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루크 에반스] <드라큘라: 전설의 시작>
2014-10-07
글 : 이주현
루크 에반스

천상의 신(神)과 천하의 몹쓸 악인 사이. 루크 에반스의 얼굴을 보고 누군가는 선한 의지를 읽고 누군가는 악한 기운을 읽는다. <드라큘라: 전설의 시작>에서도 루크 에반스는 상반된 얼굴을 연기한다. 이 영화에서 그는 비정한 전사이고 왕이며, 자상한 남편이자 아버지이다. 악마와 어둠의 거래를 한 뒤엔 인간의 피를 끊임없이 갈망하는 드라큘라가 된다. 엄청난 힘을 얻은 대신 저주의 굴레에서 평생 고통을 맛봐야 하는 드라큘라는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 이후 끊임없이 변주되어 되살아난 위험하고도 매혹적인 인물이다. 루크 에반스는 “드라큘라를 연기한 수많은 배우들을 떠올리며 ‘이건 엄청난 도전이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전형에 갇힐 필요가 없었다. <드라큘라: 전설의 시작>은 블라드 공작이 어떻게 드라큘라가 되었는지, 그 “기원”을 짚어가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굳이 벨라 루고시(<드라큘라>(1931)), 크리스토퍼 리(<드라큘라>(1958)), 게리 올드먼(<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1992))을 의식하지 않아도 좋았다는 점에서 루크 에반스는 “운이 좋았다”.

그러나 제아무리 새로운 드라큘라라고 해도 드라큘라는 드라큘라다. 너무도 유명한 캐릭터이기에 제작진의 고심은 깊을 수밖에 없었다. <드라큘라: 전설의 시작>을 비롯해 <소셜 네트워크> <머니볼> <캡틴 필립스> 등을 제작한 마이클 드 루카는 캐스팅의 어려움을 이렇게 설명했다. “모두 그들 각자의 드라큘라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스파이더맨, 배트맨 혹은 제임스 본드의 캐스팅보다 어쩌면 더 어렵다고도 할 수 있었다.” 루크 에반스는 제작진이 원한 “상징적인 캐릭터를 제대로 구현할 수 있으면서도 관객이 선입견 없이 볼 수 있는 신선한 얼굴”이라는 다소 난해한 조건을 충족시키며 영화에 합류한다. 당시 루크 에반스는 뉴질랜드에서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를 촬영하고 있었다. 창백하기는커녕 혈색 좋은 근육질 미남인 루크 에반스는 사실 단번에 드라큘라와 연결고리를 찾기는 어려운 외모를 지녔다(근육질의 드라큘라라니!). 하지만 현대적 해석을 가미한 <드라큘라: 전설의 시작>은 드라큘라를 <스파이더맨>이나 <배트맨>과 같은 히어로 무비의 영웅처럼 변모시켰고, 가족과 백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영웅으로서의 드라큘라는 루크 에반스의 강인한 이미지와 썩 잘 어울린다.

올랜도 블룸의 닮은꼴로 종종 얘기되는, 하지만 그보다 더 선이 굵은 루크 에반스는 영국에서 할리우드로 넘어온 지 불과 5년 만에 블록버스터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게 된다. 새파랗게 젊은 배우가 영화 제작자의 눈에 띄어 하루아침에 라이징 스타가 된 경우와는 다르다. 루크 에반스는 할리우드로 넘어오기 전 영국의 웨스트엔드 무대에서 20대의 대부분을 보냈다. 1979년 영국 웨일스 폰티풀에서 태어난 그는 런던스튜디오센터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연기 공부를 했고, 학교를 졸업한 뒤엔 신발가게에 취직해 매주 15파운드씩 모아 노래와 연기 레슨비를 지불했다. 어린 시절부터 노래하고 연기하는 게 꿈이었던 착실한 청년은 <스몰 체인지> <피아프> <미스 사이공> <렌트> 등 다수의 무대에 오르며 자신의 꿈을 이뤄간다. 그리고 허스키한 목소리, 탄탄한 연기력, 뛰어난 신체 조건은 영국뿐 아니라 할리우드에서도 제대로 통한다. 본인은 영화배우가 될 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2010년 <타이탄>에서 아폴로 신을 연기하며 할리우드의 문을 두드린 루크 에반스는 신인 아닌 신인으로 빠르게 존재감을 각인시켜나간다. <삼총사 3D>의 아라미스, <신들의 전쟁>의 제우스, <더 레이븐>의 에멧 필스 형사, <노 원 리브스>의 드라이버, <기억속에 퍼즐>의 JB를 거쳐 <분노의 질주: 더 맥시멈>의 오웬 쇼와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의 바드를 만나기까지, 그는 “가능한 한 많은 일을 하자는 생각으로 1년에 대여섯 작품씩 출연” 했다. “너무 과하게 다작한 것 같지만 나로선 여러 역할을 경험할 필요가 있었다.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무대 연기가 아닌 카메라 연기는 루크 에반스에게 낯선 것이었고, 그는 신인배우의 자세로 작은 역도 마다하지 않았다.

