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죠? 우리 우디를 만나고 싶었던 분들께는 저 순이가 대신 사과드려요. 그이가 워낙 바쁘기도 하지만, 실은 비행기 타는 걸 끔찍이 싫어하거든요. 한번 탈 때마다 얼마나 난리 블루스를 추는지, <로마 위드 러브>에서 보셨던 그대로랍니다. 그래서 <매직 인 더 문라이트> 개봉을 기념하는 유럽 투어의 안내는 제가 맡게 됐어요. 아무래도 한국어도 제가 좀 낫죠? 아시듯 제가 한동안 엄마인 듯 엄마 아닌 미아 패로씨 때문에 마음고생이 많았는데, 지난 10년간 유럽 여행하면서 힐링 많이 했답니다. (힐링이란 단어에 그이가 콧방귀를 뀌네요.) 아무튼 제가 봐도 그이는 대단히 복 받은 사람이에요. 세상에 어느 감독이, 그것도 말년에, 이렇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영화를 만들 수 있겠어요. 느낌 아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죠. 제가 영화는 잘 몰라도 그 느낌은 좀 아니까, 절 따라오시길.
런던, 부와 욕망의 도시
우리 그이가 뉴욕과 파리 다음으로 좋아하는 도시예요. 여기서 만든 <매치 포인트>로 건재함을 알렸답니다. 저는 이 영화를 참 좋아해요. 영국 비평가들은 미국인의 얄팍한 시선으로 만든 영국 계급사회에 대한 오해 섞인 영화라며 불평 가득이었는데, 햄튼스 배경의 살인 영화 시나리오를 급히 런던으로 옮겨오다 보니 그럴 수도 있었겠죠. 근데 그게 신의 한수이기도 했어요. 구름이 잘 끼는 런던의 하늘은 우리 그이가 작업하기에 최상의 환경을 제공했거든요. “햇빛이 없을 때 모든 게 더 나아 보인다”는 게 이 지독히 귀여운 염세주의자의 지론이잖아요. 이 적당한 잿빛의 런던에서 <범죄와 비행> 같은 도스토예프스키 소설풍 영화에 다시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나봐요.
<매치 포인트>는 런던의 랜드마크를 탁월하게 끌어들인 영화이기도 하답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크리스(조너선 리스 메이어스)가 일하는 거킨 빌딩이죠. 영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노먼 포스터의 디자인을 바탕으로 IRA 폭탄 테러 사고가 있었던 부지에 지어진 모던한 건물인데요, 일부 사람들에겐 흉물 취급을 받기도 했어요. 건물 이름부터가 입에 담기 민망한 오이지(gherkin)를 뜻하는 데다, 핵폭탄 모양 같다는 불만도 많았거든요. 하지만 금융 수도 런던을 상징하는 건물인 건 확실하죠. 영화에 처음 등장할 때도 우뚝 솟아 있는 건물답게 로앵글로 찍혀 있고요, 이어지는 팬을 통해 유리창 너머로 런던 전체를 빙 둘러볼 수 있는 건물임이 느껴집니다. 참, 크리스가 부유한 가문의 사위로 들어가 얻은 신혼집도 템스강과 웨스트민스터사원, 국회의사당을 훤히 내다볼 수 있는 곳이죠. 대도시에서 이런 경치를 누리며 살려면 부와 권력이 있어야 하는 법이네요.
로열 오페라와 로열 코트도 대조적으로 나와요. 영화에서 로열 오페라의 발코니석은 명망 높은 휴윗 가문의 전용 공간이고, 로열 코트는 무명배우인 노라(스칼렛 요한슨)가 오디션에서 퇴짜를 맞고 나오는 곳이죠. 모두 긴 역사와 명성을 자랑하는 공연장입니다만, 외관 분위기부터 달라요. 로열 오페라는 좌석에 따라 9파운드에서 190파운드를 내야 하는 고급 오페라 공연장이고요, 로열 코트는 신진 연출가들의 등용문 역할을 하는 극장으로 아무리 비싼 티켓도 35파운드를 넘지 않는답니다. 예술도 철저히 계급에 따라 나뉘는 거죠. 신분 상승을 꿈꾸는 크리스가 괜히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고 베르디를 듣겠어요?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도 누구는 작품을 보러 가고 누구는 작품을 사러 가잖아요.
