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한 인터뷰에서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은 자신을 ‘이야기보다 캐릭터에 끌리는’ 연출자라고 소개한 적이 있다. 그의 11번째 영화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는 <린다 린다 린다> <마츠가네 난사사건>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 그리고 <마이 백 페이지>로 이어지는 전작들 안에서는 잘 이해되지 않았던 그의 이 말을 가장 정확하게 실천한 영화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다마코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집에 틀어박혀 빈둥대면서 ‘어른’이 되기를 잠시 미룬 ‘잉여청춘’이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얹혀살고 있는 데 대한 미안함이나 잉여가 되어버린 자신의 처지에 대한 머쓱함을 먹고, 소리치고, 투덜대는 것으로 에둘러 표현하는 그녀는 최근 본 다른 어떤 영화의 캐릭터보다도 매력적이다. 여기에 종잡을 수 없는 다마코를 연기한 마에다 아쓰코가 일본의 정상급 아이돌 가수 출신이라는 사실은 조금 놀랍기까지 하다. 무엇보다 사계절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을 좁은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아버지와 딸이라는 복잡 미묘한 관계에만 집중해 영화를 만들어낸 야마시타 노부히로의 숨겨진 야심이 궁금했다.
-영화의 시작이 TV 프로젝트라고 들었다.
=사계절을 배경으로 한 TV드라마로 처음 기획했다. <뮤직 온! TV>라는 음악 전문 유료채널인 까닭에 일반 드라마라기보다 마니아를 위한 드라마가 가능했다. 가을과 겨울 부분을 보면 알겠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이야기도 없는, 드라마틱한 요소들이 존재하지 않는 드라마를 만들어보자 생각했다. 그런데 가을과 겨울까지 찍고 나니 다마코라는 캐릭터가 구체적으로 형성됐고, 프로듀서가 영화로 만들어보자고 제안해왔다.
-촬영기간은 어느 정도였나.
=2012년 9월에 시작해서 2013년 7월에 끝났다. 날수로는 가을, 겨울 합쳐서 3일, 봄은 2일, 여름은 5일, 모두 합쳐 10일 정도.
-영화는 가을에서 시작해서 늦여름에서 끝난다. 시작이 가을인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처음 드라마를 기획했던 시기가 초여름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가을부터 촬영이 시작됐다. 다마코의 캐릭터를 더 잘 보여주기 위해 시작점을 가을로 정한 것도 있다. 도쿄에서 대학을 졸업했는데 취업은 하지 못하고, 자존심 때문에 바로 고향에 내려오지도 못하고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버티다 그것도 잘되지 않아 고향으로 내려온 시점, 그게 바로 가을이다. 이런 어정쩡한 시기에 고향에 돌아오는 것이 ‘다마코스럽다’는 생각도 했다.
-계절별로 상당한 시간 간격을 두고 촬영을 한 셈인데, 계절별 에피소드가 일관성이 있다. 각각의 에피소드를 묶는 원칙이 있었다면.
=각각의 에피소드는 서로 떨어져 있지만,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실제로 1년여 동안 성장하는 모습을 그대로 담아내 영화의 연속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소년 히토시는 크랭크인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었는데, 촬영이 끝났을 때 중1이 됐다. 영화를 찍으면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이 성장을 한 셈이다. 마에다 아쓰코는 촬영 기간 동안 계속해서 다른 작업들을 진행했는데, 그 때문인지 촬영하러 올 때마다 미묘한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아이돌 활동을 그만두고 배우를 시작하면서 그녀 역시 여러 작업을 거치며 성장하고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린다 린다 린다> <마츠가네 난사사건>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 그리고 이 영화까지 영화의 배경이 모두 도쿄를 벗어나 있다.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영화는 도쿄를 불러온다. 다마코는 지방에 살고 있지만 도쿄에서 대학을 졸업했고, 도쿄에 있는 엄마와 계속해서 전화 통화를 한다. 그러다보니 시골을 배경으로 했다기보다 ‘도쿄가 아닌 곳’을 찾는다는 느낌이 있다.
=내 고향은 아이치현이고, 대학은 오사카에서 나왔으며, 언제까지 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도쿄에 살고 있다. 그런데 나같은 지방 출신들은 20대에 ‘내가 도쿄에 살고 있지 않다’는 점을 항상 인식하는 것 같다. 지금 도쿄에 살고 있지만, 나 역시 아직 도쿄를 잘 알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내 초기영화에도 도쿄와 도쿄가 아닌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렇다고 의식하고 설정한 것은 아니다.
