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무표정도 표정이라면
2014-10-09
글 : 김혜리

※ <프랭크>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업스트림 컬러>(2013)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안의 아담한 영화관에서 보았다. 전작 <프라이머>(2004)에 이어 셰인 카루스 감독이 각본, 주연, 촬영, 편집, 작곡, 배급, 홍보물 디자인까지 도맡은 ‘원맨밴드’ SF다. 이 영화를 또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난초, 유충, 돼지, 레코드 프로듀서, 도둑, 사기꾼 등이 등장하고 운명적 러브스토리가 포함돼 있으며 <베를린 천사의 시>와 <투 더 원더>의 그림자가 비행운처럼 지나간다. 이 영화를 보고도 ‘올해의 괴작’을 따로 꼽는 관객이 있다면 경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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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에서 마이클 파스빈더가 내내 쓰고 다니는 종이반죽(papier mache) 탈은, 가면이라기보다 가짜 머리에 가까운 형태다. 슈퍼 히어로들이나 쾌걸 조로가 이용하는 마스크와 다르게, 프랭크의 탈은 진짜를 대체하는 이목구비를 그려 넣고 뒤통수까지 완전히 가린다. <프랭크>는 배우가 영화에 제공하는 최대 상품성인 ‘얼굴’을 360도 지워버린다. 더욱이 해당 배우는 동시대 대중의 눈길을 한창 사로잡고 있는 미남 스타다. 얼굴뿐만 아니라 배우의 목소리도 부분적으로 손실된다. 작은 구멍이 인형 머리의 귀와 뺨에 나 있긴 하지만 울림통을 거치다보니 파스빈더의 음성은 웅웅거리며 흘러나온다. “틈틈이 대역 안 쓴 거 확실해?” 영화관을 나오는 사람들은 농담 반 진담 반 묻는다. 과연 <프랭크>는 횟감으로 찌개를 끓인 걸까? 마이클 파스빈더의 재능과 매력을 확보해놓고도 단지 ‘튀려고’ 그것을 쓰지 않는 패착을 저지른 걸까? 일단 두 번째 질문은 기각이다. 파스빈더는 분명히 러닝타임 대부분 동안 표정 연기 없이 인물을 표현하는 <프랭크>의 설정에 끌려 합류했기 때문이다. 그럼 파스빈더만큼 뛰어난 매력과 지명도를 가진 배우가 꼭 프랭크 역에 필요했느냐는 질문만 남는다. 잠깐 망설인 다음 나는 “필요했다”고 판단한다. 우리에게 이미 각인된 스타 파스빈더의 이목구비와 표정은, 의당 있어야 할 자리에 없는 것들- 프랭크의 벗은 얼굴과 감정- 을 영화 내내 강력하게 환기시킨다. 즉, 부재를 강조하고 가면 아래 감정을 능동적으로 상상하게 만든다.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결핍감과 뭐가 없는지 모르는 결핍감은 강도가 다르다. 일본의 노(能)건 그리스 비극의 가면이건 동서고금의 연극에서도 가면은 인물을 단일한 캐릭터에 고정하는 게 아니라 관객의 더 풍부한 상상을 자극하는 쓸모를 가진 소품이다. 결정적으로, 레니 에이브러햄슨 감독은 프랭크의 탈을 벗겨 관객이 ‘마침내’ 파스빈더를 보는 순간을 영화에 넣었다. 폭로, 노출, 발견, 그 모든 표현을 뭉뚱그린 이 장면은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일 뿐, 길이가 1분이냐 10분이냐는 차이를 만들지 않는다. 탈을 빼앗긴 프랭크가 정면을 보지 못할 때, 오랜 시간 인형 머리에 쓸린 자리에 생채기가 난 마이클 파스빈더의 옆얼굴이 화면에 드러날 때 솟는 이 딱하고 복잡한 인물을 향한 연민의 크기는, 80분 넘게 그의 얼굴이 가려져 있었기에 가능하다. 요컨대 낭비된 캐스팅은 아니다.