<분노의 질주: 더 맥시멈>과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는 준비된 배우 루크 에반스에게 찾아온 절호의 기회였다. <분노의 질주>의 6번째 시리즈에 악당으로 합류한 루크 에반스는 10년 동안 호흡을 맞춰온 배우들 틈에서, 시리즈를 거듭하며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들어온 그 배우들 사이에서 시리즈에 활력을 불어넣은 최강 악당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분노의 질주: 더 맥시멈>은 <드라큘라: 전설의 시작>의 캐스팅으로 이어졌다. 푸른 혈관 아래 푸른 피가 흐를 것 같은 오웬 쇼의 모습은 심약한 사람은 절대 볼 수 없는 슬래셔 무비 <노 원 리브스>의 사이코패스 캐릭터와 맥이 닿아 있다. “연쇄살인범은 취향이 있지. 난 닥치는 대로 죽여”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이 사이코패스 살인마는 루크 에반스의 강직하고 정의로운 이미지를 ‘위험한 남자’의 이미지로 순식간에 바꿔놓는다. <노 원 리브스> <기억속에 퍼즐> <분노의 질주: 더 맥시멈> <드라큘라: 전설의 시작>으로 이어지는 작품에서, 루크 에반스는 달의 뒷면 같은 얼굴을 연이어 노출하며 어둠의 카리스마를 발산한다. 그렇기에 영웅과 반영웅의 모습을 오가는 <드라큘라: 전설의 시작>의 블라드 3세(드라큘라) 캐릭터는 루크 에반스가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었던 인물처럼 보인다.

피터 잭슨의 판타지 세계에 발을 들이면서 루크 에반스는 더 큰 도약의 기회를 얻는다. 그는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에서 궁수 바드로 출격했다. <호빗>의 캐스팅 디렉터는 캐스팅하기 가장 어려운 역할로 바드를 꼽은 바 있다. 바드는 2편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와 3편 <호빗: 다섯 군대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인간’ 캐릭터인 데다, 선악의 경계에서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는 점에서 배우의 매력과 능력, 이미지에 전적으로 기댈 수밖에 없는 캐릭터였다. 게다가 활을 쏘는 캐릭터라 <반지의 제왕>의 레골라스(올랜도 블룸)와의 비교도 피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올랜도 블룸이 우아함에서 앞섰다면 루크 에반스는 카리스마에서 앞섰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호빗: 다섯 군대 전투> 이후엔 톰 히들스턴과 함께 벤 웨틀리 감독의 <하이 라이즈>를 찍었고, 현재는 <크로우>에 캐스팅된 상태다. <크로우>는 알렉스 프로야스의 1994년작 <크로우>의 리부트로 알려진 프로젝트다.

할리우드에서 보낸 5년. 그동안 루크 에반스는 20편의 영화를 찍었다. 연기를 쉰 적이 없다는 말로 이해해도 좋다. 웨일스에서 할리우드로, 연극에서 영화로, 독립영화에서 블록버스터로 여러 길을 가로질러온 배우 루크 에반스의 궤적은 반듯한 미남형 얼굴에 새겨진 그의 깊은 주름들만큼 흥미롭다.

magic hour

피칠갑의 살인마

기타무라 류헤이 감독의 슬래셔영화 <노 원 리브스>에서 루크 에반스는 피범벅의 중심에 선 인물을 연기한다. 그는 이름도 부여받지 못하고 그저 드라이버 혹은 사이코패스 살인마로 불린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루크 에반스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목표물 ‘사냥’을 준비할 땐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공포가 엄습해온다. 루크 에반스의 어두운 기운을 팍팍 느낄 수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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