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드 삐삐롱스타킹, 원더버드, 모조소년의 보컬이었던 고구마가 권병준이라는 본명으로 미디어퍼포먼스, 사운드아트를 선보인 지도 4년이 지났다. 1990년대 말 파격적인 무대매너와 실험적인 전자음악 사운드를 선보였던 그는 2005년 네덜란드로 유학을 떠나 ‘아트-사이언스’ 석사과정을 마쳤고 그곳에서 하드웨어 엔지니어로 취직했다. 곡을 쓰고 노래를 부르던 사람이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소리를 만들고 악기를 만들게 된 것이다. 공연 <모든 것을 가진 하나>(2010), <여섯개의 마네킹>(2011) 등을 통해 넘치는 실험정신을 선보인 그가 최근 신작 <또 다른 달 또 다른 생>(10월9일과 10일 LIG아트홀 강남에서 공연)을 무대에 올렸다. <또 다른 달 또 다른 생>은 10여년간 그가 해온 작업을 하나로 꿰어놓은 공연. 첫 공연을 사흘 앞둔 날 저녁, 리허설 중인 공연장을 찾았다. 무대 정면엔 수증기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려오는 ‘수증기 스크린’이, 왼쪽엔 피아노를 조립해 만든 ‘하이브리드 피아노’가, 오른쪽엔 평균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권병준은 무대에서 연주와 연기와 연출을 동시에 선보이고 있었는데, 그에게선 예술가의 예민함 대신 공학도의 치밀함이 느껴졌다. 오차는 허용치 않지만 실수는 품을 줄 아는, 너그러운 완벽주의자 권병준을 만났다.
-손에 웬 반창고가 그렇게 많이 붙어 있나.
=좀 다쳤다. 이것저것 만들다보니. 어쩌다 그사이 ‘공돌이’가 돼버려서….
-이번 공연의 주제와 컨셉은 무엇인가.
=LIG문화재단의 협력아티스트가 되고서 올봄에 첫 번째 공연 <싸구려 인조인간의 노랫말>을 열었다. 그때 함께 공연하려고 모은 사람들이 시스템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연극 연출가인 적극씨는 극장이 아닌 야외에서만 공연을 하던 분이고, 무용하던 분들도 극장에서 춤을 안 춘 지 오래됐다. 쉽게는 아웃사이더라고 말할 수 있는데, 바깥으로 나갔던 사람들을 다시 극장으로 데려왔다. 이번 공연은 극장의 안과 밖이라는 화두에서 시작했다. 밖으로 나간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안으로 들어올 수 있고,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유연하게 밖으로 나갈 수 있는지. 그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모습이 공연에선 평균대에서 기다란 봉을 짚고 걷는 장면으로 표현된다. 또 안과 밖에 대해 얘기하면서 제시하고 싶었던 제일 큰 메타포가 수증기로 만든 벽이었다. 통과할 수 있는 벽. 유리벽은 안과 밖을 통과할 수 없지만 수증기로 벽을 만들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안에서의 삶과 밖에서의 삶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라도 해보고 싶었다. 그렇다고 내가 답을 낸 것은 아니고.
-이 공연을 어떻게 정의하면 좋을까. 이것도 일종의 사운드아트인가.
=내가 소리로 무언가를 하는 사람이긴 한데 소리만 가지고 하자니 사람들이 너무 힘들어하더라. 또 새로운 악기를 만들어 무대에서 사용하는데, 새로운 악기는 새로운 제스처를 필요로 한다. 악기마다 고유의 제스처가 있지 않나. 바이올린은 이렇게 켜고, 피아노는 이렇게 치고 하는. 내가 해온 것들이 새로운 몸동작, 새로운 소리, 새로운 오브제, 새로운 악기를 만들고 실험하는 작업이다보니 공연에 극적인 요소들이 첨가되는 것 같다. 한마디로 공연을 정의하기는 애매하지만 미디어포퍼먼스 혹은 뉴미디어퍼포먼스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공연에서 사용되는 하이브리드 피아노는 올해 9월 방송된 EBS 다큐멘터리 <다큐프라임> 3부작‘악기는 무엇으로 사는가’ 편에서 제작된 악기다. ‘악기는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과 새로운 악기를 만드는 작업을 진행했다. 다큐멘터리와 이번 공연의 연관성이 있나.
=연관성을 찾자면, 다큐멘터리는 지난해 고생한 프로젝트고 공연은 올해 고생한 프로젝트라는 것. 고생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웃음)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도 악기와 상관없는 사람들을 모았다. 그들에게서 음악의 초심 같은 것을 느낄 때가 많다. 이번 공연을 함께하는 친구들 중에도 음악이나 공연과 무관한 사람들이 서너명 있다. 내가 재밌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모아 함께 공연을 하고 있다.
-<또 다른 달 또 다른 생>을 두고 ‘권병준이 지금껏 해온 작업의 집대성’이라고도 하더라.
=부담스러운 말인데 한편으론 맞는 말이다. 집대성이라는 말은 거창한데, 나이가 들다보니 이쯤에서 정리하고 갈 때가 된 것 같다. 이런 공연을 앞으로 계속할지는 모르겠다. 준비해야할 것도 많고, 그렇다고 많은 사람들이 보러 오는 것도 아니고, 지원을 받지 않으면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공연이다. 그런데도 할 수 있는 선에서 끝까지 해보는 거다.