-도쿄에 살지 않는다는 걸 인식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시골에서 나고 자라 창작 활동을 하는 (감독을 포함한) 이들은 도쿄에 대한 자신만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이치가와 준 감독이 그린 ‘도쿄’는 노스탤직하면서 아름다운 공간이다. 나는 오사카에서 영화를 공부했는데 그때 나 역시 도쿄에 동경같은 것이 있었다. 고향이 도쿄가 아닌 사람들은 다 그런 게 있는 것 같다. 그들은 도쿄가 흥미로운 장소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도쿄에 대한 두려움도 안고 있다. 나 역시 그런 두려움이 있었다.
-이 영화의 배경은 어디인가.
=야마나치현 고후라는 도시이다. 도쿄에서 그렇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이다. 전철로 한 시간 반 정도에 위치하니 마음만 먹으면 다마코는 언제든 도쿄에 있는 엄마를 만나러 갈 수 있다. 그렇다고 또 쉽게 보러 갈 수 있는 거리도 아니다.
-고후스포츠점의 ‘고후’가 도시 이름인지 몰랐다.
=사실 그 장소보다 영화 속 가게가 풍기는 ‘자태’를 보는 순간, 이곳에 살고 있는 여자애를 그리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영업을 하고 있는 가게이다. 촬영 중에 손님이 오면 촬영을 중단하고 물건을 팔기도 했다.
-그럼 장소를 먼저 찾고 거기에 맞는 이야기와 설정을 한건가.
=아니다. 처음부터 시나리오에 썼던 스포츠용품점을 찾았던 거다. 한 스탭이 고후에서 스포츠점 두곳을 찾았는데, 다른 하나는 영업을 하지 않는 곳이었다. 그곳은 시간이 정지된 곳처럼 느껴져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사람이 실제로 살고 생활하는 분위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내 영화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기는 민망하지만(웃음), 이 영화는 장소, 캐릭터, 배우, 음악 등이 잘 맞물려 있어 영화가 풍성하다는 느낌을 준다. 물론 그 중심에는 마에다 아쓰코가 있다. 처음 시작도 그녀를 등장시켜 무언가를 만들자는 것이 목표였으니까.
-이 집에는 둘을 제외한 다른 가족이나 친구, 어느 누구도 들어오지 않는다. 큰엄마도 문 앞에서 떠나가고, 설에 찾아온 다마코의 언니도 목소리로만 존재한다. 아버지와 헤어진 엄마도 전화 통화 속 목소리로만 등장한다. 결국 이 집엔 다마코와 아버지만 남는다.
=의도적으로 다른 인물들을 집 안에 들이지 않은 측면이 크다.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강하게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이혼해서 떠났고, 큰딸은 결혼해서 분가했으며, 아버지 혼자 남아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때 다마코가 아버지를 찾아온다는 것이 영화 초반 설정이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다른 가족들은 등장시키지 않았다. 한편으로 언니와 엄마는 자립한 사람이란 의미도 있었다. 반면 다마코와 아버지는 아직 자립하지 못한 것이고.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이지만, 전화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도 마에다 아쓰코가 녹음한 거다.
-아버지와 딸의 관계 설정 때문인지 영화를 보는 동안 오즈 야스지로의 <만춘>이 떠올랐다. 그런데 <만춘>을 이 영화 촬영이 끝나고 처음 보았다고 들었다. 이 영화의 감흥은 어떤 것이었나.
=이 영화와 <만춘>이 비슷하다는 말을 상당히 많이 들었다. <만춘>을 보기 전까지 나는 오즈 영화는 <동경 이야기>밖에 보지 못했다. 부녀간의 관계는 비슷한 점이 있지만, 시대가 워낙 다르다보니 풍기는 분위기는 많이 다른 것 같다. 내가 느끼기에 오즈는 좀 ‘과격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날이 서 있달까? 심플하고 잔잔해 보이지만 등장하는 인물들은 과격하고 ‘날것’의 느낌이 있다. 자신만의 색깔과 세계관을 철저하게 영화를 통해 관철시키는 사람이었을 것 같다.
-계절마다 바뀌는 아버지의 요리들에 신경을 많이 썼다.
=제철음식을 사용해 요리로 계절감을 표현하고 싶었다. 동시에 마에다 아쓰코가 먹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그녀의 프로필 사진 중에 먹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 매우 매력적이었다. 실제 배우와 영화 속 다마코가 딱 맞는 것 같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주인공이 늘어져 있는 영화인데 먹는 장면마저 없으면 누가 보겠나. (웃음)
-마에다 아쓰코와 두 번째 작업이다. 아이돌이 아닌 배우로서 마에다 아쓰코는 어떤 사람인가.
