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넉하고 강인한 줄만 알았던 캡틴, 로빈 윌리엄스가 2014년 8월11일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향년 63. 너무 일찍 자라버린 아이, 혹은 미처 자라지 못한 어른에게 마지막 인사를 띄운다.
주요 필모그래피
<더 앵그리스트 맨 인 브루클린>(2014) <블러바드>(2014) <페이스 오브 러브>(2013) <빅 웨딩>(2013)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2013) <박물관이 살아있다2>(2009) <지상 최고의 아빠>(2009) <슈링크>(2009) <어거스트 러쉬>(2007) <박물관이 살아있다!>(2006) <나이트 리스너>(2006) <빅 화이트>(2005) <로봇>(2005) <스위트 크리스마스>(2004) <하우스 오브 디>(2004) <파이널 컷>(2004) <인썸니아>(2002) <스무치 죽이기>(2002) <스토커>(2001) <A.I.>(2001) <바이센테니얼 맨>(1999) <제이콥의 거짓말>(1999) <패치 아담스>(1998) <천국보다 아름다운>(1998) <굿 윌 헌팅>(1997) <잭>(1996) <쥬만지>(1995) <로빈 윌리엄스의 인생 이야기>(1993) <미세스 다웃파이어>(1993) <알라딘>(1992) <후크>(1991) <피셔 킹>(1991) <사랑의 기적>(1990) <바론의 대모험>(1989) <죽은 시인의 사회>(1989) <굿모닝 베트남>(1987) <지상의 낙원>(1986) <가프>(1982) <뽀빠이>(1980) <캔 아이 두 잇 틸 아이 니드 글래시스>(1977)
“나는 마흔일곱살이고, 죽음은 내 삶에서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은 죽는 게 정말 무섭다. 내 삶은 매우 특별하기 때문이다.”
그처럼 오래 지속하고 싶었던 삶을 로빈 윌리엄스는 스스로 끝냈다. 이젠 무섭지 않았던 걸까, “다정하고 사랑스럽고 조용한” 아내와 살던 집에서 목을 맸다. 알코올중독과 우울증이 원인으로 오르내렸지만, 불꽃을 내뿜는 로켓처럼 격렬하게 수다를 떨던 사람이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남기고 떠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가 아는 건 한 가지뿐이다. 그는 예순셋, 그 세월을 견디고도 굳이 서둘러야 했는지, 속상해지는 나이였다. 아니, 사람이었다. 많은 이가 윌리엄스를 그저 좋은 사람으로 기억한다. 프로듀서 데이비드 E. 켈리는 “위대한 재능을 지녔지만 그만큼이나 친절하고 인간적이기도 했다. 우리 모두의 마음을 건드린 온화했던 영혼, 정말 특별했던 사람”이라는 말로 그를 추모했다. 언제나 먼저 인사를 건넸다는, 자기가 도울 일은 없는지 묻곤 했다는, 착한 사람. 쉽지 않은 일이다. 20대에 이미 도시락 가방 캐릭터가 됐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고, 부침이 있었다고는 해도 30년 가까이 할리우드 피라미드의 꼭대기 근처를 오가던 배우가, 그저 좋은 사람이었다니. 게다가 그는 단 한번도 절박한 고난에 처해본 적이 없는 부잣집 외동아들이었다.
어긋남을 연기하기까지
윌리엄스는 포드사의 경영진이었던 완고한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2만평이 넘는 집엔 방이 40개였고, 그는 혼자서 3층을 통째로 썼다. 가지고 있는 장난감 병정이 수만 수천개였다. 하지만 그는 외로웠다. 작달막하고 비만인 데다 고립된 대저택에 사는 소년과 놀아주는 동급생은 아무도 없었다. 텅 빈 집에서 오직 장난감들에만 둘러싸여 있던 윌리엄스는 병정들을 전투 대형으로 배치하고 싸움을 붙이면서 혼자 여러 사람 몫을 했다. 목소리와 대사를 바꿔가면서 전쟁영화를 찍듯 재미있게 놀려고 애썼다.
그 고독한 소년이 그대로 자라서 어른이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스크린에 비친 윌리엄스는 어린아이처럼 굴 때도 그늘이 있었고, 어엿한 성인일 때도 네버랜드에서 쫓겨난 피터팬처럼 곤란해 보였다(그는 <후크>에서 현실로 나와 홀로 나이를 먹은 피터팬을 연기하기도 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시간의 흐름과는 어긋나기만 하는, 무언가 잘못된 존재. 조로증을 앓는 <잭>의 덩치 큰 아이는 엄마보다 늙은 모습으로도 한없이 천진하고, 게임 속의 시공간에 갇힌 <쥬만지>의 소년은 성장할 시간을 잃어버렸으며, 인간의 수명 앞에서 속수무책인 <바이센테니얼 맨>의 로봇은 모두 떠난 자리에 홀로 남을 것이니, 그들만 두고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간다. 윌리엄스는 자라버린 아이였고 자라지 못한 어른이었다.
