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렛 도넛>의 루디(앨런 커밍)는 1970년대 말 LA의 게이 가수다. 루디와 애인 폴(개릿 딜라헌트)은 친모에게 방치된 다운증후군 소년을 거둬 돌본다. 하지만 제도화된 호모포비아가 세 사람의 가정을 파괴하려든다. 앨런 커밍(<엑스맨2>의 나이트크롤러)의 연기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의 자레드 레토도 그 앞에서는 빛을 잃을 만큼 화사하고 생생하다. 루디는 자신과 남을 천연덕스럽게 실컷 사랑한다. 누가 뭐래도, 이것이야말로 신이 뜻한 바대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8/28
(8월22일 일기에서 계속) 2014년에도 재난영화는 성업 중이다. 이 장르 역사를 통틀어 제일 인기 있고 유서 깊은 단골 소재인 구약의 대홍수와 베수비오 화산폭발이 <노아>와 <폼페이: 최후의 날>로 최신판을 갱신했고 괴수 재앙물 <고질라>가 리부트되었으며 <인투 더 스톰>이 여름 시즌 끝자락을 잡고 오늘 개봉했다. 안락한 멀티플렉스 객석에 몸을 묻고 떼지어 몰려오는 토네이도를 심심하게 구경하다가 ‘참 여전하구나’ 생각했다. 1970년 <에어포트>에서 그랬듯, 1997년 <볼케이노>에서 그랬듯, 재난은 <인투 더 스톰>에서도 혼탁한 세상을 깔끔히 리셋하는 스위치 기능을 한다. 영화 초반 물신숭배, 기술맹신, 쾌락주의로 타락한 사회는 재앙을 극복하는 동안 정화되고 재통합된다. 그런데 기강을 재수립하는 과정에는 ‘솎아내기’가 수반된다. 불륜, 탐욕, 교만 등 죄를 범한 인물들은 재난과 싸우는 도중에 직간접적으로 그들의 도덕적 결함에 대한 징벌을 받는다. 다만 권선징악의 천벌이 내린다는 설정은 촌스러우므로, 대개는 결정적 순간에 개과천선해 공동체를 위해 자발적으로 희생함으로써 뒤끝 없이 퇴장하는 경로를 밟는다. 재앙은, 대립된 입장을 조율하고 법과 절차를 거쳐 바로잡으려면 어디부터 손대야 좋을지 암담하게만 느껴지던 세계를 한방에 휩쓸어버리고 정의를 구현한다.
여일한 공식을 이어가며 명맥을 지키고 있음에도, 재난영화가 <타워링> <포세이돈 어드벤처>의 1970년대나 <볼케이노> <단테스 피크> <아마겟돈> <딥 임팩트>가 쏟아진 90년대 후반에 비해 주요 장르로서 존재감이 희석된 까닭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법하다. 21세기 들어 할리우드 재난영화는 슈퍼히어로 액션영화들의 ‘3악장 알레그로’로 편입됐다. 30분을 넘기는 선까지 길어진 최근 슈퍼히어로 블록버스터의 액션 클라이맥스는 뉴욕, 샌프란시스코, 런던 등의 대도시가 초토화되는 스펙터클을 포함하고 있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시가전, <맨 오브 스틸>의 고밀도 도심 파괴는 어떤 재난영화의 참상 못지않다. <어벤져스>의 ‘맨해튼 대첩’의 피해 액수는 한 가상 통계에 의하면 1600억달러로 추산된 바 있다.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등 여타 마블 블록버스터들도, 고르게 높은 재미와 완성도를 인정받지만 제3장의 결전에만 다다르면 어슷비슷해진다는 불평을 사고 있다. 마블 영화의 경우 시퀀스의 내적 구성마저 어느 정도 패턴화된 인상이다. 초대형 비행체가 도시 상공에 접근하면서 편대들이 날아오르고, 여러 장소에서 벌어지는 각개 전투가 다원 중계하듯 편집된다. 요컨대 영화 속의 작은 재난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가하면 한 발짝 물러서서 조망하면, 현재 할리우드가 생산하는 거대 예산 상업영화는, 궁극적으로 무엇을 팔고 있느냐를 기준으로 분류할 때 전부 광의의 재난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코믹스 히어로 영화, 성경서사극(<노아>), 괴수물(<고질라>), 로봇 액션(<퍼시픽 림> <트랜스포머> 시리즈), 스페이스 오페라(<스타트렉 다크니스>), 전쟁물(<엣지 오브 투모로우>), 좀비영화(<월드워Z>) 등 장르는 다양하고 만드는 이들의 야심도 넓은 스펙트럼에 걸쳐 있지만, 극장에서 관객이 이 영화들의 티켓을 구매하도록 하는 유인, 아니 스튜디오가 확신하는 이 영화들의 확고한 상품 가치는 압도적인 스펙터클에 있다. 1억달러 이상 예산 영화의 전공필수 과목이랄까? 말장난 같지만, 재난영화 장르는 축소되는 동시에 확장되었다.
