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스트 원티드 맨>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올여름, 나는 어딘가 구멍이 나 있는 자전거 타이어 같다. 펌프로 열심히 바람을 집어넣어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여지없이 쭈글쭈글한 상태로 변해 있다. 전부 새고 있는 것 같다. 구멍이 하나뿐이라면 찾아서 메우면 될 테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언제부턴가 타이어에 공기 채우는 일도 그만두고 말았다. 펌프를 움직일 힘도 없다.
시작은 아마도 세월호 침몰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사고 소식이 더해지고, 더이상 생존자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그 위에 얹히고, 이 모든 일들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는 소식이 다시 들려오고, 충격이라는 단어를 끝내기도 전에 또 다른 충격이 덮쳐와서 도대체 어떤 일이 더 큰 충격인지도 셈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사건의 갈피를 잡고 싶었지만 사건은 생각보다 거대했고, 배후는 예상외로 많았다. 누가 누구의 배후이고, 누가 누굴 비호하는지는 여전히 정확하지 않지만, 모든 일들은 이미 일어났고 결국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세월호의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데, 계속 사고가 벌어졌다. 잠에서 깨면 뉴스가 떴고, 대부분의 뉴스는 끔찍했다. 지하철이 충돌하고, 가까운 곳에서 불이 나고, 불이 계속 나고, 누가 누군가를 기묘한 이유로 죽이고, 이유 없이도 죽이고, 해외에서는 무차별 폭격이 벌어졌다. 확실한 이유를 대며 무차별 폭격을 자행하지만 대부분은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들이고, 그래서인지 때로는 어떤 사람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다른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군에서 수많은 사건들이 벌어졌고, 총기를 난사하고, 때리고, 예전에 벌어진 사건들이 뒤늦게 밝혀지기도 했다. 2014년 여름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많은 일이 벌어졌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거대한 상처에서 끝없이 고름이 터져나오는 것 같다.
올여름, 나는 매사에 의욕이 없고 힘이 잘 나지 않는다. 사람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잘 웃고 떠들지만 혼자 있을 때면 하고 싶은 게 별로 없다. 인터넷 브라우저 창을 열어둔 채 관심도 없는 문서를 계속 들여다보고 있기도 했고,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을 멍하니 보고 나서는 내용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 적도 있고, 술을 마시고 기분이 조금 좋아졌지만 깨고 나면 더욱 가라앉은 기분 때문에 스스로를 책망하기도 했다. 모든 게 다 귀찮게만 느껴졌다. 힘을 내려고 안간힘을 써보는데도 손끝과 발끝으로 힘이 다 빠져나갔다. ‘그래도 힘을 내야지’ 머리로는 생각하는데 몸은 잘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걸 무기력증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이런 무기력증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바틀비를 떠올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바틀비와 나는 질적으로 달랐다. 허먼 멜빌의 명작 <필경사 바틀비>의 주인공 바틀비는 매사에 “안 하는 쪽을 선택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안 하는 것’에 밑줄이 그어져 있는 게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선택’한다는 점이 핵심이다. 바틀비와 달리 ‘어떤 일을 할지 안 할지를 선택하는 것도 뭔가 하는 것이니까 선택조차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나는 밑을 알 수 없는 무기력증에 빠진 것일 뿐이다.
어째서 이런 무기력증이 생긴 것일까. 나이 탓일까,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단순한 권태일까, 나도 모르는 스트레스로 탈진해서 그런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별다른 대답을 찾지 못했다. 분노하고 싶었지만 대상을 찾지 못했고, 치료하고 싶었지만 병의 실체를 알 수 없었다. 무력하고 또 무력했다. 현재를 알 수 없고, 미래가 불투명할 때 ‘절망의 마음’이 생겨난다고 전문가들은 이야기한다. 마음의 무게가 몸으로 이어져 무기력증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무기력증에 그나마 좋은 약은 영화와 소설이었다. 다른 세상을 둘러보고 나면 현실이 잠깐씩 낯설어졌고, 절망의 마음이 아주 조금 줄어들었다. 올여름엔 영화를 자주 보았고 소설도 많이 읽었다.
얼마 전 별다른 기대 없이 <모스트 원티드 맨>을 보다가 자세를 고쳐 잡고 앉았다.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의 팬으로서 그의 마지막 작품을 챙겨보자는 마음이었지만, 작품을 보는 내내 그를 향한 원망이 더욱 커졌고 그가 그리웠다.
<모스트 원티드 맨>의 주인공 귄터 바흐만(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은 한때 독일 최고의 스파이였으나 상부 조직에 이용당하며 작전을 망친 이후 현재는 정보부 소속 비밀조직을 이끌고 있다. 대충 빗어 넘긴 머리카락, 밤송이처럼 까칠까칠한 턱수염, 불룩하게 솟아 있는 배는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과 귄터 바흐만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그럴 리 없겠지만, 캐릭터의 설정 때문이었겠지만, 죽음을 앞두고 있는 자의 고단한 피로감이 온몸에서 느껴졌다. 귄터 바흐만이 자신의 비밀정보원 ‘자말’과 이야기를 나눌 때, 블랙커피를 시킨 다음 거기에다 위스키를 부어 마실 때, 펍에서 술을 마시다 여자를 괴롭히는 녀석을 한방에 때려눕힐 때조차 그의 몸에서는 이상한 피로감이 느껴졌다. 열심히 일을 하고 있지만 문득 내가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막막함과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봤자 내가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나를 짓누르고 말 것이라는 무력감이 결합된 총체적 피로였다. 중요한 작전 전날, 위스키를 마시다가 그는 피아노 앞에 앉는다. 짧고 굵은 손가락으로 건반을 누르는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의 옆모습을 보면서, ‘아, 저 배우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 피아노 연주는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이 보내는 마지막 인사였다. 지금부터 스포일러가 시작되므로 <모스트 원티드 맨>을 보려는 사람들은 여기서부터 글 읽기를 멈춰야 할 테니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자면, 나는 이 작품이 눈물나게 좋았다. 귄터 바흐만 때문이기도 했고,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 때문이기도 했다.
귄터 바흐만의 작전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작전의 클라이맥스에서 또다시 상부 조직은 그를 배신했고, 마지막 먹잇감을 그에게서 빼앗아갔다. 그는 철저하게 이용당했고 그가 지키려던 선의는 비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그는 도로 한복판에서 버림받은 뒤 큰 소리로 욕을 한다. 영화 내내 흥분하지 않았던 그가 울부짖으면서 욕을 해댔다. 무기력했던 그에게서 분노가 느껴졌다. 그는 동료들을 놓아둔 채 차를 타고 어디론가로 향한다. 그가 어디로 가는지 영화는 보여주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인지, 술집으로 가는 것인지, 자신의 비밀정보원 자말을 만나러 가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엿먹인 상부 조직을 박살내러 가는 것인지, 작전을 어떻게든 끝까지 수행하려 하는 것인지,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귄터 바흐만이 떠난 빈 운전석이다.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은 떠났고, 텅 빈 운전석만이 남았다. 나는 그가 어디로 갔을지 생각해보았다. 귄터 바흐만은 어디로 갔고,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은 어디로 갔을지 생각해보았다. 귄터 바흐만이 어떤 선택을 했을지 곰곰이 생각하다보면 무기력증이 조금은 낫지 않을까 싶다. 지금 나는 무덥고 기나긴 여름의 한가운데에서, 엉덩이가 얼얼할 정도로 뜨거운, 운전석에 앉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