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타자, 그림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 재일조선인. 그들의 목소리에 전심으로 귀기울여온 이들이 있다. 오사카조선고급학교 럭비부의 생활을 3년간 기록한 <60만번의 트라이>의 박사유, 박돈사 감독이다. 영화의 개봉(9월18일)에 맞춰 두 감독이 한국에 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만나자고 연락을 했다. 이 자리에는 혹가이도조선초중고급학교를 3년간 촬영한 다큐멘터리 <우리학교>(2006)의 김명준 감독도 초대했다. 세 감독이 3시간여 동안 나눈 대화는 결국 하나로 정리됐다. ‘재일조선인, 재일동포 그들이 여기에 있다.’ 존재의 증명이자 인정의 투쟁이었다.
“한강에는 처음 왔습니다.” 사진 촬영을 위해 들른 한강에서 ‘문학소년’ 같은 박돈사 감독이 휴대폰으로 연신 사진을 찍고 있었다. 재일동포 3세인 그는 서울을 남북으로 가르는 한강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뒤따르던 박사유 감독이 가쁜 숨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2008년 유방암으로 항암 치료를 시작한 이후 마음 같지 않은 몸이다. 하지만 걷는 내내 <60만번의 트라이>(이하 <60만번>) 얘기만 하는 걸 보면 마음이 몸을 앞서는 건가 싶기도 하다. 박사유 감독은 2002년 서울을 떠난 뒤로 “참으로 오랜만에 한강에 온다”며 웃어 보인다. 서울에 거주 중인 김명준 감독도 한강 나들이는 쉽지 않았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부문에 출품하는 <그라운드의 이방인> 막바지 작업 중인 데다 몽당연필(2011년 일본 대지진 이후부터 지금까지 국내에서 조선학교의 가치를 알리는 모임.-편집자)의 사무총장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흔쾌히 한자리에 모인 세 감독이 한강을 등지고 사진을 남겼다. 이후 자리를 옮겨 늦은 점심을 먹으며 세 감독에게 재일동포를 기록하는 이유를 묻고 또 들었다.
씨네21_올해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에 이어 <60만번>이 정식 개봉한다.
박사유_한국 개봉 소식에 재일동포들이 정말 기뻐해주셨다(일본에서는 3월15일부터 지금까지 전국에 걸쳐 상영 중이다.-편집자). <우리학교> 팬카페 회원들도 영화를 기다려주셨고. 언론시사 때 팬들과 시민운동가, 활동가들이 많이 와주셨다.
박돈사_한국에서도 많은 분들이 마음속으로 조선학교를 응원해주시더라. 영화가 아니라 영화에 나오는 아이들을 응원하시는 거다.
씨네21_그러고 보니 박돈사 감독은 전주에 이어 두 번째 한국 방문인가.
박돈사_10살 때쯤인가. 이모가 계신 부산을 방문한 적이 있다. 버스를 탔는데 아주머니가 본인 짐을 아무 말도 없이 내 다리 위에 올려놓으셔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웃음) 사촌들도 그때 처음 만났다. 어제 된장국을 먹었는데 그때 이모가 끓여준 맛이 생각나더라. 어렸을 때 한국에 오지 않았다면 이런 걸 느끼지 못했을거다.
씨네21_<60만번>의 엔딩 크레딧 스페셜 땡스에 김명준 감독이 있더라. 영화 개봉의 숨은 조력자라고 들었다.
김명준_그런 유언비어는 믿으면 안 된다. (웃음) 사실 두 감독에게 욕을 많이 했다. <60만번>을 만들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영화가 안 나오니까 나도 답답하더라. 그래서 ‘빨리 만드시라’고 했다. 감독은 그냥 놔두면 만족할 때까지 편집을 하는 사람이다. 누군가가 기한을 딱 정해줘야 끝낼 수 있다. ‘기한을 두고 작업하시라’고 말한 게 다다.
