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뤽 베송 버전의 진화론 <루시>
2014-09-03
글 : 송경원

루시(스칼렛 요한슨)는 범죄조직에 납치되어 특수한 약물의 운반책이 된다. 이송 중 배 안의 주머니가 터지면서 대량의 약물에 노출된 그녀는 인간이 사용할 수 없던 뇌 기능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초인적인 힘을 얻는다. 뇌 기능 100%를 향해 달려가는 그녀는 이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기 위해 노먼 박사(모건 프리먼)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한편 루시 때문에 엉망이 된 범죄조직의 보스 미스터 장(최민식)은 복수를 위해 그녀를 뒤쫓는다.

<제5원소>와 유사한 SF 액션을 예상했다면 당황할지도 모른다. <루시>는 초능력을 얻은 여인의 복수담과 액션보다 그 결과 도달할 수 있는 진화와 지식에 대한 질문에 집중한다. SF적인 설정과 발빠른 전개는 이를 위한 양념에 불과하다. 뤽 베송 특유의 빠르고 시원한 액션이나 카스턴트, 초능력이 주는 볼거리 등을 제공하지만 핵심은 진화의 끝이 인류를 어디로 데려갈 것인지,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한 뤽 베송의 비전에 있다. 뤽 베송 버전의 창세기 혹은 진화론이다.

사실 영화가 도달하는 결론이 새롭거나 혁명적이진 않다. 하지만 이를 설명하는 방식이 실로 경제적이라는 점에서 여느 블록버스터와 차별화된다. 90분이라는 상영시간이야말로 이 영화의 핵심이자 정체성이랄 수 있는데, 오락영화로서 지루하지 않도록 한계선을 지키면서 감독의 비전을 효율적으로 제시하려 애쓴다. 나름 지적인 유희를 즐긴다는 기분을 주면서도 결코 어렵진 않다는 점, 맨몸 액션은 거의 없고 액션 자체도 소박하다는 점이 영화의 지향을 일러준다. 각 인물들의 동기가 어느 정도 생략되어 있어 다소 뜬금없게 느껴지는 장면들도 많지만 쓸데없는 액션 장면만 반복, 나열하는 영화들보다 훨씬 깔끔하다. 요컨대 적절한 캐스팅과 감독의 야심, 적당한 액션으로 버무려진 기획의 승리다.

특히 연약한 여성에서 여전사까지, 그간의 이미지를 적절히 활용하는 스칼렛 요한슨의 안정적인 연기는 여배우 원톱 액션에서 그녀를 대체할 만한 이가 많지 않음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미스터 장 역의 최민식의 살벌한 연기도 인상적인데, 스테레오 타입에서 벗어나지 않는 캐릭터에 피가 돌게 하는 건 오직 최민식의 존재감이다. 참고로 뤽 베송 감독은 한국어에 일체 자막을 달지 않음으로써 루시의 고독감과 두려움을 배가시키려 했다고 하는데 한국 관객만이 전혀 다른 체험을 즐길 수 있게 된 점도 재미있다. 아마도 역대 외화 중 가장 깔끔하고 인상적인 한국어 연기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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