 그외 다수 잔챙이 적들에게 시달리는 편집자들이지만 낙이 없는 건 아니다. 옛날엔 몰랐던 사실을 문득 깨달았는데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브리짓은 출판사 편집자였다. 그런데 편집장이 휴 그랜트, 돈이 많아 보여! 드라마 <반짝반짝 빛나는>은 편집장이 김석훈, 엄마가 큰손이야! <미스 포터>의 베아트릭스 포터 담당 편집자는 이완 맥그리거, 사장 동생이야! 그건 전부 판타지라고? 아니다. 역시 내가 아는 편집자는 중매를 서겠다는 사장에게 시달리고 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선보라는 남자가 사장 아들이다. 그리고 이건 분명한 불행인데, 아들 얼굴이 사장하고 똑같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사장 얼굴을 평생, 그것도 두개나 보고 사는 건 싫다고.

하지만 편집자 최대의 낙은 역시 좋은 책을 내는 것이다. 영화 <행복한 사전>의 사전 편집자 마지메(마쓰다 류헤이)는 번듯한 사전 하나 만들겠다며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단어만 정리하면서 사는데, 그럴 때까지 내는 책이 진짜로 사전 딱 한권이다. 그렇다고 그가 불행한가, 아니다. 불행이라는 건 사장 친구 책을 내느라 수십년 살아온 나무 수십 그루 분량의 펄프를 낭비하는 거고, 어느 전 대통령에 관한, 그 집권 기간만큼이나 기나긴 전집을 만들고 나서 헛되이 흘러간 청춘을 탄식하며 출판사를 떠나는 거다.

짧은 편집자 생활을 마감하게 만든 수많은 사건 중엔 이런 게 있었다. 진행 중이던 책의 저자가 저장을 잘못해서 원고를 날렸다(내가 편집하는 책의 원고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정원씨가 찾아줘.” “아, 네… 네?” 선생님, 제가 빌 게이츠도 아니고, 네트는 광대하다는데(아, 네트하고는 상관없는 건가), 어딜 가서 원고를 찾아오라는 말씀입니까. 차라리 도성 사대문 안에 사는 김씨를 데려오라 그러세요. 아니면 제가 그냥 한편 써드리면 안 될까요? 어차피 글도 잘 못 쓰잖아요, 사장하고 친해서 책 내기로 한 거잖아요, 징징징.

<행복한 사전>

그 숱한 말을 가슴에 묻고 나는 말했다. “용산에 한번 가보시면….” “용산에 가면 뭐가 있나? 그리고 여기 일산인데?” 나는 역삼동이다, 이놈아. 결국 나는 역삼동에서 일산까지 가서 노트북을 받은 다음 구로동 집으로 퇴근해 다음날 도로 일산으로 가서 용산에 갔더니 방법이 없더라는 거짓말과 함께 돌려주었다. 그러고 얼마 뒤에 내 책상도 사장에게 돌려주었다.

며칠 전에 나는 매우 양심적인 책 한권을 만났다. 진실을 위해 목숨을 걸어온 청춘이 썼다는 자서전이었다(저자인 ‘청춘’ 논객이 고소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제목은 밝힐 수 없다). 홍보용으로 받은 책을 읽고 나니 뭐지, 이 가내수공업의 느낌은. 남 시키지 않고 자기가 직접 편집하고 홍보하는 느낌이야, 아니면 자기와 혼연일체인 솔메이트에게 시켰던지. 다른 사람 괴롭히지 않는 그 정신을 존중하기 위해 나는 함께 온 보도자료를 곱게 뜯어 이면지로 사용했다. 세상을 살릴 수 없다면 나무라도 살려야지.

월급 인상이 제일이요, 그 다음은…

편집자에게 힘이 되는 두세 가지 것들

만능 애인 영화 <내 남자는 바람둥이>는 젊은 보조 편집자 브렛이 일과 사랑 모두에서 성장하여 홀로 서는 과정을 그린 영화라고 하는데, 일은 전설적인 편집자이자 브렛의 애인인 아치(알렉 볼드윈)가 다 하고 브렛은 사랑만 한다. 한번 웃어만 주면 원고가 편집되어 있고, 저자가 섭외되어 있고, 서점 제일 좋은 자리에 신간이 진열되어 있는 마법의 편집자 브렛. 나이가 50인 애인을 밤새 일 시키는 걸 보면 편집장해도 되겠어.

비밀의 메신저 소설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읽었을 때 가장 난해했던 단어는 ‘사내 메신저’라는 것이었다. 때는 1990년대, 문자 메시지를 쓰기 시작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으니, 메신저의 존재를 알 리가.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 인터넷 시대, 브리짓 존스처럼 사내 연애하는 데 메신저를 쓰는 사람도 있겠지만, 박복한 나는 그냥 회사 뒷담화용으로 썼다. 그랬더니 이런 일에만 눈치 빠른 회사가 지시하기를, 인트라넷에 메신저 아이디도 등록하라고.

출장 영화 <원더 보이즈>의 트립 교수(마이클 더글러스)는 7년 전에 성공작을 낸 이후 개점 휴업 상태다. 그런 그를 독려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편집자(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그래, 저런 거 좋지. 저자도 괴롭힐 수 있고, 사무실에 안 나가도 되고, 구내식당 밥 안 먹어도 되고. 저자 미팅해야 한다며 다섯 시간 차를 몰아 경상남도까지 출장 갔다가 선인세가 너무 적다며 깔끔하게 차이고 돌아온 동료 편집자의 얼굴은 마냥 밝기만 했다. 그녀에게 출장이란, 섬진강변에서 재첩국 먹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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