-2005년부터 네덜란드에서 지내다 한국에 들어온 지 이제 3년 됐다. 밴드에서 곡을 쓰고 노래를부르던 사람이 갑자기 네덜란드 헤이그 왕립음악원으로 유학을 갔는데, 네덜란드로 훌쩍 떠난 이유는 뭔가.
=처음엔 답답해서 나갔다. 1년만 나가 있으려 했는데 길어졌다. 한 길을 쭉 걸어서 달인이 되고 마스터가 되는 것도 의미있지만 나는 성격상 그렇게 못한다. 음악이란 것도 뱅뱅 돌지 않나. 10년 전의 음악이나 지금의 음악이나 바뀐 게 별로 없다. 한계도 넓혀보고 싶었고, 실험도 해보고 싶었다. 자유롭게 무언가 해보기 좋은 곳이 네덜란드였다.
-앞서 ‘공돌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네덜란드의 전자악기 연구개발기관 스타임(STEIM)에 하드웨어 엔지니어로 취직했다. 음악에도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있다면, 소프트웨어 관련 일을 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하드웨어 개발자가 됐다.
=소프트웨어도 하고 하드웨어도 다뤘는데, 하드웨어 개발자가 된 것은 전적으로 내 선택이 아니었다. 먹고살려니 그 길밖에 없었다. 네덜란드에선 내가 외국인 노동자 아닌가. 찬밥, 더운밥 가릴 수가 없었다. 35살에 유학을 갔다. 산수도 까먹었는데 프로그래밍 공부하고 하드웨어 공부하려니 그게 어디 쉽겠나. 적성에 맞는지 어떤지도 모른 채 악으로 했다.
-1년만 있다 돌아오려던 계획은 왜 장기 체류로 바뀌었나.
=그 곳에서 얻을 게 있다는 걸 알았다. 말이 안 되는 게 스타임이 정부 보조로 40년 넘게 굴러가고 있는 회사다. 내가 1971년생인데, 71년부터 그곳에서 일해온 분들이 있다. 40여년을 실험적인 음악, 전자악기 만드는 곳에서 일하는 분들이 역사의 산증인 아닌가. 그런데 그들의 삶이 참 소박하다. 내 작업에 대한 솔직한 피드백도 얻을 수 있었고.
-어느 인터뷰에서 “누구에게도 잡히지 않고 계속 잘 도망다니는 것이 내 할 일이라고 본능적으로 느낀다”라고 말했다. 무엇으로부터 그렇게 도망치려는 건가.
=익숙함으로부터. 무언가 익숙해지고 그게 밥벌이가 되면 거기서 벗어나기 힘들어진다. 나이가 들수록 더 그렇다. 나 역시 무대에서 노래하는 일이 어느 순간 익숙해졌다. 내가 이 일을 계속한다고 인간문화재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과연 진짜 내 것일까 싶기도 했다. 우리가 하는 음악이란 게 서양의 것을 흉내 내는 작업들이지 않나. 편하고 익숙한 것에서 좀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삐삐롱스타킹에서 원더버드로, 또다시 모조소년으로 밴드의 결성과 해체도 잦았다. 당시에도 매번 새로운 시도를 보여줬었는데, 그럼에도 밴드 생활에 익숙해진다는 느낌이 있었나.
=그 생활이 완전히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했던 것을 통틀어 대중음악이라 칭한다면, 대중음악의 속성상 무언가를 계속해서 반복해야 되는 게 있다. 전에 있던 코드들, 어휘들, 과거의 레퍼런스에서 출발하는 게 많다. 음악의 중요한 기능이 향유하고 즐기는 건데, 그 외적인 기능에 더 다가가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예를 들면 향유하기 싫은 것을 하는. (웃음) 물론 지금의 내 작업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대중음악을 하는 한 제작, 유통, 매니지먼트의 과정에서 얽매이는 것들이 생길 수밖에 없더라.
-10년도 더 전에 영화배우 자격으로 <씨네21>과 인터뷰한 적이 있다. <죽이는 이야기> <건축무한 육면각체의 비밀> <우렁각시> 등에 출연했었는데 다시 연기할 생각은 없나.
=지금도 하고 있지 않나. 이게 연기지, 누가 음악한다 그러겠나. 그땐 연기가 좋아서라기보다 진짜 돈 벌려고 연기했다. 알바지, 알바.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음악은 어떤 음악인가.
=계속 음악을 하고 있을지 나도 진짜 알 수가 없다. 새로운 음악이 나올 수 있는 풍토를 만드는 데 오히려 더 관심이 많다. 아마도 좋은 음악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 같다. 일종의 환경운동?! (웃음)
<싸구려 인조인간의 노랫말>
일시: 10월24일 오후 8시
장소: LIG아트홀 부산
권병준의 <또 다른 달 또 다른 생>은 10월9일과 10일 두번의 서울 공연으로 끝이 났지만, 그가 올해 5월 선보인 <싸구려 인조인간의 노랫말>은 10월24일 부산에서 재공연된다. 권병준과 적극이 공동연출하고, 창작그룹 이악, 윤사비, 정무키가 협업한 <싸구려 인조인간의 노랫말>은 음악, 미술, 연극, 기계공학 등 전공 분야가 다른 이들이 모여 진행한 워크숍의 결과물을 선보인 공연이다. 익숙한 사물들은 의외의 소리를 내는 악기로 재탄생하고, 그 악기와 장치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상호반응한다. 저항하고 반항하는 사물들과 사람들이 만든 뉴미디어퍼포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