그러고 보니 우리 그이가 만든 런던 영화들은 모두 범죄영화였네요. 그것도 돈이나 계급 문제로 인해 벌어진 살인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었고요. 한국 관객은 못 보셨을 <카산드라 드림>도 호텔사업을 꿈꾸는 형과 큰 빚을 진 동생이 삼촌 돈을 노리고 청부살인을 하는 이야기였답니다. 사실 런던은 위대한 범죄소설들의 고향이죠. 특히 베니군이 나오는 <BBC>의 <셜록>은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자본과 계급과 욕망이 복잡하게 얽힌 안개 자욱한 이 대도시가 뿜어내는 기운을 우리 그이도 거부할 수 없었던 모양이에요.
바르셀로나, 사랑과 자유의 도시
우리 그이도 말했지만, 런던은 엄격히 말해 유럽이라 할 수 없어요. 바르셀로나 같은 지중해 도시쯤 돼야 아, 유럽이구나, 소리가 나오죠. 바르셀로나가 낳은 천재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에 따르면 지중해에서 가장 위대한 문화 예술이 꽃피울 수 있었던 건 “지중해변을 45도로 비추는 적당한 빛이 사물의 형체를 최적의 상태로 보여주기 때문”이래요. “빛의 중용”이란 말, 멋있죠? 어찌 보면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도 사랑을 조형하는 데 있어 냉정과 열정의 중용을 저울질해요. 이성에 굳건히 닻을 내리고 있는 학자 타입의 비키(레베카 홀)와 감정에 쉽게 휩쓸리는 예술가 타입의 크리스티나(스칼렛 요한슨)가 각자의 방식대로 한명의 바르셀로나 남자와 관계하는 모습을 보며 그 사이의 균형점을 고민하게 되죠.
물론 바르셀로나는 무엇보다 가우디의 도시 아니겠어요? 자연의 축복을 머금은 자유의 도시에 꼭 어울리는 그의 건축물들은 꿈틀대는 곡선들로 무한한 생동감을 전하죠. 맨해튼의 깎아지른 직선형 마천루만 보며 자란 우리 아이들도 구엘 공원의 미로를 헤매며 즐겁게 놀더라고요. 이렇게 분방한 건축 양식에 몰두한 가우디에 우리 그이도 동일시했나봐요. <가디언>의 청탁에 못 이겨 쓴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현장 일기에 이렇게 나왔더라고요. “이 위대한 스페인 건축가와 난 닮은 점이 많은 것 같다. 우리 둘 다 관습에 저항한다. 그는 황홀한 디자인을 통해서, 난 샤워할 때도 턱받이를 착용함으로써.” 농담이 좀 썰렁해도 이해하세요. 우리 그이가 유아기에 좀 힘든 일이 많았잖아요.
참, 주인공들이 놀러가는 도시 오비에도에 대해 궁금해하는 분이 많던데, 바르셀로나에서 700km 떨어진 북부 도시로 우리 그이의 말에 따르면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마을”이에요. 이곳엔 영화 속 예수상보다 더 유명한 게 있는데, 바로 우디 앨런 동상이랍니다. 우리 그이가 “서구 문명의 최대 미스터리 중 하나”라 부르는 것이죠. 가끔 우리 그이 동상 등짝에 ‘내가 소아성애자다’라고 써붙이는 놈들이 있다던데, 아이고 우리 팔자야….
