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엔 매연을 내뿜는 자동차 대신 말라빠진 개들이 하릴없이 어슬렁거리고 저마다 두툼한 시가를 물고 다니며, 방조제에 부서지는 파도가 만들어내는 물보라가 아스라한 도시 아바나. 그곳에 더불어사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의 노연주자들은 언뜻 그 배경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궁핍하고 앙상해 보인다. 그러나 이들이 음반녹음실, 공연장에서 연주하는 모습과 각자의 삶, 음악 경력에 대한 이야기를 덤덤하게 담아냈을 뿐인 빔 벤더스의 이 디지털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리듬에 맞춰 발목을 끄덕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벤더스 스스로 음악과 다큐멘터리가 만났다는 의미에서 ‘뮤지큐멘터리’라 부른 이 영화에서 음악은 음악가의 삶과 완전히 동일한 차원의 것이다. 어깨에 힘을 뺀 채 악기를 설렁설렁 매만지는 것 같은데도 이 ‘영감님’들의 음악에선 아직도 못다 피운 로맨스에 대한 열정, 흘러가버린 세월을 그리는 깊은 탄식, 오랜 역정을 이겨낸 환희 같은 것이 두루 섞인 진한 점액질이 흘러나온다. 이들의 음악인생이 ‘혁명정신’에 위배돼 좌절됐던 것인지, 그저 세월의 흐름 속에서 도태된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구성원들의 “음악과 팬이 있다면 뭐 그런 것쯤은 상관없다”는 낙관적 삶의 태도는 음악이 담고 있는 느긋함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카리브해의 이글거리는 햇살과 수백년 전 노예선을 타고 온 아프리카인의 한이 만난 이 ‘아프로-쿠바 음악’이 낯설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일 것. 장르적으로 스윙과 살사 사이에 놓인 징검다리쯤 될 만한 이 ‘시대착오적’인 음악을 듣는 데 필요한 것은 음악에 관한 어떠한 지식이 아니라, 연주하는 할아버지들처럼 몸에 긴장을 풀고 여유로운 마음가짐을 갖는 것뿐이다.
벤더스가 이 작품을 만들게 된 것은 U2의 보노와 함께 그의 가장 중요한 음악 파트너 중 하나인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 라이 쿠더의 권유 때문이었다. <파리 텍사스>에서 황량한 사막의 이미지를 음악으로 담아냈던 쿠더는 1997년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앨범을 쿠바에서 녹음한 직후 벤더스에게 달려가 테이프를 들려주며 영화화를 제의했다. 이 테이프에 담긴 음악에서 “다른 음악에선 찾아볼 수 없었던 관록과 진실성을 깊게 느꼈던” 벤더스는 이듬해 쿠바로 날아가 그들의 음악을, 삶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음반이 전세계적으로 대성공을 거둔 뒤였기에 더욱 강한 추진력을 얻을 수 있었다. 킹크스, 야드버즈, 롤링스톤스 같은 60년대 영국 록 밴드의 추종자이고 “이미지와 음악이 처음으로 결합되는 편집 과정”을 가장 소중하게 여긴다는 벤더스다운 프로젝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벤더스로서는 첫 시도인 셈인 디지털 작업도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 기동성 있는 소니 디지-베타 카메라를 스테디캠에 붙여 주요 장면을 찍고, 스스로 소니 핸디캠으로 보완촬영을 한 뒤 후반작업에서 쿠바, 암스테르담, 뉴욕의 화면 톤을 각각 달리해 나름의 ‘디지털 미학’을 추구했다.
사실 그동안 벤더스는 꾸준히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왔다. 오즈 야스지로 영화에 비친 도쿄의 공간을 좇아가는 <도쿄가>(1985)와 일본 패션 디자이너 야마모토 요지의 이야기를 담은 <도시와 옷에 놓인 공책>(1989) 등에서 그는 매우 주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며 마치 일기를 쓰듯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부에나비스타…>에서는 가능한 한 관찰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머물려 애썼다”는 스스로의 이야기처럼 그는 피사체를 향해 조용히 렌즈를 들이밀기만 했다. “소유에 집착했다면 쿠바는 오래 전에 사라졌을 것”이라고 말하다가도 자본주의의 최첨단을 달리는 뉴욕에 가선 “이게 바로 사람답게 사는 거야”,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라는 등 주인공들의 모순된 이야기를 통해 현재 쿠바가 겪고 있는 딜레마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도 객관적 시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모두가 이 영화에 만족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로저 에버트는 별 이유도 없이 너무 자주 등장하는 라이 쿠더의 모습은 PPL 같은 느낌이 나며, 음악 한곡을 제대로 들려주는 법이 없이 자꾸만 끊어대고, 똑같은 형식으로 반복되는 뮤지션들의 인터뷰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화가 날 정도라고 불평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씁쓸한 점은 이 노인들의 동화 같은 성공담이 결국 새로운 음악상품을 찾아 미개척 영역을 뒤지고 다니는 서구인으로부터 비롯됐다는 사실이다. 변방의 문화는 서구인들 식탁의 ‘쓰키다시’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문석 기자 ssoony@hani.co.kr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의 명인들
구두닦고, 복권팔고, 연주하고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은 ‘아프로-큐반 올스타즈’처럼 쿠바 음악의 스타들이 총동원된 프로젝트다. 일찌감치 쿠바 음악에 매료됐다는 미국의 기타리스트 라이 쿠더는 1996년, 기억 속에 묻힌 쿠바 음악의 명인들을 찾아 나선다. 80년대를 거치며 대부분 잊혀지고 은퇴하다시피했던 그들 중 대다수는 60살 이상의 할아버지들. 최고참은 1907년생으로 가장 고령인 콤파이 세군도다. 쿠바에서 손꼽히는 기타의 거장인 그는 10대부터 낮에는 담배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바에서 연주하고 노래했다. 42년 로스 콤파드레스란 듀오를 결성해 10년 넘게 활동하며 많은 인기를 누렸다. 자그마한 체구로 섬세하게 분절된 리듬의 선율을 만들어내는 루벤 곤살레스는 쿠바의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산타 클라라 태생인 곤살레스는 7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40년대 초반에는 살사의 대부쯤 되는 맹인 연주자 아르세뇨 로드리게즈의 밴드에서 연주했고, 50년대 중반 ‘차차차’의 창시자인 엔리크 호린과 한팀을 이뤄 25년여간 함께 활동하다가 80년대 중반에 은퇴했다. 그동안 피아노도 없었고, 관절염으로 고생하면서 연주를 접었던 그였지만 1996년 ‘아프로 큐반 올스타즈’, 이듬해 <부에나비스타…>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고, 급기야 78살의 나이인 2000년 첫 솔로 음반을 냈다. 이브라힘 페레는 한때 쿠바 최고의 보컬로 인기를 누렸던 인물. 1927년 산티아고 사교댄스 클럽에서 태어난 그는 14살부터 낮에는 구두를 닦고 밤에는 클럽에서 노래하며 활동을 시작한다. 50년대에 파초 알론소의 오케스트라를 만나 20년간 함께 활동하지만 80년대에는 음악을 그만두다시피했다. 다시 구두를 닦고 복권을 팔며 생계를 위해 애쓰던 그는 <부에나비스타…>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유일한 여성 보컬인 오마라 포르투온도는 아바나 출신으로 쿠바 정상의 디바. 어려서부터 학교 합창단과 음악시간에 두각을 나타냈던 그는 카바레 댄서와 가수를 겸업하며 정상의 인기를 누려왔다.
황혜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