그럼 배우 입장에서는? 마이클 파스빈더는 <프랭크> 시나리오를 읽고 배꼽 빠지게 웃은 다음 흔쾌히 합류했다고 전해진다. 테렌스 맬릭 감독의 제목 미정 신작을 촬영한 직후였다. 굳이 뒷이야기를 찾아보지 않고 결과만 봐도 배우가 즐기고 있는 (물론 표정은 안 보이지만) 기색이 역력하다. <프랭크>에서 파스빈더가 감당하는 연기는 유례없는 영역이다. 대사는 많지만 무성영화적이다. 관객은 정면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프랭크의 얼굴을 그때그때 해석하기 위해 팔다리의 일상적인 허우적거림에도 신경을 곤두세운다. 연기가 ‘무성영화적’이라고 표현하는 경우는 대부분 유려한 마임의 아름다움을 가리키는데, <프랭크>의 경우는 거추장스런 인공 머리의 무게중심을 잡으며 비좁은 시야와 씨름하는 소극적 슬랩스틱이다. 웃음은 자아내지만 코미디를 의도한 연기가 아니고, 보고 있자면 쓸쓸해지는데 본인은 슬퍼하고 있지 않다. 리액션의 제한도 프랭크를 독특한 자리에 데려다놓는다. 비단 상대의 말과 행동에 대한 반응을 얼굴로 확인할 수 없어서만은 아니다. 간혹 주변 인물이 어떤 말을 하고 행동을 취할 때 우리는 인형 머리 안의 프랭크가 그 말을 제대로 들었는지 보았는지, 듣고도 짐짓 못 들은 척하는지 확신할 수 없다. 생각해보면 영화에는 별로 등장하지 않지만 현실의 의사소통에서는 자주 마주치는 순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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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프랭크> 안에서 인형 머리의 기능은 그렇다 치고, 그렇다면 프랭크한테 인형 머리는 무엇일까? 이상하게도 <프랭크>는 이 천재 뮤지션이 어떻게 탈을 쓰기 시작했는지는 슬쩍 언급하지만 그가 ‘왜’ 그랬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프랭크의 카리스마를 숭배하는 밴드 소론프르프브스의 동료들은 머리의 존재를 아예 언급도 안 한다. 간접적으로나마 단서를 주는 대목은, 신참 멤버 존(돔놀 글리슨)과 프랭크의 대화다. “그 머리 말야. 아무래도 좀 무섭잖아?”라는 존의 궁금증에 프랭크는 “사람의 얼굴도 못지않게 무서워. 매끈하게, 매끈하게, 이어지다 갑자기 뻥! 구멍이 뚫리잖아. 입은 또 어떻고. 끔찍한 상처의 가장자리 같지 않아?”라고 돌려서 답한다. 그리고 지금 인형 머리 안에서 자신은 환영하는 미소를 짓고 있다며 신입을 안심시킨다. 아마 프랭크는 자신의 실제 모습을 낯설게 느끼는 일종의 이인증(離人症)을 앓고 있는 듯하다. 정확한 병명은 전문가에게 맡기기로 하자. 아무튼 프랭크에게 인형 탈은 더 강인하고 멋진 페르소나를 덧씌우는 플러스의 무장이 아니라, 너무 기괴한 원래 얼굴을 덮어 진실을 덜 왜곡하도록 도와주는 마이너스의 분장이다. 차라리 중립적인 무표정으로 ‘틀린’ 얼굴을 가린 다음, 언어로 감정을 묘사하는 쪽이 진짜에 가깝다는 입장이다. 프랭크의 성격도 이를 뒷받침한다. 파스빈더의 프랭크는 “24시간 가면을 고집하는 싱어송 라이터”라는 설정이 자동 연상시키는 비타협적 반골 예술가이기는커녕, 주변 사람들에게 제법 친절하고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자기 음악에 열광할 거라는 가능성에 흥분하는 순진한 사내다. 주류 음악의 안티테제로서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한 것이 아닌지라 ‘셀링 아웃’이라는 개념조차 없다. 프랭크의 괴이한 인형 탈은 보기와는 달리 세상을 향한 모종의 선언이나 퍼포먼스 전략이 아니라 흉터를 보완하는 누드 메이크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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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 오두막에서 뚝딱뚝딱 전위적 음악을 창조하는 1시간이 흘러가고, 존의 주도로 밴드가 미국 페스티벌에 진출하는 시점부터 <프랭크>는 자동 비행 모드로 전환되는 듯 보인다. 숱한 뮤지션영화가 그렇듯 시장의 논리가 예술혼을 침해하고 음악적 견해 차이로 밴드가 분열되는 3장이 열린다. 그런데 해이하게 지켜보던 자세를 바로잡게 하는 순간이 온다. 존이 프랭크의 부모를 만나서 나누는 대화다. 소년시절 어느 날, 가면 속으로 숨어버린 아들을 회고하는 부모에게 존은 그래도 정신적 고뇌가 위대한 음악에 보탬이 되지 않았겠냐며 위로하려 든다. 그는 광기와 천재성의 불가분성에 대한 우리 모두의 낭만주의적 믿음을 대변하는 중이다. 그러나 돌아오는 부모의 답은 단호하다. “아니, 고통이 보태준 거 없어요. 음악적 재능은 원래 있었어요. 정신병은 그를 지체시켰을 뿐이에요.” 그들은 심지어 조금 화가 난 것 같다. 나는 광기와 재능이 무관하다는 것이 <프랭크>의 결론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예외적 정신과 창의력은 분명 통하며 <프랭크>가 그리는 이야기는 그 예시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이 영화가 끝내 간과하지 않으려는 부분은, 마음의 병과 창조성은 몹시 어둡고 눅눅한 장소에서 연결된다는 사실이다. 선택의 기회가 있다면 재능쪽을 기꺼이 포기할 만큼. 징그러운 고치에서 아름다운 나비가 날아오르는 광경을 상상하면 못 쓴다. 천재를 다루는 영화치고 이례적으로 <프랭크>는 로맨티시즘을 멀리한다. 그래서 환상이나 신비화에 의탁하지 않고 천재라 불리는 인간을 그리는 방법 하나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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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의 고백

어떤 선물은 카드를 동봉할 필요가 없다. 물건이 스스로 메시지를 속삭이기 때문이다. <지미스 홀>에서 쫓기듯 뉴욕으로 떠났다가 10년 만에 아일랜드의 고향으로 돌아온 지미(배리 워드)는 옛 여자친구 우나(시몬 커비)에게 여행이라도 다녀온 양 선물을 건넨다. 그새 태어난 그녀의 아이들 선물을 먼저 전한 다음 조심스럽게 “이건 네 거야”라며 상자를 안겨준다. 늦은 밤, 우나가 열어본 상자에는 꽃잎처럼 하늘거리는, 그녀의 눈동자와 같은 푸른색의 드레스가 곱게 개켜져 있다. 옷 선물은 “난 너를 이런 모습으로 상상해”라는 의미다. 우나를 가장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것 외에 어떤 실용성에도 무관심한 드레스를 골랐다는 사실이, 포장의 세심한 색과 매듭이 남자의 여전한 사랑을 전한다. 드레스를 몸에 대보는 여자는 울 것만 같다. 이번 영화에서 켄 로치 감독은 대책 없이 로맨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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