파리, 예술과 노스탤지어의 도시
예전에 어느 기자가 우리 그이에게 물었어요. “뉴욕을 벗어나 외딴 도시에 살지 않으면 죽게 된다고 할 때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우리 그이 답이 가관이었죠. “나 같으면, 큭큭, 아무래도 죽는 쪽을….” 차를 타기 싫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는데, 남 방귀소리만 들려도 깜짝 놀라 저한테 안기는 양반이니 제가 보듬어주는 수밖에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길(오언 윌슨)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걷겠다고 하잖아요. 딱 우리 그이가 그래요. 물론 파리가 뉴욕처럼 두발로 걸어다니기에 더없이 좋은 도시이기도 하죠. 15년 전쯤 우리 그이가 파리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심각하게 저를 졸랐었는데, 그때 그러더라고요. “파리는 뉴욕이 갖고 있는 모든 걸 그대로 다 갖고 있어. 레스토랑, 극장, 서점이 늘어선 걷기 좋은 거리들, 그 소음과 인파, 그리고 예술.”
아시겠지만, 우리 그이는 <미드나잇 인 파리> 이전에 얼추 ‘미드 나잇 인 뉴욕’이라 할 만한 영화를 만든 적이 있답니다. <브로드웨이 대니 로즈>라고, 1940년대 뉴욕의 공연 예술가들에 대한 동경이 듬뿍 묻어나는 작품이었죠. 한 인터뷰에서는 “쇼 비즈니스 사람들이 쇼가 끝나고 난 뒤 레스토랑과 클럽에서 늦게까지 함께 시간을 보내던 그 시절로 돌아가 나도 함께 어울리고 싶어요”라고 말했을 정도니까요. 아마 우리 그이는 1920년대 파리를 1940년대 뉴욕과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접근했던 것 같아요. 아예 1920년대 파리로 이동해 “뉴욕을 정의한” 콜 포터, 어릴 적 우상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 그가 선망한 20세기 초 미국 예술가들과 함께 매일 밤 술잔을 기울이잖아요. 헤밍웨이의 말이 떠오르네요. “젊은 시절 한때를 파리에서 보낼 수 있게 된다면, 파리는 마치 움직이는 축제처럼 남은 일생에 당신이 어딜 가든 늘 당신 곁에 머무를 것입니다.” 그런 상상에 젖어 있는 이 영화는 우리 그이가 만든 영화 중 가장 축제의 기운으로 충만한 영화일 거예요.
물론 시작부터 파리 주요 관광지를 대놓고 보여주다 보니 파리 홍보 영화냐며 핀잔을 던지는 분들도 계시는데요, 제 눈엔 오히려 현대 파리를 부정하는 영화 같아요. 이 영화가 가고 싶은 곳은 오늘날의 베르사유 궁전과 오르세 미술관이 아니라, 사라져버린 장소 혹은 지나가버린 시대로서의 파리잖아요. 그래서 다리우스 콘지의 카메라도 파리의 밤을 아득하고도 낭만적으로 담아내고 있고요. 이 향수 어린 영화는 일종의 파리 영화 회고전이기도 해요. <파리의 미국인>의 빈센트 미넬리가 방탕하게 뛰놀았던 그 파리, <물랭루즈>의 존 휴스턴이 고독에 몸부림쳤던 그 파리, <프렌치 캉캉>의 장 르누아르가 여인들의 발길질로 벅차게 흔들어댔던 그 파리, 프랑수아 트뤼포와 장 뤽 고다르와 에릭 로메르 등 누벨바그 감독들이 각기 다른 리듬으로 활보했던 그 파리, <플레이타임>의 자크 타티가 잃어버렸던 그 파리, <비포 선셋>의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로맨스의 부활을 꿈꾼 그 파리가 모두 여기 있답니다.
