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24일 일기에 <드래곤 길들이기> 1, 2편과 <스타워즈 에피소드5: 제국의 역습>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로빈 윌리엄스가 영화를 두고 세상을 떠났다. <스토커>(One Hour Photo)의 고독한 사진현상소 직원 싸이는, <인썸니아> <스무치에게 죽음을>의 배역과 더불어 윌리엄스의 3대 악역이다. 아무 특징 없는 외모와 흔해빠진 옷, 교과서적인 말투를 통해 로빈 윌리엄스는 싸이를 철저한 ‘노바디’로 연기한다. 그러나 무색무취한 이 남자의 내면에는 <택시 드라이버>의 트래비스(로버트 드니로)와 통하는 분노가 도사리고 있다. 에너지를 제어하는 데에 막대한 에너지를 투여한 훌륭한 연기다.
7/24
딘 데블로이스 감독은 인터뷰에서 <드래곤 길들이기2>를 <스타워즈> 오리지널 3부작의 2편 <제국의 역습>에 비한 적이 있다. 1편의 주제를 심화하고 새로운 캐릭터의 도입으로 이야기를 제대로 확장하는 속편을 추구한다는 의미였지만, 기사를 읽은 나는 두 영화의 주인공들이 가진 빤한 공통점부터 떠올렸다. <제국의 역습>에서 루크(마크 해밀)는 한팔을 잃는다. <드래곤 길들이기>의 히컵은 1편 말미에 한쪽 다리의 무릎 아래를 잃는다. 가족 관객이 타깃인 데다가 연작으로 기획된 할리우드 주류영화가 주인공을 영구적인 신체장애를 가진 캐릭터로 설정한 희귀한 예다. 히컵의 파트너인 용 투슬리스도 1편 서두에 꼬리를 다쳐 비행 능력에 손상을 입지만 히컵이 만들어준 보조기구로 다시 하늘을 날 수 있게 된다. 제작사 드림웍스와 감독은 이 암울한 설정을 가족 관객이 과연 받아들일까 염려했으나 테스트 시사에서 “주인공들이 뭔가를 잃어서 슬프지만 더 큰 것을 얻는 이야기라 감동적이다”라는 반응에 안심했다고 전해진다. <드래곤 길들이기2>에 이르러 히컵의 의족과 투슬리스의 인조꼬리는 기계장치를 통해 한몸처럼 연결되어 완전한 비행체를 이룬다. 테스트 시사회 관객이 위안한 대로 “걷는 다리를 잃은 대신 나는 다리를 얻었다”고 깔끔히 정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히컵은 부상을 계기로 슈퍼 파워를 얻는 히어로가 아니다. 이야기 순서를 보아도 소년의 불구는 투슬리스의 우정이나 탁월한 비행솜씨와 맞교환한 기회비용이 아니라 별개로 일어난 불행한 사고다. 어느 모로 보나 아예 일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을.
대다수 대중영화의 스토리는 ‘전부 아니면 무’를 금과옥조로 삼는다. 중도에 시련을 거칠지언정 주인공은 방탄조끼라도 입은 양 궁극적으로 A부터 Z까지 모든 걸 얻는 반면 최종 승부의 패자는 전부 잃는다. 승자가 도중에 입은 상처에는 꼼꼼히 새살이 돋고, 저지른 실수는 행운으로 덮여 찜찜한 앙금을 관객의 머리에 남기지 않는다. 요컨대 현실의 삶과 달리, 밑지는 일은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드래곤 길들이기> 1, 2편은 “메워지지 않는 손실”을 안고 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특이한 대중영화다. 투슬리스와 히컵의 부상은 숱한 할리우드영화 주인공들과 달리 감쪽같이 치유되지 않는다. 그저 보조 장구의 도움으로 남들보다 훨씬 힘들게 다른 사람, 다른 용과 비슷한 수준으로 활동할 뿐이다. 딘 데블로이스와 크리스 샌더스(1편의 공동연출자) 감독을 포함한 <드래곤 길들이기>의 작가진은 결과를 위한 비용을 치르고 때로는 손실도 감수하는 내러티브를 수용한다. 1편에 히컵과 투슬리스의 치명상이라는 손실이 있다면, 2편에서는 나쁜 용의 최면에 걸린 투슬리스가 히컵의 아버지를 해치는 ‘로미오와 줄리엣’적인 비극이 닥친다. 히컵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끼리 죽고 죽인 것이다. 어린이 관객은 물론 성인 관객에게도 딜레마를 안기는 전개다. 비탄에 빠진 히컵은 시험에 들고, 청년과 용의 우정은 영원히 얼룩진다. 표면적 서사가 전투에서 승리하는 결말로 끝난 후에도 이 그늘은 걷히지 않는다. 그냥 안고 다음 이야기로 나아갈 따름이다. <드래곤 길들이기2>에서는 완전무결한 우정뿐만 아니라 영웅의 이상도 손상된다. 1편에서 진심으로 설복하면 상대가 누구라도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믿고 실천한 평화주의자 히컵의 신념은 2편에 와서 무참히 고꾸라진다. 청년은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상황도 있음을 체험하고 무력감을 맛본다. 한번 찾은 열쇠로 인생에 도열한 모든 문이 열리진 않는다. 이 영화는 묻는 듯하다. 흉터 없는 육신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별 없는 관계가 무슨 의미란 말인가?
