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마 스톤을 <어메이징 스파이더맨>(2012~) 시리즈로 가둬놓을 수는 없다. 그에게는 영화 속 스파이더맨인 앤드루 가필드를 현실의 남자친구로 만들어준 보배로운 시리즈이겠지만(최근에는 아이스버킷 챌린지에 동참하며 연인 앤드루 가필드를 다음 타자로 지목하기도 했다), 팬들은 그가 더 많은 역할을 해줄 것이라 믿었고 우디 앨런의 <매직 인 더 문라이트>는 신선한 출구가 됐다. 1988년생 에마 스톤은 여러 TV드라마를 통해 경력을 쌓아가다 <슈퍼배드>(2007), <좀비랜드>(2009), <이지A>(2010) 등을 통해 할리우드의 ‘잇걸’로 등극했다. 또래의 주목할 만한 배우들을 모두 제치고 새로운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한국 음식을 무척 좋아하는) 여주인공 ‘그웬 스테이시’로 발탁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500일의 썸머>(2009)의 감독이기도 했던 마크 웹 또한 이 시리즈의 새로운 감독으로 이름을 올리며 ‘청춘 멜로의 느낌을 강화하겠다’고 밝힌 목표의 중심에 바로 에마 스톤을 올려놓았다. 말하자면 <매직 인 더 문라이트>가 놀랍고도 신선한 것은, <브리짓 존스의 일기>(2001)로 대표되는 영국 워킹 타이틀 멜로영화의 꼿꼿하고 덤덤한 신사 콜린 퍼스와 할리우드 청춘학원물의 발랄한 소녀 에마 스톤이 만났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그들이 만난 곳은 바로 1920년대의 남부 프랑스이자, 우디 앨런의 수다스러운 무대다. 우디 앨런이 직접 출연하지 않은 이유를 감히 짐작하건대 그 또한 그들의 만남을 넋 놓고 쳐다보고 싶지 않았을까.
<매직 인 더 문라이트>에서 유럽을 사로잡은 중국인 스타 마술사 ‘웨이링수’의 정체는 바로 스탠리(콜린 퍼스)라는 이름의 영국인이다. 세계 최고의 마술사이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그 무엇도 믿지 않는 그가, 어느 날 동료 마술사로부터 심령술사 소피(에마 스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영혼을 불러내 무엇이든 맞힌다는 것이다. 소피의 심령술이 가짜라고 확신한 스탠리는 그녀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남부 프랑스로 향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소피는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스탠리의 내면 깊숙한 비밀까지 모두 밝혀낸다. 앞서 소피의 소문을 들려준 스탠리의 동료 마술사는 “도저히 속임수를 찾을 수 없었어. 이 여자(소피)는 진짜인지도 모르겠어”라며 감탄했지만, 스탠리는 절대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무엇이든 맞히는, 더구나 속임수(?)를 절대 알아낼 수 없는 그 신통방통한 능력에 스탠리는 고개를 숙인다. 물론 여전히 소피가 의심스럽지만, 도저히 자신의 능력으로 밝혀낼 수 없는 걸 어쩌란 말인가.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피의 아름다운 인품이다. 소피가 카트리지 부인(재키 위버)의 죽은 남편을 불러내 대화를 시도하는 것을 보고 스탠리는 “헛된 희망을 주는 것”이라고 말할 때, 소피는 “사람들의 꿈과 희망을 짓밟는 것은 잔인한 일”이라고 맞선다. 말하자면 ‘소피의 매직’은 출세나 사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변 모든 사람들의 ‘힐링’을 위한 것이었다. 이후 혼란에 빠진 스탠리는 설상가상 소피의 묘한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수영하러 갈 건데, 수영 안 하시죠?”라는 물음에 당장 수영복을 사서 바다로 향하고, 소피 앞에서 엇박자 ‘몸치’로 춤까지 춘다. 그렇게 에마 스톤 특유의 해맑고 큰 눈망울과 결코 거짓을 말할 것 같지 않은 시원한 입매는, 소피의 인품과 결합하여 스탠리의 신념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는다. ‘이성’만이 삶의 진리라고 믿었던 스탠리에게 또 다른 세계를 열어준 것이다.
<매직 인 더 문라이트>와 묘하게 대구를 이루는 작품은 바로 <이지A>다. 그 영화에선 ‘남에게 주목받고 싶다’는 치기어린 생각으로 (소피와 달리) 거짓말을 내뱉었었다. 지난 주말 한 대학생 오빠에게 순결을 잃었다는 올리브(에마 스톤)의 얘기는 순식간에 학교에 퍼지고, 온갖 루머에 시달리며 유명세를 타게 된다. 자신을 언제나 ‘듣보잡’이라 여겼던 올리브는 오히려 그 위험한 시선을 즐긴다. 그런 가운데 올리브의 눈앞에 진정 사랑하는 남자가 나타나게 되고, 그 사랑을 잡기 위해 뒤늦게 그 소문을 바로잡으려 고군분투한다. 주목받고 싶다는 무심한 행동이 어떤 원치 않는 결과를 이끌어내는지 보여주는 <이지A>에서, 잔인할 수도 있는 여러 상황을 돌파하는 것은 에마 스톤 특유의 개성이다. 무엇보다 올리브는 <주홍글씨>를 할리우드 청춘영화 버전으로 옮겨놓은 이 영화에서 그야말로 대책 없이 당당하다. 소문이 어떻게 왜곡되어 퍼져나가더라도 신경 쓰지 않으며, 오히려 그런 가운데 자신을 걱정해주는 척하는 어른들의 위선을 꼬집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웃음을 잃지 않고 당당하게 돌파하는 그 모습은 <매직 인 더 문라이트>의 소피도 마찬가지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심령술에 그 어떤 의문을 제기해도 별 흔들림이 없다. 그럴 때마다 큰 눈을 더욱 반짝이며 그저 보여줄 뿐이다.