9/11
주말은 언제나 딱 하루가 부족하고, 연휴는 어김없이 실제 길이의 8할로 체감되는 건 무슨 조홧속인지 모르겠다.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는 전투력을 회복해야 마땅할 연휴 말미에 관람하기에는 더없이 부적절한 영화였다. 대학을 졸업한 다마코(마에다 아쓰코)는 아무것도 딱히 하고 싶지 않다고 판단하자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한다(보통은 덜 내키는 일이라도 이것저것 시도하기 마련인데!). 가고 싶은 데가 딱히 없다고 결론짓자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보통은 교외선이라도 타기 마련인데!). 그냥 짐을 싸서 고향집 구들장으로 돌아온다. 아버지의 집은 특정한 장소라기보다 다마코의 영점(零點)에 해당한다. 그녀에겐 하다못해 <프란시스 하>의 프란시스가 가진 근거 없는 자신감도, <족구왕>의 만섭이 몰두한 족구도 없다. 누군가 질문하거나 제안하면 다마코는 대개 “그닥”이라는 투로 답한다. 고집스런 ‘벳츠니’(別に, 별로)의 세계로군. 나는 이 인물의 표리일체함에 그만 감탄하고 말았다. 무위(無爲)를 무위로 보여주는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의 해맑은 버티기 신공에도. 게다가 마에다 아쓰코는 무대에 서는 위치도 팬 투표로 결정되는 살벌한 경쟁 시스템에서 청춘을 보낸 아이돌이라던데 어찌 저토록 나른한 표정을 턱하니 걸칠 수 있단 말인가.
‘모라토리엄’은 지불 유예 기간을 뜻한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까지 나는 ‘갭 이어’(Gap Year)라 불리는 미국과 유럽 젊은이들의 관행을 풍문으로 듣고 부러워서 죽을 지경이었다. 대학 입학을 유예하고 갖는 일종의 청춘 안식년에, 그 나라 아이들은 해외봉사를 떠나거나 직업을 체험하거나 외국어를 배우며 장차 어떤 성인이 되고 싶은지, 될 수 있는지 탐색을 한다고 들었다. 정작 갭 이어가 허락된다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여행도 견습도 아니고 가만히 있는 거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만히 있으면 결국 내가 무슨 일을 하게 될 인간인지 한번쯤 알아보고 싶었다. XX를 위한 준비 기간도, 재충전 기간도 아닌 그냥, 기간. 그것을 갖고 싶었다. 그러므로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라는 물에 물탄 듯 슴슴한 영화에 대한 나의 기본적 호감은 대리만족에서 왔다고 해도 좋다. 심지어 나는 영화가 끝난 다음, 이 대책 없는 아가씨가 제법 잘 살아갈 거라는 예감까지 가졌다. 중력에 몸을 맡기고 자유낙하해서 바닥을 제대로 친 다음 리바운드하면 그리 쉽사리 다시 바닥을 그리워하지는 않을 테니까.
9/12
아내와 헤어진 지 오래인 다마코의 아버지는 계절이 세번 바뀔 동안 백수 딸에게 놀랄 만큼 관대하다. 오지도 않은 미래 때문에 서로에게 악다구니를 쓰는 일없이 꼬박꼬박 밥이나 같이 차려먹는 부녀의 정경은 노벨평화상감이다. 나는 이 부녀가 서로를 귀여워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무척 좋았다. 단언컨대 두 인간 사이에 서로를 귀여워하는 것보다 바람직한 관계는 짐작보다 많지 않다. 아무 잔소리도 않던 다마코 아버지는 어느 날 밥상 앞에서 “여름이 지나면 직장을 구하든 그러지 않든 집을 나가거라” 하고 담담히 통보한다. 딸은 선선히 수긍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다마코는 마을에서 제일 친한 남자 중학생과 나란히 앉아 하드를 먹는다. 그러다 문득 소년과 같이 다니던 여자친구를 궁금해한다. 헤어졌다는 말에 다마코가 이유를 묻자 “자연소멸했다”는 답이 돌아온다. 촌철살인이다.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은, 계절이 바뀌고 몸에 시간이 스미지 않으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이행들이 인생에 있음을 안다. 흔히 지루한 예술영화를 가리켜 “페인트가 마르는 걸 지켜보는 영화”라는 표현을 쓰는데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는 “하드를 끝까지 천천히 녹여먹는 영화”다. 여름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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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쾌한 작명법
<세븐 싸이코패스>에서 연쇄살인 액션 시나리오에 삶의 진실을 담고 싶어하는 아일랜드인 작가 마티(콜린 파렐)는 말하나마나 본 영화를 쓰고 연출한 마틴 맥도나 감독의 분신이다. 그 옆에서 선정적인 사례를 수집하고 화끈한 전개를 부추기는 친구의 이름은 빌리 빅클(샘 록웰). <택시 드라이버>에서 정의의 피바다를 만든 로버트 드니로 캐릭터와 성이 같다. 이들 옆에서 비판적 코멘트를 제시하는 현명한 노인은 무려 폴란드 거장과 친척인가 싶은 한스 키에슬롭스키(크리스토퍼 워컨)다. 마티는 두 사람에게 동시에 “시나리오 같이 쓰자”고 손을 내민다. 하지만 수월할 리 없다. ‘내추럴 본 킬러’ 우디 해럴슨이 그들을 잡으러 오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