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포커스] 최인규의 두 번째 영화를 만나다
2014-09-22
글 :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1940년에 만들어진 조선영화 <수업료>, 중국전영자료관에서 발굴
<수업료> 촬영현장

한국영상자료원의 일제시기 극영화 컬렉션이 한편 더 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드린다. 식민지 조선영화의 문제작이자 대표작인 <수업료>(1940)가 중국전영자료관(CHINA FILM ARCHIVE)에서 발굴되었다. 이 영화는 1930년대 중반부터 조선 영화계의 대표적 제작사로 두각을 나타낸 고려영화사의 두 번째 작품이자 최인규 감독의 두 번째 작품으로 기록된다. 최인규의 세 번째 작품 <집없는 천사>가 2004년 발굴되었으니, 말 그대로 10년 만의 낭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실 중국전영자료관은 식민지 조선영화의 보고(寶庫)와도 같은 곳이다. 2004년 방문조사로 <군용열차>(1938), <집없는 천사>(1941) 등 4편을, 2005년 방문 조사로 <미몽>(1936), <반도의 봄>(1941) 등 3편을 발굴한 바 있고, 2006년에는 중국전영자료관에서 1945년 이전 일본영화 목록을 받아 ‘조선군보도부’가 제작한 <병정님>(감독 방한준, 1944)을 추가 발굴했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들 것도 같다. 왜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더 필요했을까.

사실 한국영상자료원은 2006년 이후에도 중국전영자료관과 끊임없이 접촉해왔다. 하지만 자국영화만으로도 워낙 방대한 자료를 보유하고 있는 곳이라 조선영화의 카탈로깅(목록화) 작업이 이루어지길 기다려야 했다. 즉 아날로그 관리 시스템에서 전산화로의 전환이 완료되길 기다렸다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답변이 늦거나 아예 오지 않는 등 연락 자체가 힘들었던 사정은 말할 것도 없다. 목록화 작업이 일부 완료됐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지난해 10월 궁금함을 견디다 못해 다시 중국전영자료관을 방문했을 때다. 그리고 한달 뒤 중국전영자료관 담당자로부터 ‘한국’을 검색어로 한 영화 목록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이 목록에는 한국영상자료원이 보유하고 있는 일제시기 극영화들과 1950년 이후 북한영화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중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학비>(Tuition Fee)라는 제목의 영화였다. 이 영화가 <수업료>임을 직감하고 바로 중국전영자료관쪽에 필름 실사와 오프닝 크레디트 이미지 촬영을 의뢰했고, 1940년작 <수업료>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14년 6월 중국전영자료관에서 복사한 <수업료> 35mm 프린트가 입수되었다. 수집한 프린트는 전체 8롤(러닝타임 80분)로 결권 없이 양호한 상태였다. 대사는 한국어와 일본어가 병존하며, 한국어 대사에는 일본어 세로 자막이 붙어 있다. 영화는 식민지의 ‘이중언어’ 상황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텍스트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수업료’를 구하기 위한 한 조선 아이의 여정

<수업료>는 고려영화사의 이창용이 제작하고, 최인규•방한준이 공동 감독한 작품이다. 영화는 1939년 6월 촬영에 들어가 10월 초 최인규의 갑작스런 와병으로 <한강>(1938)을 연출한 방한준으로 교체, 12월 초 촬영을 마무리하고 후반작업에 들어갔다. 조선 개봉은 1940년 4월30일 명치좌와 대륙극장에서였다. 개봉 당시 관객수가 정확한 수치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당시 “공전의 활황”을 보였다는 문헌 기록을 통해 이 영화가 식민지 조선 관객에게 큰 관심을 받았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영화의 원작은 <경성일보>의 ‘경일소학생신문’ 공모에서 조선총독상을 받은 광주 북정(北町)소학교 4학년 우수영 어린이의 작문이다. 일본 영화계의 중견 시나리오작가 야기 야스타로(八木保太郞)가 각본을 썼고, 촬영 대본의 한국어 대사는 작가 유치진이 맡았다. 영화는 수원의 한 소학교 4학년 학생 영달(정찬조)이 수업료가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자, 평택의 큰어머니댁까지 혼자 걸어가 수업료를 얻어온다는 이야기이다. 우영달 어린이를 연기한 정찬조는 연극배우 김복진 여사의 아들로, 당시 첫 출연작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 것으로 극찬받았다. 물론 이 말이 공치사가 아님을 영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영화의 백미는 단연코, 주인공 영달이 수업료를 구하러 혼자 60리 길을 걸어 평택 큰어머니댁에 다녀오는 장면이다. 같은 해 8월 당시 ‘내지 일본’에서 <수업료>가 개봉될 때 영화잡지의 광고나 기사에는, 담임선생과 반 친구들이 우정함에 돈을 모아 영달의 수업료를 마련하는 내용에 방점이 찍혀 있다. 하지만 감독 최인규•방한준은 영화에서 수원에서 평택까지 걷는 어린 영달의 여정을 오리지널 시나리오의 분량보다 훨씬 더 길고 세심하게 묘사하고 있다.