박돈사_지난해 4월에 일하던 책방을 그만뒀다. 명준 감독이 ‘그해 안에 만들어서 한국 들어오세요’라고 한 말 때문이다. 그때부터 편집에 들어갔다. 2006년쯤 <우리학교> DVD를 직접 구매해서 봤다. 그 영화로 조선학교 아이들을 처음 본 거다. 그 후 지금껏 명준 감독은 내게 저 먼, 구름 위의 존재였다. 단순히 영화를 좋아하던 내가 영화로 많은 걸 배우고 있다.
씨네21_박사유, 김명준 감독은 언제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가.
김명준_2007년 도쿄에서 <우리학교> 상영회를 할 때 당시 언론사 통신원이던 박사유 감독이 나를 인터뷰했다. 그때 처음 봤다. 이후에는 전혀 교류가 없다가 2011년 3월11일 동일본 대지진 때, 몽당연필에서 동포들 소식을 수소문하던 차에 두 감독이 지진 피해 지역인 미야기현 센다이로 향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두분과 접촉을 했고 이후 일본에 가면 만났다.
박사유_박돈사와 딱 세 가지 목표를 갖고 그곳으로 향했다. 동포들의 안부를 확인하자, 비상식량을 전해드리자, ‘위안부’ 피해자 송신도 할머니의 생사를 확인하자. ‘가스가 필요하대요, 휘발유가 모자랍니다’라고 단신을 전하면 오사카 동포들이 물자를 보내주었다.
굉장한 럭비부와의 만남
씨네21_그간 재일동포와 오랫동안 생활해왔다. 특별히 오사카조선고급학교(이하 오사카조고) 럭비부를 찍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뭔가.
박사유_럭비부와는 2007년 ‘오사카조고 운동장 소송’(오사카시가 운동장의 소유권을 주장해 2년간 재판을 벌인 일이다.-편집자)으로 인연을 맺었다. 운동장이 배수가 안 돼 완전 갯벌이었다. 동포들이 트럭을 몰고 어디 가서 흙을 싣고 와 직접 깔았다. 코치선생님도 경트럭에 곡괭이같은 걸 매달고 운동장을 돌았고. 동포들의 손과 발로 다져진 운동장이다. 그 땅에서 럭비부 아이들이 뛰고 경기가 끝나면 90도로 인사를 하고 수돗가로 가서 씻는다. 그걸 보는데 내 마음이…. 아이들의 마음이 와닿았다. 영화 초반에 나오는 전국고교 럭비대회 4강전에서 아이들이 뛰는 걸 보는데 소름이 돋았다. 비록 졌지만 동포들은 진심으로 응원했고, 아이들도 당당했다. 이 아이들을 사람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 어쩌면 이게 우토로(마을 강제 철거 때 함께했던)의 어머니들, 아버지들께 보답하는 길일 수 있겠다 싶었다(<씨네21> 915호 참조).
씨네21_박돈사 감독은 어떻게 합류한 건가.
박돈사_홀로 우토로를 촬영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박사유 감독을 처음 만났다. 이후에 박 감독이 럭비 잡지를 들고 와서 ‘이 아이들(오사카조고 럭비부) 굉장하다’며 계속 설득하더라. 그리고 ‘함께 기록을 합시다’라고 제안해왔다. 사실 나는 일본학교를 나왔고 그동안 동포 사회, 조선학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래서 주저했다. 영화를 좋아하긴 하나 카메라 다루는 데 프로도 아니고 살고 있는 교토에서 오사카조교까지 멀기도 했고. 그렇게 쭉 지켜보고 있었다.
박사유_내가 ‘같이 하자’고 했을 때 박돈사가 한 말이 백미다. “사유상, 저는 그저 단순한 책방 점원일 뿐입니다.” 내 몸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 내 멋대로 ‘(이 영화를 계속 찍을 사람은) 너다! 너밖에 없다’라고 정한 거다.
씨네21_처음 본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된 건가.
