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가을로 시작한다.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듯 여행 가방이 펼쳐져 있고 다마코(마에다 아쓰코)는 방에 엎어져 자고 있다. 아버지(간 스온)가 방문을 두드려도 다마코는 쉽게 일어나질 않는다. 일어난다고 해도 그녀가 하는 일은 거의 없다. 가을이 지나 겨울이 올때까지도 다마코의 생활은 변함이 없다. 참다 못한 아버지가 대학까지 나온 애가 왜 이러고 있느냐며 딱 한번 화를 내지만, 다마코는 할 수 없다는 듯이 말한다. “할 거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다마코는 그렇게 그녀만의 ‘모리토리엄’ 시기에 머물러 있다. 혼자 사는 아버지에게 만나는 사람이 생기자 다마코에게도 서서히, 아주 서서히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모라토리엄이 다마코의 한 시기라는 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모라토리엄은 흔히 채무자의 법적인 지불이행 유예를 말한다). 무언가 유예되고 중지되고 지연되어 있는 시기라는 뜻일 것이다. 그녀가 하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영화가 보여주는 드라마틱한 일화는 거의 없다. 어느 면에서 영화는 심심하고 무료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누워 있는 다마코, 청소하는 아버지, 그들 사이에 오고 가는 최소한의 말, 느려터진 움직임들뿐인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생활을 리듬으로 유연하게 엮어낸 것은 장점이다. 감독 야마시타 노부히로의 기존의 수작들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 <린다 린다 린다> <마이 백 페이지> 등에 비교한다면 다소 평범해 보이지만, 주인공의 상태와 영화 형식의 어울림은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