전날 밤 직접 도시락을 싸고 운동화를 꿰매는 등 갈 채비를 마친 영달은 안개 낀 새벽 평택으로 출발한다. 우마차도 얻어 타고 주막집에서 물도 얻어먹으며 씩씩하게 길을 걷던 영달은, 지나가던 버스에서 버린 빈 캐러멜 통을 보고 실망하기도 한다. 평택에 도착할 무렵 숲속 길을 홀로 걷다 무서워진 영달이 앳된 목소리로 군가 <애마진군가>(愛馬進軍歌)를 부를 때, 우리는 그간의 조선영화 발굴작에서는 만나지 못했던 복잡한 감정을 경험할 수 있다. 이 영화의 감독들이, 식민지 조선의 한 어린이가 수업료를 구하기 위해 먼 길을 걷는 장면을 공들여 묘사한 것은 어떤 의도였을까. 그들이 아니, 어린 영달이 만날 미래의 국가는 제국 일본이었을까, 독립한 조선이었을까.

한국영상자료원의 영화 발굴은 계속된다

한국영상자료원의 발굴 소식이 더 이어질지 궁금해하실 분들이 많을 것 같다. 사실 한국영상자료원이 보유하고 있지 못한 우리 영화들이 중국전영자료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는 9월 말에는 다시 일본의 아카이브들을 조사할 예정이다. 3박 4일 동안 도쿄의 NHK아카이브, 기록영화보존센터, 내셔널필름센터(NFC), 와세다대 연극박물관 그리고 고베 영화자료관까지 방문하는 바쁜 일정을 소화해, 또 다른 발굴 성과를 전해드리려 한다. 물론 중국전영자료관에서의 조사 작업도 계속된다. 9월 중순부터 한달 동안 베이징 칭화대 문화산업 전공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김민우씨가 현지조사원 자격으로 데이터베이스(DB) 검색을 꼼꼼히 진행할 예정이다. 필자가 2006년 2010년 두 차례 방문 조사한 바 있는 러시아 고스필모폰드를 비롯해 유럽과 미국의 아카이브들도 조사 대상이다. 올해는 독일에 집중하고 있다. 베를린에 유학 중인 전 영상자료원 직원 최소원씨가 8월부터 두달 일정으로 분데스아카이브 등지에서 조사에 매진하고 있다. 영상자료원의 발굴 작업에 많은 성원과 관심 부탁드린다.

10월 일반 상영할 <수업료>의 감상 포인트 셋

1 <집없는 천사>를 보신 분이라면, 이제 최인규의 영화 스타일을 확신할 수 있다. <집없는 천사>에서 세트 벽을 그대로 보여주며 영화적 리얼리즘을 깨던 흥미로운 장면들은, <수업료>에서도 반복적으로 구사되고 있다. 바로 영달의 집 세트 측면에서 수평 트래킹을 활용해 촬영한 장면들이다. 빈약한 조선영화 촬영현장에서 형식 실험은 그저 호사일 뿐이라고 한탄하던 최인규의 영화적 야심은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정교하게 설계된 인물과 카메라의 동선이 빛난다.

2 영화에 출연한 복혜숙이 생전에 증언하고 있듯이 <수업료>는 사운드의 완성도에서도 평가받아야 할 작품이다. “토키가 완벽했을 뿐 아니라 음향효과를 제대로 살려 풀밭 장면에서 풀벌레 소리가 나는 등 참신한 기술”이 당시 조선 관객을 매혹시켰다 한다. 오래된 필름이라 노이즈가 앞서지만, 그 사이로 풀벌레 소리와 새소리를 분명히 들을 수 있다.

3 <수업료>는 극영화지만 기록성의 가치도 뛰어나다. 스러져가는 수원화성의 화서문(華西門)을 배경으로 한 시골 풍경, 일본이 자신들의 국가라고 굳게 믿었던 소학교 아이들의 잔잔한 일상, 추석을 맞은 마을 농악대의 모습까지 영화 속에 담긴 당시 식민지 조선의 풍경은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을 것이다.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