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전영객잔]
[신 전영객잔]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서
2014-08-21
글 : 김영진 (영화평론가)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속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의 주인공은 실어증에 걸린 젊은 피아니스트 폴 마르셀이다. 사고로 부모를 잃고 고아로 자란 그는 두 이모가 운영하는 댄스학원에서 피아노를 친다. 솜씨가 좋긴 하지만 그의 피아노 연주는 기예에 가깝다. 폴은 텅 빈 눈동자로 영혼 없는 연주를 한다. 그의 삶의 유일한 낙은 과자 슈게트를 먹는 것뿐이다. 그가 감정을 유일하게 표현하는 것은 슈게트가 떨어져 먹지 못해 짜증을 낼 때다. 어느 날 두 이모가 마련한 집안 잔치에서 연주를 하다가 슈게트가 떨어지자 폴은 화가 나서 집을 나선다. 집에 돌아온 폴은 마침 엘리베이터가 고장나 계단을 오르다가 우연히 비밀정원이 있는 마담 프루스트의 집에 들어선다. 거기서 과거로 떠나는 마담 프루스트의 묘약, 마들렌 과자와 홍차를 먹은 뒤 폴은 마담 프루스트의 단골손님이 된다.

폴 마르셀과 마담 프루스트의 만남, 이 의도적인 이름 짝짓기에서 마르셀 프루스트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폴이 마들렌을 먹고 혼절해 과거의 기억 여행을 떠나는 것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대목을 인용한 것이다. 폴은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홍차에 적신 마들렌이 입에서 녹아요”라고 말하며 잠이 든다. 영화의 첫 장면에선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이 인용되기도 한다. “기억은 일종의 약국이나 실험실과 유사하다. 아무렇게나 내민 손에 어떤 때는 진정제가, 때론 독약이 잡히기도 한다.” 그러곤 이어지는 장면에서 폴의 꿈에 나온 아버지 ‘아틸라 마르셀’(이 영화의 원래 제목이기도 하다)의 뒷모습이 비친다. 유모차에 탄 아기 폴의 시선으로 아빠 아틸라 마르셀은 장발에 건들거리며 걷는다. 단아하게 생긴 폴의 엄마가 폴을 어르며 아기가 ‘아빠’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고 말한다. 그랜드캐니언이 그려진 포스터를 보던 아틸라 마르셀은 몸을 돌려 아기인 폴에게 다가온다. 아기를 위협하려는듯 그는 괴물처럼 소리를 지르며 아기를 덮친다. 아기 폴은 비명을 지른다. 이것은 어른 폴의 악몽이었다. 폴의 꿈에서 아버지 아틸라 마르셀은 악몽의 주인공이다. 아빠라고 부르고 싶은 것은 폴의 욕망이지만 꿈에서 아빠 아틸라는 그걸 막는다. 현재의 삶에서 폴은 아버지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쌍둥이처럼 닮은 폴의 두 이모가 폴에게 아버지를 미워하도록 가르쳤다. 꿈을 비롯해서 폴의 기억에서 유추되는 아버지는 나쁜 아빠였다. 그것이 폴의 실어증의 단초이기도 하다. 폴은 두살 이후로 성장이 멈춘 듯한 삶을 살고 있다. 폴이 이런 삶을 사는 것은 폴의 이모들 때문이다. 곱게 늙고 예쁘게 치장한 폴의 이모들은 폴의 아빠를 싫어했으며 그 증오를 폴에게 전염시켰다. 이모들은 폴의 엄마가 천한 아틸라 마르셀과 결혼해서 피아니스트를 배출한 가문의 전통을 저버렸다고 생각했다. 이모들은 폴의 엄마를 대신해 폴이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바란다. 폴은 그렇게 되는 대신 이모들의 학원에서 연주를 한다. 그는 매년 콩쿠르에 나가지만 한번도 입상하지 못했다. 폴은 다른 사람, 이모들의 욕망을 대리해 산다.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에서 신비한 마들렌을 먹으며 폴은 과거의 기억 조각을 맞춘다. 폴의 기억이 맞는지 어떤지는 모른다. 폴의 회상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엄마를 때리는 폭압적인 가장일지도, 활달한 기상을 지닌 자유인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폴의 이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뿐이다. 그런데 이 기억 연상 작용을 통해서 폴은 악몽의 주인공으로서의 아버지에 대한 인상을 조금씩 지운다. 이모들의 억압된 가르침을 통해 아버지의 존재는 폴의 의식 속에 나타나지 않고 무의식에 갇혀 있다가 악몽의 주인공으로 나타난 것이었지만 이제 마담 프루스트의 마들렌과 홍차를 먹은 폴의 무의식에서 아버지는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 폴의 아버지가 정돈되지 않은 거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가 야성의 영역, 초자아로 지시되지 않는 영역에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는 초자아의 화신 같은 폴의 이모들과 불화한 존재였다. 이모들은 그녀들이 운영하는 학원에서 고전주의 음악만을 신봉하며 반복적인 리듬의 춤만을 가르친다. 그녀들은 질서에서 벗어나는 것을 끔찍이 싫어한다. 폴은 초자아의 화신과도 같은 이모들에게 사육된 불행한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동시에 이모들이 그런 것처럼 정돈되고 텅 빈 삶의 굴레에 갇혀 불행하면서도 한편으론 편안함을 느끼는 존재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다. 일상적이고 평온한 삶을 살지만 동시에 병들어있다.