<헬프>(2011)에서 흑백 차별이 여전하던 1960년대, 흑인 가정부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어보자고 용기 있게 제안할 때도 스키터(에마 스톤)의 눈빛은 빛났다. <슈퍼배드>를 시작으로 <좀비랜드>를 거쳐 <크레이지 스튜피드 러브>(2011)에 이르기까지 코미디영화는 물론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처럼 대규모 블록버스터, 그리고 온 도시가 총성에 휩싸인 1949년을 배경으로 숀 펜과 라이언 고슬링, 조시 브롤린과 함께한 갱스터 범죄드라마 <갱스터 스쿼드>(2013)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갱스터 스쿼드>에서 무료한 삶을 살아가는 형사 제리(라이언 고슬링)는 원치 않는 싸움에 휘말려 냉혹한 갱스터 미키(숀 펜)의 아름다운 정부 그레이스(에마 스톤)와 격정적인 사랑에 빠졌었다. 그처럼 에마 스톤은 고유의 이미지를 계속 확장하면서 시대와 장르를 넘나드는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다. ‘정말로 그 정도인가?’ 싶지만 에마 스톤은 <포브스>에서 선정한 2013년 ‘가장 가치 있는 배우’ 1위에 올랐고, 할리우드 여배우 수입 5위에 랭크되기도 했다.
그런 에마 스톤에게 콜린 퍼스와 남부 프랑스를 여행한, 그리하여 사실상의 첫 번째 해외 작업이라 부를 만한 <매직 인 더 문라이트>는 쉼표이자 전환점이 됐다. 무엇보다 콜린 퍼스가 작가로 나온 <러브 액츄얼리>(2003)를 무려 20번 가까이 봤다는 에마 스톤에게 콜린 퍼스와의 작업은 무척 설레는 일이었다. <러브 액츄얼리>를 다시 보면서 감탄의 문자 메시지(‘와, 당신이 이 장면, 저 장면에서 이렇게 저렇게 했군요!’)를 보낸 에마 스톤에게 콜린 퍼스는 “나의 흑역사를 들추지 말아요”라고 응수했고, 에마 스톤은 “나보다 우리 어머니가 당신의 더 열렬한 팬이에요”라고 답했다. 물론 기본적으로 코미디와 풍자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에마 스톤에게는 우디 앨런과의 만남 자체가 황홀한 순간이었다. “우디 앨런은 언제나 훌륭한 여성 캐릭터를 만든다”는 것이 또 다른 출연 이유였고, 그의 작품들 중에서는 우디 앨런이 사촌뻘되는 유부녀 소냐를 사랑하는 청년 보리스 그루센코로 출연하고 연출까지 했던 <사랑과 죽음>(1975)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한다.
가장 신선한 경험은 역시, 언제나 규격에서 벗어나 있고 완벽한 대본이 없는 우디 앨런의 현장 그 자체였다. 롱테이크 안에서 에마 스톤은 종종 연기에 대한 의문에 휩싸일 때가 있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우디 앨런은 별다른 얘기가 없었다. 하지만 뿔테 안경 속 무표정한 얼굴은 우디 앨런이 보내는 최고의 찬사였다. 언제나 명랑하고 활달한 감독들과 작업해온 그에게는 어색한 순간의 연속이었지만 점차 적응해갔다. 그리고 긴 컷을 이어가야 하는 호흡과 앙상블의 묘미도 깨닫게 됐다. 물론 “매번 언제 잘릴지 몰라 불안했다”고 웃으며 얘기하지만 에마 스톤에게 <매직 인 더 문라이트>는 그 자체로 연기의 새로운 문을 열어준 ‘매직’의 순간이었다.
magic hour
곧 꿈을 터뜨릴 맑은 눈동자
타자기 앞의 에마 스톤, 그 큰 눈은 거의 뿔테 안경 렌즈의 크기와 맞먹을 정도다. 1960년대 미시시피 지역 흑인 가정부들의 이야기 <헬프>에서 스키터(에마 스톤)는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지역 신문사에 취직한다.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해 정원과 가정부가 딸린 집의 안주인이 되는 게 최고의 삶이라 여기는 친구들과 달리 스키터는 지역 신문사에서 살림정보 칼럼의 대필을 맡으면서도 차근차근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간다. 흑인 가정부가 주인집 안방의 화장실을 썼다는 이유로 쫓겨나던 시대, 스키터의 희망과 용기는 그 흑인 가정부들의 눈이 되고 입이 된다. 인종 문제를 관습적이고 안전한 방식으로 다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흑인 가정부들의 인생을 책으로 써보자고 말하는 스키터의 거짓 없는 존재감은 그런 혐의마저 초월하는 뭔가가 있다. 어떤 순간에도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조금씩 발걸음을 내딛는 씩씩한 모습, 에마 스톤이 연기해온 그 모든 캐릭터에 흐르고 있는 특별한 표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