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청춘의 운명에 대한 추도문 <킬 유어 달링>
2014-10-15
글 : 송경원

모든 문학은 누군가에게 부치는 연애편지다. 다만 막 피어오르기 시작한 정념의 불꽃이 보편타당한 형식으로 정제되기까지는 적지 않은 좌절의 밤과 상실의 순간들이 요구된다. 그리하여 늙고 노쇠한 문학가들은 말한다. 작품을 쓰기 위해선 형식과 규칙에 맞춰 “사적인 감정을 죽이라”(Kill Your Darlings)고. <킬 유어 달링>은 틀에 박힌 제도권의 그물을 찢어발겼던 1950년 미국 비트 세대 작가들의 출발을 담은 영화다. 영화의 제목은 이들을 억누르는 제도권 문화의 무게인 한편 “사랑하는 것들을 죽인” 뒤에야 성장할 수 있는 청춘의 운명에 대한 추도문이기도 하다.

1950년 중반 미국 문학사조를 뒤엎으며 등장한 비트 세대 문학은 절망과 패배의식 속에서 ‘목적 없음’을 공유하는 반항의 상징이었다. 영화는 비트 세대의 선구자 앨런 긴즈버그(대니얼 래드클리프)의 시점에서 그에게 욕망과 집착이라는 수레바퀴를 달아준 뮤즈 루시엔 카(데인 드한)와 얽힌 ‘의문의 밤’에 대해 서술한다. 정신병에 시달리는 어머니를 피해 도망치듯 컬럼비아 대학에 진학한 앨런은 자유분방하고 퇴폐적인 매력을 지닌 루시엔 카에게 단번에 매료된다. 루시엔에게 전염되듯 새로움에 대한 열망에 불타오르는 앨런은 ‘뉴 비전’이라는 새로운 문학운동을 시작한다. 이야기 자체는 천재와 뮤즈를 다룬 여타 영화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서로 이끌리다 중독되고 집착 끝에 반목하고 사그라진다. 하지만 대개 여성에게 배정되었던 뮤즈의 자리를 남자가 차지하자 화면 내내 채워지는 화학반응의 농도와 색이 사뭇 달라진다. 겉보기엔 명백히 연애담이건만 중반까지 짐짓 그렇지 않은 척하는 새침함이 오히려 수면 아래 감각을 더욱 뜨겁게 지핀다. 데인 드한이 내뿜는 퇴폐적이고 자기파괴적인 매력은 노골적으로 성적인 지점을 향하는데, “드디어 사막에 오아시스가 나타났군”이라며 반갑게 앨런을 맞는 루시엔의 눈빛은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성은 물론 관객마저 유혹하는 치명적인 분위기로 흠뻑 젖어 있다. 과감한 연기 변신을 시도한 대니얼 래드클리프의 노력이 보이지 않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데인 드한의 인력 앞에서 다소 빛이 바래는 게 사실이다. ‘감각을 깨운다’는 뉴 비전 운동처럼 화려하고 몽환적인 연출로 청춘이란 이름의 화학반응을 전달하지만 빛나는 초•중반에 비해 후반 루시엔의 비밀과 서로에게 품고 있는 감정을 풀어내는 과정이 다소 불친절해 인물의 심연에 다다르지 못하는 게 아쉽다. 영화가 미처 예술로 승화시키지 못한 미완의 관능마저 그들의 청춘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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