로마, 죽음과 영원의 도시
사실 인용의 목록을 작성하자면, 파리보다 로마쪽이 훨씬 방대할 거예요. 그중에서도 문학가로는 <이탈리아 기행>을 쓴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영화감독으로는 우리 그이가 가장 존경하는 감독 중 하나인 페데리코 펠리니가 으뜸이죠. 잭(제시 아이젠버그)과 모니카(엘렌 페이지)가 한밤중에 고대 로마 목욕탕에 몰래 들어가는 장면은 펠리니의 <로마>에 대한 노골적인 오마주랍니다. 밤이 되면 마치 무덤에서 부활하듯 달빛을 받아 다시 깨어나는 콜로세움과 판테온 신전과 성 베드로 성당과 수많은 이름 모를 유적들 사이를 한없이 누볐던 작품이에요. 거기에 켜켜이 쌓여 있는 2800여년의 시간은 아름다움과 더불어 죽음의 냄새를 풍겨요. 괴테도 로마를 떠나기 전 며칠 밤 마지막으로 이 도시를 둘러보며 “평소에 친숙하던 유물들이 낯설고 유령처럼 보여…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고 썼잖아요. 번개의 섬광에 잭이 모니카를 향해 “우린 죽더라도 같이 죽을 거야”라고 선언하는 장면은 어찌 보면 난데없는데, 달리 보면 로마이기에 자연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죠.
제 생각에 로마 영화들의 또 다른 재미있는 공통점은, 산만함 같아요. 펠리니의 영화들은 물론 파올로 소렌티노의 <그레이트 뷰티>도, 우리 그이의 <로마 위드 러브>도 어딘지 산만하지 않나요? 다른 감독들에 대해서는 잘못 본 걸 수도 있는데, 우리 그이 영화에 대해서는 솔직히 말할 수 있거든요. 길 물어보다 만난 로마 훈남과 결혼까지 하게 되는 미국 여자의 일화부터 하루아침에 아무 이유 없이 셀러브리티가 된 남자의 사연까지,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늘어놨는지 궁금해서 물어보니까 우리 그이가 그러대요. “로마란 도시 자체가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가 축적돼 있는 곳 같아. 로마에서 길 가던 사람 붙잡고 물어보면 다들 그래. 내가 로마를 좀 아는데, 원한다면 이야기를 100만개쯤은 해줄 수 있다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 앞에서 교통정리를 하던 순경도, 스페인 광장 건너편 테라스에서 바람 쐬던 배불뚝이 아저씨도 똑같이 말하잖아요. 긴 역사 때문일까요? “영속하는 로마”를 사랑했던 괴테가 그러긴 했어요. 다른 곳의 역사는 ‘바깥에서 안으로’ 읽어야 하는데 로마의 역사는 ‘안에서 바깥으로’ 읽어야 한다고요. 로마적인 이야기란 것도 마찬가진가봐요. 여러 이야기가 모여 하나로 묶이기보다 한점에서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는 시간, 그 방사형의 역사를 살필 수 있는 곳이 로마랍니다.
남부 프랑스, 태양과 마법의 지대
드디어 우리 그이의 신작 <매직 인 더 문라이트>와 남부 프랑스를 둘러볼 차례네요. 천상인지 지상인지 헷갈리는 코트다쥐르의 해안도로를 한참 달려 이곳에 도착하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리 그이가 여기서 태어났더라면 지금처럼 좋은 영화감독이 될 수 없었을 것 같다는. 이토록 비현실적으로 예쁜 햇빛과 바다를 곁에 두고 살면 누가 굳이 영화관을 필요로 하겠어요. 솔직히 이런 풍경 앞에서 제가 구구절절 떠드는 것도 부질없는 짓인데, 이왕 시작했으니 끝은 내야겠죠.
영화를 안 보셨을 테니 어떤 이야기인지 먼저 알려드려야겠네요. 현실과 환상 사이 어디쯤에 자리한 듯한 1928년의 남부 프랑스, 냉철한 두뇌를 지닌 마법사 아저씨 스탠리(콜린 퍼스)가 따스한 가슴을 지닌 심령술사 아가씨 소피(에마 스톤)를 만나게 돼요. 로맨틱한 설정 같지만, 별로 그렇지 못하죠. 그는 친구의 부탁을 받고 그녀가 사기꾼임을 밝히기 위해 거기에 간 거거든요. 하지만 신통방통한 그녀의 재주에 그도 꼴깍 넘어갑니다. 그리고 삶이 비극이 아니라 마법임을 믿을 수 있게 해줘 고맙다고 호들갑을 떠는데요, 얼마 뒤 그녀의 속임수를 발견하고 다시 실망에 빠져요. 이상한 건 마법이 풀렸음에도 그가 그녀에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강한 끌림을 느낀다는 거예요. 결국 그는 마법 같은 일이 이루어지길 전보다 간절히 바라게 되죠.
