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스칼렛 요한슨] 금발로 가릴 수 없는 존재감
2014-09-01
글 : 송경원
<루시> 스칼렛 요한슨
<루시>

모두가 아는 사실을 모두가 아는 방식으로 듣는 건 재미없다. 한눈에 봐도 육감적인 아름다움이 넘쳐흐르는 스칼렛 요한슨의 외모는 고전적인 금발 미녀의 전형에 가깝다. 풍만한 육체에서 묻어나는 성숙한 분위기는 데뷔 초기부터 그녀를 또래의 여배우들과 구별됐다. 또 한 가지 색다른 면은 제시카 알바나 아만다 사이프리드 같은 당대의 여배우들보다 주디 갈런드나 마릴린 먼로와 비교하는 편이 더 편하다는 점이다. 한데 할리우드 고전 스타들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스칼렛 요한슨의 우아함이 그녀의 소탈함과 섞이는 순간 그녀는 인형에서 사람으로 거듭난다. 이 모양이 사뭇 이질적이고 그래서 더 끌린다.

영화가 아이콘에게 바라는 건 살아 있는 표정이 아니라 몇번을 반복해도 망가지지 않는 안정적인 형태다. 몇몇 할리우드 스타들은 이 역할에 충실하다. 필요에 따라 언제든 ‘금발의 고혹적인 미녀’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교체가 가능하고 유의어처럼 소비되는 것이다. 배우는 사라져도 금발의 미녀라는 아이콘은 영생한다. 하지만 스칼렛 요한슨의 존재감을 그녀 이외 다른 배우가 메우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대체 불가능’까지는 아니지만 어떤 작품에서도 자신만의 인장을 남겨온 그녀의 전략은 ‘비슷한 듯, 조금은 다르게’에 있다. 숱한 금발 미녀들 중에서 유독 그녀가 도드라지는 건 묘하게 어긋나면서 새어나오는 외모와 내면의 불협화음 때문일 것이다. 익숙한 외모로 선보이는 조금 다른 캐릭터들은 스칼렛 요한슨이란 이름에 독자적인 인격을 부여했다. 사람들은 그렇게 점차 작품 밖 그녀의 존재를 인지하기 시작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다행히도 레일을 깔아놓은 스타의 길을 걷는 대신 하고자 하는 작품을 비교적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 부모의 적극적인 협조 아래 “주목받는 역할보다 흥미로운 역할 위주로 선택”해온 까닭에 제작사로부터 곧잘 ‘돈 벌 생각이 없다’는 핀잔을 들어왔다고도 한다. 덕분에 당장 영화가 필요로 하는 방향으로 소비되지 않고 자신에게 필요한 조각들을 채워넣으며 탄탄히 연기력을 쌓아나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가령 <판타스틱 소녀백서>에서 보여준 냉소적이고 비틀린 소녀는 그녀의 전형적이고 고전적인 외모 안에서 기이한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빤해 보이는 금발 미녀의 얼굴을 한 채 이제껏 볼 수 없었던 말투, 표정, 행동들을 연달아 선보이는 그녀에게 많은 사람들이 신선함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넌 배우가 되고 싶니, 스타가 되고 싶니?”라는 로렌스 피시번(<함정>(1995)에 함께 출연)의 질문은 어린소녀의 이정표가 되었고 ‘인간의 얼굴을 한 금발 미녀’라는 스칼렛 요한슨의 희소가치는 이때부터 차곡차곡 쌓여갔다.

스칼렛 요한슨의 표정에는 주변의 전형적인 미녀들을 인형처럼 보이게 만드는 일상의 순간들이 묻어 있다. 화나거나 심드렁하거나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 순간의 표정들, 빈 시간의 얼굴들이라고 해도 좋겠다. 그것은 우리가 영화를 통해 익혀왔던 미녀들의 조각된 표정들과는 사뭇 거리가 있는 살아 있는 얼굴이다. 어린 시절부터 “시나리오에 충실한 메소드 연기가 목표”라고 밝혀왔듯 기본적으로는 주어진 역할에 최대한 충실하다. 하지만 그 끝에 꼭 캐릭터와 무관한 자신만의 표정을 남긴다. 훈련이나 통제로 걸러지지 않는 본능의 영역에 있는 흔적들. 전형적인 마스크와 비전형적인 표정들의 부조화. 스칼렛 요한슨이라는 아이콘은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최근의 행보를 보면 이제 그는 확보된 이미지를 적극 활용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물론 늘 그래왔듯 익숙한 것들의 ‘재사용’이 아니라 다시 한번 뒤트는 방향으로 말이다.

<루시>는 스칼렛 요한슨의 표리부동한 이미지를 적극 활용하는 영화다. 이 영화가 스칼렛 요한슨 원톱 영화인 건 단순히 그녀가 시작부터 끝까지 나오는 주인공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생명의 비밀, 진화, 시간과 존재 등 뤽 베송의 추상적인 비전이 스칼렛 요한슨이라는 구체적인 육체를 빌려 표현된다. 그 과정에서 섹시 심벌, 떠오르는 액션 스타, 드라마가 담긴 깊은 눈빛 등 그간 스칼렛 요한슨이 쌓아왔던 모든 이미지를 아낌없이 활용한다. <루시>는 ‘루시’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스칼렛 요한슨이란 다면체를 여러 방식으로 굴려보고자 하는 영화인 셈이다. 재밌는 건 주사위를 굴려가는 방식이다. 퍼레이드처럼 다채로운 면을 전시하거나 캐릭터가 성장하면서 다양한 일면을 보여주는 대신 캐릭터가 아무것도 표현하지 못하도록 요한슨의 얼굴에서 표정을 하나씩 뺏어가는 것이다.