<드래곤 길들이기> 시리즈는 영웅의 상실을 상쇄할 더 폼나는 성취를 제시해 “밑지지 않았다”고 관객을 서둘러 안심시키지 않는다. 히컵이 잃은 것이 큰지, 얻은 것이 큰지의 저울질은 당장 판가름나는 게 아니라, 상실 이후의 시간을 청년이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걸려 있다. 이 점이 3부작으로 기획된 이 프랜차이즈의 3편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 실제로 기다려지는 까닭이다. <드래곤 길들이기>는 적만 바꿔가며 같은 패턴의 모험이 계속되는 프랜차이즈가 아니라, 분명한 시작과 끝을 염두에 두고 삶에 포함된 이별의 불가피함을 아는 서사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해리 포터> 시리즈와 <토이 스토리> 3부작의 미덕이기도 하다. 크레시다 코웰의 원작이 어른이 된 히컵의 회상으로 서두를 뗀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드래곤 길들이기> 시리즈가 감내할 마지막 상실은 히컵과 투슬리스의 이별일 공산이 크다. 힘없고 ‘빽’ 없는 관객인 나로서는 드림웍스가 욕심으로 변덕을 부려 “고객이 노할 때까지” 연작을 연장하는 불상사가 없기만 염원할밖에.
8/1
“고통은 체감되기를 요구한다.”(Pain demands to be felt.)
<안녕, 헤이즐>에서 열일곱살의 말기암 환자 헤이즐 그레이스 랭카스터(셰일린 우들리)는, <거대한 역경>이라는 소설에서 읽은 이 문장에 깊이 공감한다. 급기야 작가에게 존경심을 전하기 위해 암스테르담에 여행까지 간다. 영화의 슬로건 역할을 하는 구절인 셈이다. 좀 의외였다. 첫째는, 조금의 통증도 즉각 제거해야 직성이 풀리고 노화는 거의 죄악시되는 시대에 속한 오늘날의 10대들이 <안녕, 헤이즐>의 주요 독자/관객이라는 점에서였다. 둘째, 산소통을 끌고 다니며 근근이 숨 쉬는 헤이즐이야말로 세상 누구보다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아이여서다. 하지만 이 두드러진 의연함이 바로 <안녕, 헤이즐>이 스스로를 차별화하는 카드다. 영화는 우울증을 진단받았다는 헤이즐의 독백으로 문을 연다. 진짜 문제인 암보다 그것의 심리적 부작용을 먼저 언급하는 것이다. 환자 모임에서 만나 헤이즐과 사랑에 빠지는 거스(앤설 엘고트)는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수시로 입술에 문다. “나를 죽일 수 있는 물건을 입에 넣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나를 파괴할 힘은 주지 않겠다”는 태도를 시위하는 ‘메타포’라고 소년은 설명한다. 다시 말해 병한테 누가 보스인지 본때를 보이겠다는 소리다.