<카이로의 붉은 장미> <젤리그> <스쿠프> 등 자신의 모든 영화가 어떤 식으로든 마술과 관련돼 있다고 말해온 우리 그이가 이토록 직접적으로 마술을 다룬 건 거의 처음 같네요. 10대 때부터 해리 후디니를 숭배하며 아마추어 마술을 연마했다는 우리 그이는 “우리 모두의 유일한 희망은 마법”이라 생각한대요. 시나리오가 막힐 때마다 “만일 마법이란 게 없는 걸로 증명된다면 남는 건 그저 단순한 물리학뿐”이라고, 그건 “아주 슬픈 일”이라고 중얼거리곤 한답니다. 그래서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처럼 우리 그이의 작품엔 종종 “마법적 탈출에 대한 동경”이 드러나 있어요. 매사에 부정적인 줄 알았는데 의외라고요? 이번 신작 속 주인공을 보면 그랬구나, 하실 거예요. 세상에서 진짜 마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마법사만이 진짜 마법이 존재하길 진심으로 바랄 수 있잖아요. 우리 그이도 극도로 냉소적인 영화감독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절실히 환상의 힘에 기대는 것 같아요.
우리 그이와 제가 생각하기에 최고의 마술은, 드넓은 우주 속에서 두 인간의 몸과 마음이 만나게 되는 일 같아요. 그러니 두 주인공이 소나기에 쫓겨 찾게 되는 니스의 코트다쥐르 천문대 장면을 주목하세요. 과학적 이성의 영역과 우주적 신비의 영역 사이에 잠시 오작교가 열리는 순간이랍니다. 제 짐작엔 그 짧은 밤 장면을 위해 긴 낮 장면들이, 그 찰나의 어둠을 위해 스크린에 차고 넘칠 만큼의 많은 햇빛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렇지 않다면 자외선에 질색하는 우리 그이가 왜 이런 로케이션에 응했겠어요. 다리우스 콘지의 촬영은 그 많은 태양광을 한없이 따사롭고 부드럽게 조절해 주인공들을 감싸주죠. 덕분에 소피는 태양계의 가장 밝은 행성인 것처럼 빛나고, 스탠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행성의 주변을 맴도는 달이 된답니다. 후반부에 스탠리가 소피에게 고백하는 장면에서 갑작스레 카메라가 빙 도는 것도 공전 운동 때문이에요.
그러고 보면 여행 자체가 마법적 탈출의 한 형태인지도 모르겠네요.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누구나 낯선 곳에서의 행운을 은근히 기대하잖아요. 심지어 지상에서 영원으로 향하는 길목 같은 프랑스 남부에서라면 누구나 기적을 꿈꿀 만하죠. 하지만 그건 우리의 삶이 거대한 무규칙적 축복과 저주에 달려 있는 것임을 인정하는 일이기도 해요. 그렇담 소피 말처럼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이 주는 위안과 행복에 굴복하는 게 나을까요? 전 모르겠어요. 다만 윤회를 믿느냐는 질문에 우리 그이가 근사하게 답한 적이 있답니다. “믿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우린 카드 한벌로 다시 태어나서 마구 뒤섞일 수도 있겠죠.”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그럼 전 우리 그이의 다음 영화 촬영지인 로드아일랜드주의 휴양지 뉴포트에 가야 할 시간이 다 돼서 이만. 아쉽지만 우리 다음 여행지에서 운 좋은 카드 한벌로 다시 만나길 기도해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