그는 또한 외계에서 떨어진 존재이기도 했다. 공간과도 어긋났다. 윌리엄스가 외계인을 연기한 TV시리즈 <모크와 민디>의 감독 게리 마셜은 오디션에 참가한 배우 중에서 그가 “유일한 외계인”이었다고 추억했다. 의자에 앉으라고 하니 정수리를 의자 바닥에 박고 물구나무를 섰던 유머감각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불가사의한 속도로 유머를 쏟아내는 배우였다. 카메라 세대를 쓰던 마셜은 도저히 그를 따라잡을 수가 없어 윌리엄스 전용 카메라 한대를 더 썼지만, 다섯대를 쓸걸 그랬다며 나중에 후회했다. “머리에서 혀까지 오직 하나의 신경이 관통하는 것처럼” 보이는, 꼭지만 틀면 수돗물처럼 쏟아지던 그의 유머. <몬티 파이튼> 시리즈의 코미디언 에릭 아이들은 그 재능을 일종의 저주라고 표현했다. “미다스 왕처럼, 로빈은 끝도 없이 웃겼다. 그걸 멈추는 방법은 폭발해버리는 것뿐이었다.”
그 폭발의 순간이 2014년 8월11일이었을까, 63살 생일로부터 고작 3주가 지난 어느 여름날.
자신을 위해서는 결코 쓰지 않은 유머
하지만 윌리엄스는 낙천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유머의 힘을 믿었다. “유머란 낙관주의를 실연하는 것이다. 유머는 어떤 일이든 견딜 수 있게 해준다. 나는 사람들이 끔찍한 시절을 유머로 헤쳐나가는 것을, 유머가 사람들을 돕는 것을 보아왔다. 내 친구 크리스토퍼 리브도 그랬다. 나는 유머가 힘을 지녔다는 걸 안다.”
줄리어드 연기 학교 시절 친구이자 <슈퍼맨>의 히어로였던 리브는 낙마 사고로 전신마비가 되었다. 절망했던 그는 얼굴을 마스크로 가리고 러시아 억양을 쓰는 의사로 변장해 항문 좀 보자며 병실로 들어온 윌리엄스 덕분에 사고 이후 처음으로 웃었고,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 유머,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물과도 같았던 유머를, 윌리엄스는 자신을 위해서 쓰지는 못했다.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는 윌리엄스는 매우 연약한 사람이기도 했다. 20대에 엄청난 명성을 얻은 그는 당연한 것처럼 술과 코카인을 즐겼다. 때는 자유와 퇴폐의 시대, 1970년대였다. 친구였던 <블루스 브러더스>의 배우 존 벨루시가 서른셋에 약물과용으로 죽은 다음에야 윌리엄스는 약물과 알코올중독에서 벗어날 이유를 얻었다. 곧 태어날 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첫 번째 결혼은 이미 망가진 뒤였다. 느닷없이 짊어진 명성의 무게, 아버지로서의 책임감, 중독자라는 자책, 무대에서 실패해선 안 된다는 강박. 성공한 코미디언이었으면서도 스스로를 믿지 못했던 그는 두 번째 아내가 될 애인이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수도 없이 되풀이 하고서야 그게 진실이라고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러고서도 그는 젊은 시절 입은 상처 때문에 평생을 피고름에 시달린 전설 속의 어부왕, 무차별 총격으로 아내를 잃고 상실에 함몰당한 <피셔 킹>으로 남았다. <굿모닝 베트남>의 프로듀서 마크 존슨은 말했다. “로빈에겐 방어라는 것이 없다. 그게 로빈을 그토록 쉽게 망칠 수 있는 이유다. 로빈이 누군가를 좋아하는데, 그 사람이 로빈을 조종하고 싶다면 버튼 하나만 누르면 된다. 그러면 원하는 대로 될 것이다.”
털북숭이 얼굴 틈에 숨은 청회색 눈동자의 눈물, 누구라도 건드릴 수 있는 위태로운 뇌관. 그 얼굴에 무표정이란 없었다. 환희와 광기와 절망이 찰나에 겹치고 섞이는 <피셔 킹>의 광인 페리처럼 웃음이 사라지는 순간, 슬픔이 그를 잠식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면, 그게 온전한 웃음만은 아니라는 걸,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굿모닝 베트남>에서 전쟁터에 불온한 활기를 불어넣는 종군 DJ였던 윌리엄스는 쫓겨나는 와중에 미리 녹음한 방송 테이프를 남긴다. 언제나 그렇듯이 기운차게 외치는 인사, 다만 이번엔 ‘굿모닝 베트남’ 대신 ‘굿바이 베트남’이었다. 거기에 밴 습기를 누가 느끼지 못하겠는가.