=<고역열차> 촬영 당시 그녀가 참여한 촬영기간은 3일 정도밖에 되지 않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촬영 당시 그녀는 일본 어디를 가도 사진이 붙어 있는 최상급 아이돌 스타였다. 다른 작품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와 작업할 때 마에다 아쓰코는 질문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슛이 들어가면 내가 원하는 것의 120%를 해주곤 했다. 영화 초반, 양배추롤을 먹는 장면에서 나는 그저 예쁘지 않게 먹어달라고 이야기했는데, 내가 원한 것, 그 이상을 연기하더라. 어떤 의미에서 감독을 믿고 신뢰했단 느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직은 배우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완벽히 컨트롤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 영화에선 그런 그녀의 모습들이 큰 매력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 역할을 맡은 간 스온의 연기도 인상적이다.
=나는 배우에 맞추어 연출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간 스온에게는 거의 연출 지시를 하지 않았다. 알아서 만들고, 알아서 연기하는, 정말 특이한 사람이다. 많은 경우 배우들은 감독이 시시콜콜 지시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데, 그는 아예 그런 과정이 없었다. 자신이 촬영해야 하는 시점이 오면 스윽 나타나서 촬영하곤 했다. 아버지와 딸의 영화이니 쉬는 시간에 마에다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연기를 맞추어보았을 것 같지만 그런 것도 일절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 캐릭터는 간 스온이 스스로 만들어낸 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좁은 집 안, 계속해서 바뀌는 계절까지 촬영이 쉽지 않았을 텐데, 촬영 원칙은 무엇이었나.
=이 영화에서 나는 두명의 촬영감독과 함께 작업했는데, 전반부(가을, 겨울)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촬영감독이었던 아시자와 아키코이고, 후반부(봄, 여름)는 <린다 린다 린다> <고역열차>에서 함께 작업했던 이케우치 요시히로였다. 이 둘은 매우 다른 스타일을 지녔다. 아시자와는 창문을 뜯어내서라도 자신이 원하는 장면을 얻어내려는 사람인 반면, 이케우치는 카메라는 연기를 방해하면 안 된다는 원칙으로 현장에 거의 손을 대지 않고 그대로 촬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전반부에서는 인물들을 밀착해서 자세히 잡으려는 장면들이 많다. 반면 후반부는 어느 정도 캐릭터가 갖추어져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심플하게 촬영해나가려고 했다.
-숏을 쪼개는 대신 최대한 길게 가면서 한숏 안에 인물들을 깊이감 있게 배치했다.
=나는 기본적으로 신을 쪼개지 않는 것을 좋아한다. 먼저 무조건 한컷으로 구상한다. 그런 다음 그 신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카메라의 위치를 선택한다. 연기도 마찬가지다. 숏을 쪼개서 연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숏 안에서 모든 것을 다 보여주는 연기가 이상적이다. 그래서 내 영화들엔 원신 원컷 장면들이 상당히 많다. 영화의 마지막, 다마코와 소년이 나란히 벤치에 앉아 있는 장면이 있는데 그런 장면을 무척 좋아한다. 숏을 굳이 쪼개지 않아도 설명이 다 되니까. 이 장면은 무척 ‘나답다’는 느낌이 든다.
-가장 이상한 장면은 아버지와 요코가 식당에서 데이트를 하는 숏이다. 유리창 밖에서 촬영해서 마치 다마코가 그곳까지 미행한 것 같은 느낌까지 든다.
=그 장면을 찍을 때 고민이 많았다. 아버지와 요코가 즐거운 분위기에서 다마코가 강습소에 왔다는 등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인데, 유리창 안에서 찍을 것인지 밖에서 찍을 것인지 정말 오래 고민했다. 둘의 이야기를 들리게 하고 싶지 않아 결국 밖에서 찍는 걸로 결정했는데, 막상 찍고 보니 질문대로 누군가가 지켜보는 느낌이 들었다. 만약 누군가의 시선이었다면 다마코의 ‘부하’인 히토시 아니었을까? (웃음)
-왠지 다마코라면 쫓아가서 보았을 것 같기도 하다.
=(웃음) 아니, 나는 히토시가 봤을 것 같다.
-한국에 살고 있는 많은 ‘다마코’들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 해달라.
=음…. (한참 고민) ‘이런 완벽한 아버지는 없어. 그러니 좀더 위기의식을 가지고 살아라’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