조숙하고 사려 깊은 중병 환자 캐릭터야 그리 새삼스러울 게 없다. <안녕, 헤이즐>이 눈길을 끄는 대목은, 그런 속성들이 두 주인공을 어느 10대가 봐도 부러운 매력 있는 이상형 동년배로 그려내는 데에 쓰였다는 점이다. 헤이즐과 거스는 관객에게 연민을 부르지만 그보다 더 큰 동경의 대상이다. 그들은 예쁘고 똑똑하며 재치 있는 대화를 끌어갈 유머 감각이 있고, 죽어가고 있기에 반론할 수 없는 도덕적 권위마저 갖는다. 둘의 부모는 절대적으로 자식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무엇보다 오버하지 않는다. 특히 헤이즐과 거스가 가파른 계단이 즐비한 안네 프랑크 하우스를 구태여 방문해 관광객의 갈채 속에 꼭대기 층에서 입맞춤을 나누는 장면은, 이 영화가 지닌 자아도취적 면모가 불거진 대목이다. <안녕, 헤이즐>의 주인공들은 엄밀히 말해, 고통 속의 인간이라기보다, 고통을 겪는다고 설정된 매력적인 인간으로서 관객의 주의를 사로잡는다. 할리우드의 유구한 관습법을 따른 것이긴 하나, 병세가 아무리 악화되어도 스크린 속 주인공들의 피부와 머리카락은 윤기를 잃지 않는다. 거스의 재기발랄한 친구는 암으로 안구를 적출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슬픔과 공포를 극구 아이로니컬한 농담으로 승화하는데, 정도가 좀 지나쳐 병의 무게가 가벼워 보일 지경이다. <안녕, 헤이즐>을 통틀어 질병의 통각과 악취를 직설적으로 전하는 장면은, 급격히 몸이 나빠진 소년이 담즙을 토하는 후반부의 한신 정도다. 헤이즐의 회상이 이어진다. “슬프게도 그는 끝까지 쿨하진 못했다.” 관객은 그녀의 전언만 들을 뿐, 해당되는 장면은 목격하지 못한다. 어불성설이지만 나는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기로 결정한, 이 존재하지도 않는 장면이 제일 눈에 밟혔다. 살면서 직간접적으로 터득하게 되듯, 육체의 아픔은 사람의 일관성과 정신의 품위도 망가뜨린다. 그것이 우리가 질병을 그토록 깊이 무서워하는 이유다. 결국 <안녕, 헤이즐>은 주인공이 좋아한 인용구와 달리 관객에게 고통을 ‘체감’시키지는 않는다. <안녕, 헤이즐>의 실질적 모토는, 오히려 거스가 헤이즐에게 처음 다가가며 던진 말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바라보는 게 좋아.”
8/9
나는 누선이 고장난 게 틀림없다. 전세계를 울린 <안녕, 헤이즐>은 멀뚱히 앉아서 봐놓고, 결백한 인물이라곤 없고 감시와 협박, 거래로 점철된 <모스트 원티드 맨>을 보는 도중 돌연 왼쪽 갈비뼈가 뻐근해오더니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와 <모스트 원티드 맨>은 첩보소설의 대가 존 르 카레가 원작을 쓰고 영화 제작까지 총지휘한 작품이다.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가 첩보원으로 산다는 것에 관한 멜랑콜리한 시(詩)라면, 안톤 코르빈 감독의 <모스트 원티드 맨>은 촘촘한 문장이 벽돌처럼 쌓아올려진 산문이다. 전자에서는 행간이 중요하고, 후자에서는 장면끼리의 빡빡한 마찰이 중요하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유럽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전•현직 스파이들의 과거와 현재를 하나의 무드로 아우르는 반면, <모스트 원티드 맨>은 현재 시제에 발 딛고 함부르크 시내를 메주 밟듯 뛰어다니며 단일 사안을 해결하기 위해 공격적 협상을 한뼘씩 밀어붙인다. 두 영화는 모두 요즘 극장에서 만나기 힘든 ‘어른의 드라마’다. 어른의 드라마라는 표현을 쓰며 내가 떠올리는 그림은, 자신을 괴롭히는 부패하고 부조리한 세계를 형성하는 데에 스스로 일조한 다음 그 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중년의 모습이다. 그는 젊은이들처럼 “왜 이따위 세상을 만들었느냐”고 기성세대를 원망할 입장이 못된다. 그렇다고 칵 죽을 수도 없다. 행복하긴 글렀지만, 지키고 싶고 어쩌면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르는 가치와 사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연륜이 손아귀에 쥐어준 한줌의 힘으로 세상이 더 나빠지는 걸 막는 데에 힘을 보태는 것만이, 삶의 정당성을 방어하는 마지막 보루다. 존 르 카레의 인물들은 희망 없이, 거대한 피로의 하중에 깔린 채 노력한다. 줄담배와 알코올에 기대어 낡은 몸을 질질 끌고.