당신이 로빈을 만난다면
20년 동안 술을 끊고 <죽은 시인의 사회> <미세스 다웃파이어> 등으로 승승장구했던 윌리엄스는 2003년 알래스카에서 촬영하다가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세상의 끝은 아니지만 세상의 끝이 보이는” 작고 춥고 고독한 마을에서의 나날. “20년 동안 끊었으니 한잔쯤은 괜찮겠지 싶었다. 술을 사러 갔는데 바텐더가 물었다, 금주하는 거 아니었느냐고. 나는 친구한테 줄 거라고 말하고는 기둥 뒤에 숨어서 그 술을 마셨다.” 수치심에 시달리면서도 괜찮다고 자위하던 그는 3년이 지나고 나서, 가족의 개입으로 알코올중독 재활 치료를 시작했다. 그리고 두 번째 결혼을 망쳤다. 그처럼 50대의 윌리엄스에겐 위기가 끊이지 않았다. 알코올중독과 재활, 이혼, 심장수술.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은 그에게서 어떤 균열도 감지하지 못했다. 괜찮을 거라 믿었다. 단단한 턱과 넉넉한 배, 따뜻하고 촉촉한 눈동자를 안고 웃던 사람. 웃고 있어도 슬픈 얼굴이어서, 그러니까, <굿 윌 헌팅>의 맷 데이먼이 그랬던 것처럼 그 앞에선 그냥 울어도 괜찮을 것 같았던 사람. 제법 부피가 컸고 목소리가 높았던 그가 없어진 자리만큼 세상은 조금 조용해졌을 것이고 조금 빈자리가 늘어났을 것이다. 조금 허전해졌을 것이다.
로빈 윌리엄스는 미국의 위대한 코미디언이었다. 하지만 1970년대에 한국에서 태어난 많은 관객은 그를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처음 보았고, 웃기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이 일으키는 파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선원들과 함께 키를 붙들었던 ‘캡틴’으로 기억할 것이다. 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살아가는 목적을 기억하라고 가르쳤던 존 키팅 선생님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캡틴, 마이 캡틴.” 패배하는 순간에도 싸우라고 가르쳤던, 나의 캡틴.
죽어 신을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묻는 질문에 그는 대답했다. 모차르트나 엘비스 프레슬리의 콘서트에 가서 “거기 앞줄에 자리 있네요”라고 할 거라고. 그가 없는 이 세상엔 침묵이 남았겠지만, 그가 있는 그곳에는 모차르트와 엘비스 프레슬리를 들으면서 명당 자리 차지한 윌리엄스가 있으면 좋겠다. 그늘 없이 웃는 얼굴이 있으면 좋겠다.
생전의 그를 사로잡은 것들
로빈 윌리엄스에게 그토록 소중했던 몇 가지
게임
로빈 윌리엄스의 딸 이름은 젤다이다. 게임 <젤다의 전설>의 그 젤다. 그래서 둘이 함께 <젤다의 전설> 닌텐도 버전 광고도 찍었다. 비디오게임에서 시작해 온라인 게임까지 섭렵한 윌리엄스는 “게임이란 마약 딜러와 말 섞을 필요가 없는 코카인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게임은 코카인과 똑같이 신나는 동시에 점점 중독이 심해져 집착과 망상에 이르는 것이었다.
외계인
윌리엄스는 <바이센테니얼 맨>의 원작자이기도 한 아이작 아시모프의 팬이어서 그의 대작 <파운데이션> 시리즈가 영화화된다면 꼭 출연하고 싶어 했다. “인공지능과 인간 행동, 나는 언제나 그 두 가지에 매료되어왔다.” 외계인 모크 역으로 출세한 그는 우피 골드버그가 부추겨서 <스타트렉> 시리즈에 출연하려고도 했지만 일정이 맞지 않아 포기한 적도 두번 있다.
자전거
긴장감 없는 체형만으로는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윌리엄스는 자전거 타기를 좋아했다. 50대가 넘는 자전거를 가지고 있었으며, 100km가 넘는 코스도 거뜬히 완주했다. 전설적인 사이클 선수 랜스 암스트롱과 친해 경기에서 함께 달리기도 했다. “난 포주처럼 차려입고 골프 코스로 나가는 일은 못한다. 하지만 내가 사는 땅은 정말 아름답고, 그곳에서 40마일을 달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 코스 끝에서 나는 대양과 마주할 수 있다. 다시 산꼭대기까지 올라갈 수도 있고.”
아이들
세 아이의 아버지였던 그는 로빈 윌리엄스여서 가장 좋은 점은 자기 아이들의 아버지인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에게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일이란 (친구 존 트래볼타가 겪었듯이) 자식이 먼저 죽는 것이었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프로듀서 스티븐 해프트는 자기 집에 초대한 윌리엄스에게 난산이었던 첫아이의 출생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아이의 체온이 떨어지던 위태로운 순간도 들려주었다. “그리고 몇분 뒤에 방에 가보니 로빈은 아기 요람 옆에 앉아 내 아들의 등에 손을 얹고는 엉엉 울고 있었다.”
무대
스타가 된 다음에도 윌리엄스는 무대에서 공연하는 걸 좋아했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고, 옛 방식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곳이었다. 그의 친구 빌리 크리스털은 엄청나게 머리를 굴리는 스탠드업 쇼가 윌리엄스에게 치유제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지난 몇년의 세월과 고통에도 그가 침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오직 그의 두뇌 덕분이었다.” 윌리엄스의 매니저였던 데이비드 스타인버그도 비슷하게 생각했다. “무대는 그의 인생에서 누구도 그를 함부로 할 수 없는 유일한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