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bituary]
[obituary] 열정 가득했던 은막의 여제
2014-08-18
글 : 김보연 (객원기자)
로렌 바콜 영면하다
<워커>

2014년 8월12일, 로렌 바콜이 89살로 세상을 떠났다. 1944년 영화계에 데뷔한 뒤 70년 가까이 꾸준한 활동을 펼쳐온 그녀는 뉴욕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 한명의 위대한 배우가 우리 곁을 떠난 지금 이제 할 수 있는 건, 언제나 그렇듯, 그녀의 발자취를 기억하는 일뿐이다.

1924년 9월16일, 뉴욕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베티 조앤 퍼스크’는 배우 이전에 패션모델로 먼저 활동했다. 그런데 십대 시절부터 <하퍼스 바자> 등의 표지를 장식하며 주목받던 그녀를 눈여겨본 것은 다름아닌 하워드 혹스 감독의 아내였다. 제작사의 추천으로 응한 오디션에 당당히 합격한 그녀는 하워드 혹스가 지어준 ‘로렌’이란 이름과 함께(‘바콜’은 그녀의 어머니 이름에서 따왔다) <소유와 무소유>에 출연하며 본격적인 배우의 삶을 시작했다.

이 강렬한 데뷔작과 이후 연달아 출연한 <빅 슬립>(감독 하워드 혹스, 1946)은 지금까지 우리가 기억하는 로렌 바콜이 가진 이미지의 많은 부분을 일찌감치 결정지었다. 날카로운 턱선과 눈매, 그리고 낮은 목소리를 지녔던 그녀에게 하워드 혹스는 강인한 캐릭터를 부여해주었다. 어쩌면 당시 수많은 필름누아르에 등장한 ‘팜므파탈’이란 단어로 로렌 바콜의 이미지를 간단히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단지 남자주인공을 위기에 빠트리는 퇴폐적인 악녀 이상의 매력을 선보였다. 남자주인공에 종속된 여성 조연이 아니라 한명의 동료, 또는 호적수로 활동한 것이다. 겉보기에 ‘여성성’의 기호를 모두 갖춘 그녀가 중성적인 매력까지 발하며 남자주인공과 대등하게 (주로 담배를 나눠 피우는 것으로 표현된) 우정을 나누는 순간들은 로렌 바콜의 고유한 매력을 관객의 뇌리에 깊이 각인시켰다. 그리고 <소유와 무소유>에서 만난 험프리 보가트와 결혼한 로렌 바콜은 이후 남편과 함께 <다크 패시지>(감독 델머 데이브스, 1947), <키 라르고>(감독 존 휴스턴, 1948)를 찍으며 자신의 이런 이미지를 더욱 굳혀나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단지 필름누아르의 영역에만 머문 것은 아니다. 마릴린 먼로와 함께 출연한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1953)에서는 자신의 이미지를 코미디 장르에 영리하게 활용하기도 했고, <바람에 쓴 편지>(감독 더글러스 서크, 1953)에서는 멜로드라마 속 비운의 여인 역을 맡아 애절한 눈물 연기를 펼치기도 했다. 또한 빈센트 미넬리의 <디자이닝 우먼>(1957)에 출연해 절도 있는 움직임과 허스키한 목소리의 뮤지컬 연기를 선보인 것 역시 그녀의 또 다른 모습 중 하나이다.

그녀의 필모그래피에서 또 한 가지 인상적인 것은 중년으로 접어든 이후에도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계속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가 52살에 출연한 <마지막 총잡이>(감독 돈 시겔, 1976)는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두 배우 존 웨인, 제임스 스튜어트와 함께 연기한 이 영화에서 그녀는 눈가의 깊은 주름으로 여전히 싸움을 포기하지 못한 남자들을 바라보며 영화에 자신만의 색깔을 더했다. 또한 1996년에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감독의 <로즈 앤드 그레고리>(The Mirror Has Two Faces)를 통해 오스카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르는 등 전성기 못지않은 활동을 이어나갔으며, 이후 일흔이 넘은 나이에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빌>(2003), <만덜레이>(2005)에 출연해 짧은 분량이지만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다. 나아가 당시 영화쪽에서는 신인이었던 조너선 글레이저의 <탄생>(2004)에 출연한 것이나 내털리 포트먼의 단편에 출연한 것, 또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애니메이션 <패밀리 가이>에서 목소리 연기를 펼친 것 등은 연기에 대한 그녀의 엄청난 열정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물론 로렌 바콜이 출연한 70여편의 작품들을 하나씩 떠올리는 것만으로 그녀의 삶을 모두 짚어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열정적인 영화배우인 동시에 수차례 화려한 스캔들을 일으킨 할리우드 스타이기도 했으며, 뛰어난 연극배우이자 매카시즘에 당당히 맞선 ‘투사’이기도 했다. 이렇듯 누구보다 열정적인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준 그녀가 이제 우리 곁에 없다는 건 아득한 슬픔을 안긴다.

(<씨네21> 920호 ‘한창호의 오! 마돈나’에서 젊은 시절 그녀의 활약을 추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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