<모스트 원티드 맨>의 독일 첩보조직 팀장 귄터 바흐만(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은 함부르크에 밀입국한 러시아계 모슬렘 청년 이사 카르포프가, 오랫동안 이슬람 테러조직의 자금줄로 의심해온 자선사업가 압둘라와 연결되리라는 사냥꾼의 직감을 품는다. 그의 후각은 적중한다. 그러나 귄터의 최종 목표는 압둘라를 응징하고 이사를 추방하는 것이 아니다. 귄터가 보기에 압둘라는 테러의 조직적 후원자가 아니라 기부금의 누수를 눈감는 행위로 동포들의 희생을 보며 느낀 울화를 남몰래 달래는 인물이다. 한편 이사는 그저 서방에서 새 삶을 시작하려는 혈혈단신의 청년으로, 그가 과거에 어떤 정치적 행동을 했는지는 귄터가 알 바 아니다. 귄터의 판단에는 상대적으로 무해한 두 남자를 응징하느니 적당히 을러대고 원하는 것을 제공해 압둘라와 연결된 거물의 꼬리를 잡는 편이, 이 세계를 보다 안전한 곳으로 만드는 목표에 훨씬 유용하다. 그러나 테러와의 비타협적 전쟁을 선포한 미국 정부와 국제정치 관료주의의 눈으로는 미디어에 발표할 실적과 ‘본때 보여주기’가 우선이다. 그들에겐 세계가 보다 안전해졌다는 ‘이미지’가 더 중요하다. 반면 존 르 카레 소설과 영화의 첩보원들은, 국제정치의 최전선에 있지만 이데올로기에 무심하다. 어느 진영이 궁극적으로 정당한지 지식인들이 사색하고 정치인들이 차기 외교 정책을 짜는 동안에도 계속되는 긴장을 ‘관리’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귄터와 동료들은 어느 쪽이 정의롭건 현행 대립 구도 안에서 정보를 거래하고 협상과 협박을 구사해 국가간의 치명적 무력 충돌을 방지해야 한다. 예컨대 귄터는 도청과 납치로 인권침해를 자행하지만 이를 통해 이사를 당장 잡아 없애야 할 악당으로만 보는 CIA로부터 보호한다. 자기행동에 포함된 선과 악의 총량이 어느 쪽이 무거운지 오리무중인 상황에서도, 최소한 본인이 믿는 차악을 최악과 교환하려고 사력을 다해야 한다는 신조가 귄터의 철학이다. 하지만 세상은 있지도 않은 최악과 최선의 대차대조표에만 관심이 있고, 권터에게 철학 따위는 기대하지도 않는다. <모스트 원티드 맨>은 그래서 슬프고 분하고 장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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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만의 작전 타임
다큐멘터리 <60만번의 트라이>는 오사카조선고급학교 럭비팀의 일본 전국대회 우승 도전의 기록이다. 유방암 치료 중이라 허약해진 와중에도 누나의 시선으로 선수들을 지켜보는 박사유 감독의 마음이 은연중에 카메라에 반영되어 따뜻하다. 스포츠가 소재인 만큼 작전회의가 몇 차례 나오는데 감독 없이 주장을 중심으로 선수들끼리 반성하고 태세를 가다듬는 광경이 감동을 준다. 개구쟁이 같기만 하던 주장은 “상대팀은 넘어지지 않겠다는 의지 자체가 남다르네. 쓰러져서도 계속 전진하려는 점을 본받자”라고 분석한다. 벡스 한명이 포워드들의 소극성을 대놓고 타박하면 다른 벡스가 “너희가 치고 나가면 우리가 받쳐줄게”라고 온화하게 거든다. 스포츠 만화에나 어울릴 법한 정색한 ‘대화’인데도 닭살이 돋지 않는 건 그들의 무한한 자발성과 긍정성을 이미 우리가 보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