<루시>의 내러티브는 정확히 거꾸로 뒤집혀 있다. ‘루시’의 뇌세포가 100%를 향해 열려가는 과정에서 그녀는 점차 인간적인 부분을 잃어간다. 범죄 집단에 납치되어 공포에 울부짖던 여인은 어느새 덤덤히 사람을 죽일 수 있게 된다. 복수를 위한 냉혹함과는 다르다. 그녀는 더이상 인간이 아닌 다른 차원의 존재로 넘어가기 시작하고 그럴수록 감정의 표현은 줄어든다. 배우에겐 쉽지 않은 난제였을 것이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녀는 점점 무표정해지지만 한편으론 루시가 루시라는 존재로 있을 만한 요소들까지 놓아버려서는 안 된다. “단조롭고 밋밋하게 연기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는 고백이 납득이 간다.

영화는 이 난제를 스칼렛 요한슨의 존재감으로 풀어낸다. 영화 초반, 납치당한 루시가 겪는 공포는 유일하게 인간적인 루시를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지만 이는 블록버스터가 필요로 하는 전형적인 연기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굳이 스칼렛 요한슨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하지만 후반으로 가면서 감정을 잃어갈수록 스칼렛 요한슨이 아니면 안되는 상황으로 변해간다. 뒤로 갈수록 캐릭터 루시의 존재감은 줄어드는 데 반해 그 자리에 스칼렛 요한슨이란 배우의 존재감이 들어차기 때문이다.

관객은 루시에게서 떨어져나간 인간적인 부분을 메우려고 스칼렛 요한슨의 얼굴을 관찰하고 그녀의 피부 밑에 숨겨진 얼굴 근육들을 상상할 수밖에 없다. 루시에게서 캐릭터로서의 표정이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그 자리에는 우리가 보아왔고 알고 있고 기대하는 스칼렛 요한슨의 표정이 더해진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뤽 베송의 애매모호한 개념이 현실화될 수 있었던 건 CG도, 박사의 장황한 이론도 아닌 오직 스칼렛 요한슨의 육체와 그녀가 축적해온 이미지 덕분이다. 목소리만으로 존재감을 드러낸 <그녀>나 인간의 육체만 빌린 외계인을 연기한 <언더 더 스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육체가 없든, 육체만 있든, 혹은 육체가 사라져가는 과정이든 그 다양한 부재를 메우는 건 섹시 심벌 스칼렛 요한슨이 보여줬던 섹시하지 않은 표정의 조각들이다.

<루시> 이후 인터뷰에서 “내가 하는 작품들이 꼭 내 경험을 바탕으로 할 필요는 없다”는 발언은 SF 블록버스터의 여전사들을 연달아 맡아온 것을 의식한 측면도 있지만 그보다 이제는 아이콘으로 소비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신감이 더 눈길을 끈다. 이런 자신감은 그간 소화해왔던 캐릭터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분명해진다고 생각하고 싶다. 스칼렛 요한슨은 캐릭터 뒤로 들어가는 배우가 아니라 캐릭터들을 자신의 자장 안으로 가져오는 쪽의 배우다. 익히 보아왔던 팜므파탈에서 블록버스터 속 여전사, 평범한 이웃집 유모까지 방대한 역할이 스칼렛 요한슨이라는 인물 안에 포섭되어왔다. 본인이 적극적으로 캐릭터 뒤로 숨으려 해도 이제는 미처 가려지지 않는다. 사실 처음부터 그랬다.

그렇다고 그녀가 주어진 역할에 소홀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영화를 고르는 첫 번째 기준은 언제나 명확한 시나리오”라고 할 만큼 역할에 충실하려고 애써왔다. 달라진 건 경험과 여유다. 어떤 역할 안에서도 (사실상 역할을 고를 때부터 염두에 두고 있는 부분이지만) 자연인 스칼렛 요한슨의 흔적들을 일정 부분 가져가려 했던 그녀는 이제는 반대로 프랜차이즈 영화에서 완벽하게 역할만으로 소비되는 데 거리낌이 없다. 사실상 그것이 불가능하므로. 영화 바깥에서부터 시작되는 스칼렛 요한슨이라는 이미지의 크기가 이제는 가려질 수 없는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소비되길 원해도 불가능한 지금, 역설적으로 운신의 폭은 한층 넓어졌다. 블랙위도우는 어벤져스의 소유물만이 아니라 이제는 스칼렛 요한슨의 블랙위도우이고, 우디 앨런 영화 속 인물들은 자연인 스칼렛 요한슨의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다. “세포의 생존 수단은 두 가지다. 번식하거나 영생하거나”라던 <루시>의 노먼 박사의 표현에 빗대자면 그녀는 섹시 아이콘으로의 영생을 거부하고 대신 다양한 역할을 소화한 끝에 맹렬한 기세로 활동영역을 확장 중인, 진화된 섹시 아이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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