박사유_우토로를 촬영하겠다고 오는 사람들은 많지만 대부분 한두번 오다 끝이다. 근데 돈사는 계속 오더라. 첫 만남 이후 항암 치료로 1년간 돈사를 못 봤는데 어머니들이 “또 왔다”고 하시더라. ‘이 사람은 한결같구나.’ 신뢰감이 생겼다. 이후 일본의 우익 단체인 재특회(재일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가 교토 조선 초급학교 습격 사건을 벌였을 때다. 긴급회의가 있어 교토 회관에 갔더니 박돈사가 거기에 있는 거다. 화난 얼굴로 팔짱을 끼고. 그때 또 한번 ‘너다’라고 생각했다.
박돈사_그런 비하인드 이후에 <60만번>의 첫 촬영현장에 갔다. 지켜보고 싶었다. 근데 오사카조고 교장선생님이 “이제부터 오사카조고의 영화를 찍습니다”라고 외치셨다. 그렇게 물러설 수 없는 곳으로 들어가버렸다. (웃음)
씨네21_<우리학교>는 김명준 감독이, <60만번>은 배우 문정희가 내레이션을 맡았다. 사뭇 느낌이 다르더라.
김명준_돈이 없어서 직접 했다. 또 하나는 이야기 자체가 감독이 경험한 거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사투리에다 발음까지 후져도 내가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사실 <60만번>의 원본은 박사유 감독이 직접 일본어와 한국어로 내레이션을 했다. 근데 박 감독의 일본어 발음이 일본인들에게는 전달력이 떨어진다. 일본에서 녹음했을 때 일본 믹싱 기사가 한국어의 미세한 부분을 잡아낼지도 미지수였고. 그래서 문정희씨에게 제안했다. 몽당연필 공연 때도 함께했던 분이다. 오사카에 동포친구가 있다며 흔쾌히 수락해줬다.
박사유_<60만번>은 박돈사와 나의 포트폴리오가 아니라 럭비부 아이들의 영화다. 최종본은 내레이션 시점이 ‘나는’으로 시작하지만 원래는 전적으로 아이들의 시점이었다.
사명을 걸고 뛰는 아이들
씨네21_그간 한국에 조선학교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지 않았다는 게 이상할 정도다.
김명준_정권 차원에서 조선학교의 존재를 의도적으로 알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일본에서 총련은 민족교육을 하고 있고 민단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 그런 게 공식적으로 알려지면 한국 정부는 불편해지는 거다.
박돈사_나 역시도 조선학교에 대해서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내게 학교는 정해진 기간을 다닌 뒤 ‘안녕’ 하는 곳이었다. 부모님, 친척들도 다 민단계이고. 그런데 그런 부모님이 <60만번>을 다섯번 보셨다.
씨네21_럭비(<60만번>), 야구(<그라운드의 이방인>), 축구 등 스포츠가 동포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김명준_조선학교의 스포츠팀은 일본의 공식 대회에 조선학교라는 이름으로 나간다. 일본 사회에 조선학교생임을 완전히 드러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동포들은 조선학교가 자신들을 대변하고 한을 푸는 것 같을 거다. 많은 기대와 지지를 보낼 수밖에 없다. 아이들도 그걸 느낀다. 스포츠가 동포들에게는 차별로부터 벗어나는 해방구 역할을 한다.
씨네21_그래서일까. 영화 속 조선학교 학생들이 ‘사명’(使命)이라는 단어를 많이 쓴다.
김명준_힘겹고 외롭게 살아온 사람들에게 살아갈 기쁨과 용기를 주는 게 사명 같다. 아이들은 자신들을 위해 고생한 부모님께 뭔가를 드려야 하는데 스포츠 경기에서 한 게임 한 게임 이기다보면 뭔가 보답하는 것 같은 거다. 북이든 남이든, 일본 안에서든 하나의 구성원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잖나. 이번에 영화가 개봉하면 동포들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이 한국 관객을 술렁이게 만들었다는 데 힘을 얻을거다. 내가 지켜온 소중한 것(재일동포라는 정체성)이 이제야 겨우 인정을 받는구나, 그게 옳다고 믿고 살아갈 수 있겠구나 싶은 거다.