마담 프루스트는 그들과 다른 사람이다. 역시 초자아의 상징과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비밀스럽게 바닥을 뜯어내고 정원을 만들어놓은 그녀의 집은 무의식의 동굴과 같다. 그녀의 정원에서 손님들은 자신이 회피했던 무의식과 만나고 그녀는 그 대가로 돈을 받고 산다. 그녀의 정원을 지키는 늙은 귀머거리 개의 행동은 특이하다. 마담 프루스트는 손님이 들어올 때는 가만히 있고 나갈 때만 짖는다고 개를 타박한다. 그 개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입문>에 나오는 ‘의식의 방’과 ‘무의식의 방’ 사이를 지키는 문지기를 연상케 한다. 무의식의 방으로는 마음대로 들어올 수 있지만 의식의 방으로 나가는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마담 프루스트의 귀머거리 개는 무능한 문지기이고 폴을 비롯한 프루스트 부인의 손님들은 검열과 방어기제에서 서서히 탈출할 수 있다. 마담 프루스트는 그녀의 정원을 통해서 초자아의 억압과 무의식을 조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영화 속 대다수 인물은 남들이 사는 삶과 비슷한 삶을 욕망함으로써 자기가 없는 삶을 산다면, 마담 프루스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명확히 아는 드문 인물이다. 그녀는 그런 자신을 공원의 오래된 커다란 병든 나무와 동일시한다. 그 나무는 공원을 찾는 사람들에게 그늘을 드리워주고 쉼터를 제공하지만 공무원은 나무가 늙어 병들었으니 자르겠다고 말한다. 그 나무처럼 암으로 병들어 죽어가는 마담 프루스트는 그 나무를 병든 상태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천국은 존재하지 않으며 이 땅에서 천국을 실현해야 한다고 공원에서 시위를 벌인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현실을 볼 수 있고 인정하는 그녀의 삶의 태도는 모든 초자아적 규율이 강요하는 가상에 휘둘리지 않으며 그만큼 자유롭다. 영화 속에서 그녀는 폴의 집에 몰래 들어가서 초자아를 대표하는 폴 집안의 조상들, 대대손손 피아니스트였던 사람들의 초상화를 노려본다. 그녀는 그것들이 폴의 무의식 속 억압기제였음을 알고 있다. 그러고는 폴의 침대에 걸린 십자가를 곰돌이 인형으로 바꿔놓고 나온다. 구원은 이모들의 성경과 예수 석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아기의 어릴 적 장난감인 곰돌이 인형에 있다. 왜곡되고 변형되었으며 검열을 거친 기억을 거둬내고 과거를 직시하고 현재를 바라볼 수 있을 때, 과연 폴은 마담 프루스트의 바람대로 결말부에 다른 삶을 살게 된다.

폴이 마담 프루스트의 안내에 따라 보게 된 것은 슬픈 기억들과 충만한 기억들의 조합이다. 폴의 어머니와 아버지도 폴의 기억 속에서 곧잘 충돌하지만 서로 조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폴은 무의식을 통해 엄마와 아빠가 즐겁게 놀고 있는 해변의 풍요로운 광경을 본다. 대조적으로 이모들이 뛰노는 해변은 파라솔이 접힌 채로 놓여 있는 황량한 풍경이 펼쳐진다. 우선, 이 무의식의 기억 복원은 폴에게 약으로 작용한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조화로운 모습을 보게 된 폴은 이전에 아버지가 찍힌 부분을 잘랐던 사진을 복원한다. 폴은 매번 떨어지던 피아노 콩쿠르에서도 우승한다. 그전에, 이런 장면이 있다. 콩쿠르의 심사위원이기도 한 피아노 선생 크루진스키가 폴을 지도하면서 폴의 실력은 뛰어나지만 무엇이 부족한지 암시하는 말을 한다. “음악은 도둑질이고 쓰레기 같은 것이지만, 전구의 빛처럼 이 모든 것을 다 감싸는 것입니다.” 이 말은 피아노 연주는 단순한 기예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쓰레기 같은 무의식의 욕망을 도둑질해서 모든 것을 아우르고 감싸서 내놓아야 비로소 예술이 된다는 뜻이다. 영화의 절정부에서 마담 프루스트의 치료를 받은 폴이 콩쿠르 연주 도중에 대면하는 것이 바로 그 무의식의 감정들이다. 폴의 연주는 형식을 벗어나지만 또 다른 형식을 만들어냄으로써 대상을 받는다.