동일본 대지진의 기록 혹은 다큐멘터리
씨네21_박사유, 박돈사 감독의 제작사 꼬마프레스의 행보가 궁금하다.
김명준_사실 <60만번>에 앞서 <동일본 대지진 도호쿠 조선학교의 기록 2011.3.15-3.20>(이하 <동일본>)도 만들었다. 근데 두 감독이 그건 기록일 뿐 영화가 아니라고 하더라.
박돈사_지진이라는 상황 속에서 작가가 작품을 만든다는 게 과연 가능한 걸까. 센다이시가 완전히 파괴됐고 사람들의 생활이 180도 바뀌었다. 우리는 그저 동포의 모습을 전하기 위해 찍는 것뿐이다. 광주항쟁, 60년대 유럽에서 이름없는 누군가가 학살과 희생의 모습을 찍고 모두가 볼 수 있게 나눠주지 않았나.
박사유_<동일본>을 2011년 야마가타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출품했을 때, 감독명 기입란에 무기명으로 해달라고 했다. 지진 피해 지역을 누군가가 기록했다는 것만으로도 우린 충분했다. “나 그 위험한 데 갔다왔어!”라고 말하는 감독들을 보면서 생각을 더 굳혔다. 재일동포들의 존재 증명을 하고 싶었다.
김명준_너무 겸손하다. 두 사람의 프로필에 이 영화가 없으면 관객은 이 귀중한 영화를 볼 기회조차 없다. 또 편집을 하지 않았다면 단지 기록일 수 있겠지만 이 영화에는 자기만의 시선이 들어가 있지 않나. 그렇다면 그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
박사유_꼬마프레스는 재일동포들의 목소리를 사회에 발신하고, 사회에 압력을 가하는 것을 중요시해왔다. 돈사는 우리의 활동을 ‘시골 마을의 작은 사진관’ 같은 거라고 말한다. 동포들의 결혼, 장례, 제사, 입학, 졸업식에 가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씨네21_그렇다면 현재 꼬마프레스가 기록하고 있는 건 무엇인가.
박사유_(일본에서) 새벽부터 밤까지 관객과의 대화에 참석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박돈사_하지만 우리가 동포사회와 같이 간다는 것만은 변함이 없다. 조금이라도 그분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씨네21_김명준 감독은 <우리학교> 이후 오랜만에 차기작 <그라운드의 이방인>(11월 개봉예정)을 내놓는다.
김명준_민단에서 1950년대 후반부터 40여년간 해마다 재일동포라는 이름으로 팀을 꾸려 한국 학생들과 야구 교류를 했다. 그때 한국에 왔던 야구부 학생들을 뒤늦게 만나보는 거다. 2010년에 감독 제안을 수락하고 그사이 지진이 나서 1년6개월간 아무것도 못했다. 2012년 8월부터 본격적으로 찍기 시작해 이제 관객과 만난다. 올해 DMZ국제다큐영화제 개막작인 <울보 권투부>(이일화 감독)나 조정래 감독의 <귀향> 같은 조선학교 아이들의 이야기가 많아지고 있다. 동포들에게는 행복한 일이다. 박찬욱, 봉준호, 김한민 감독까지 조선학교 이야기를 만들 때까지, 다큐멘터리스트들이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웃음)
에필로그
“만나는 사람들을 기록해두려 한다.” 인터뷰가 끝나고 모두들 박사유 감독의 휴대폰 카메라 앞에 섰다. 기록으로 그날을 기억하고 싶은 박사유 감독의 마음이다. <60만번>의 일본판 팸플릿까지 손에 쥐어주고 나서야 택시에 올라탔다. “몽당연필 회원이 동포분 해준다며 가져온 봉숭아를 저도 한번 들여봤다.” 김명준 감독의 새끼손톱에 말간 봉숭아물이 다 빠질 때쯤, <그라운드의 이방인>으로 다시 얼굴을 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재일동포가 살아가고 있는 한 세 감독의 열정과 영화의 기록은 계속될 테니. 후일을 기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