그러나 폴의 기억 습득은 동시에 독이 되기도 한다. 폴은 펼쳐진 무의식을 통해 아버지와 어머니가 죽는 광경을 본다. 이 충격은 그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안긴다. 그로 인해 자신의 피아노 연주를 예술로 승화시켰으나 그는 피아노를 더이상 칠 수 없게 된다. 피아노는 폴에게 이모들이 강요한 초자아의 상징이자 부모의 죽음을 초래한 원인이었으며 현재의 삶을 무겁게 짓누르는 억압이다. 사고인지 자해인지 모르는 상태로 폴은 손가락을 잃고 더이상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된다. 피아니스트로서의 삶을 살 수 없게 된 것, 자신의 재능을 더이상 발휘할 수 없게 된 삶이 약인지 독인지 알 수 없으나 여하튼 폴은 자신의 신체를 잘라버림으로써 역설적으로 갱생할 수 있었다. 그는 피아노를 잃은 대신에 마담 프루스트가 했던 것을 따라 우쿨렐레 강사로 살아간다. 연주를 잘하진 못하지만 즐길 수 있으니 좋다고 했던 마담 프루스트처럼 그는 그 삶을 즐긴다. 그리고 그 순간 진정한 자기와 마주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폴의 아버지가 쳐다보고 있던 그랜드캐니언이 그려진 포스터는 무의식의 상징이었을지 모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폴 또한 그랜드캐니언을 보고 있다. 그는 이제 무의식으로부터 도망치지 않는다. 그리고 첫 대면에서부터 성적으로 자신을 유혹했던, 리비도에 솔직한 중국 여자와 결혼해서 낳은 아이를 보며 사랑스럽게 ‘아빠’라고 말해준다. 행복하든 불행하든 간에 그는 자신과 대면할 수 있었고 자기만의 삶을 살 수 있었다. 폴의 멜랑콜리는 근원을 알 수 없음으로 해서 좀처럼 치유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기억의 뿌리를 더듬어감으로써 멜랑콜리의 근원을 잡아낼 수 있었다. 그는 이제 우울하지 않다. 행복했고 동시에 불행했던 과거와 대면했고 그럼으로써 과거를 떠나보내고 현재를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도식적으로 영화를 읽어보면서도 하나의 의문은 남는다. 가장 이상했던 것은 영화 속 폴의 억압을 강요했던 폴의 두 이모, 아름다운 할머니들의 존재감이었다. 누벨바그의 대모였던 베르나데트 라퐁과 그녀 못지않게 매력적인 엘렌 뱅상이 연기하는 이 할머니들은 아무리 고약한 행동을 하더라도 미워할 수가 없다. 그녀들이 나중에 자기 자신을 찾은 조카 폴을 보며 덩달아 행복하게 사는 동화적인 결말 때문이 아니라 완고하고 반복적이며 닫힌 삶을 사는 모습을 보이는 영화의 전개 과정에서도 그녀들을 미워할 수가 없다. 감독 실뱅 쇼메는 왜 이모들의 역할에 그토록 매력적인 할머니들을 캐스팅했을까. 영화 속 한 장면에서 그녀들이 약간 술에 취해 체리를 먹으며 해변가를 걷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그녀들은 아무 데나 체리씨를 퉤퉤 뱉으며 즐거워한다. 평소의 교양 떠는 모습은 아니지만 충분히 인간적이어서 매력적이었다. 이 영화 속 주인공들은 대다수가 병들어 있지만 동시에 보통 사람들이며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산다. 고통의 전시는 영화의 주인공 폴이 하고 있지만 진실로 고통스러운 것은 바로 이 초자아의 정언명령에 갇힌 그들, 그리고 우리다. 실뱅 쇼메는 이걸 직설이 아닌 동화적인 화법으로 에둘러 표현한다. 그 점이 프루스트와 프로이트를 조우시켜 만들어낸 이 도식적인 영화가 이곳에서 환영받는 이유가 아닐까 짐작한다.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은 별달리 홍보를 하지 못했는데도 대단히 흥행하고 있다. 이런저런 자리에서 관객과의 대화를 하면서 나온 질문들을 통합해 대답하는 식으로 글을 쓰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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