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게 일반적인 세상에서 <초콜렛 도넛>의 루디(앨런 커밍)가 별나 보일 만도 하다. 옆방 사는 싱글맘과 그의 아들이 계속 신경 쓰이는 눈치니 말이다. 옆방 그녀가 소음에 가깝게 음악을 틀어대서도 아니고, 종종 낯선 남자를 집 안에 끌어들여서도 아니다. 루디의 시선을 끄는 건 그 집 아들. 엄마로부터 아무런 돌봄도 받지 못한 채 방치된 그 소년,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마르코(아이작 레이바)다. 마약 복용으로 체포된 엄마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마르코가 아동보호소로 보내질 처지가 되자 루디는 아이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와 변변찮은 아침상을 차려주고 초콜릿 도넛을 좋아한다는 마르코에게 “끼니로 도넛 먹으면 안 좋아요”라며 엄마처럼 잔소리를 한다. 이 무슨 옆집 남자의 오지랖인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루디의 행동은 어색하지도 과도한 친절로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마르코를 향한 루디의 다감하고 세심한 눈길은, 무수한 순간 <초콜렛 도넛>에 온기와 활기를 불어넣는다.
마르코의 다정한 이웃, 루디를 거부할 수 없게 만드는 건 두말할 것도 없이 앨런 커밍이 내뿜는 생동하는 에너지다. 대학 졸업 전부터 지금까지 30년 이상을 배우로 살아온 앨런 커밍은 <초콜렛 도넛>에서 재발견됐다고 말해도 좋을 만큼 돋보인다. 마르코의 이야기와 함께 극을 이끌어나가는 건 게이인 루디가 어떻게 세상의 편견과 차별 앞에 투쟁해나가느냐인데 앨런 커밍은 이 지난한 진흙탕 싸움에 기꺼이 발을 들인다. 캐릭터를 표현하는 앨런 커밍의 방식도 한껏 무게 잡고 고뇌하는 쪽이 아니다. 큰 소리로 웃는 대신 치아를 다 드러내며 짓는 차분한 미소, 눈가의 부채살 주름들을 하나하나 지그시 눌러가며 만들어내는 눈웃음, 버선코처럼 말려 올라간 긴 속눈썹이 주는 화사함까지. 웃는 얼굴로 투쟁을 시작하는 루디를 보고 있으면 절로 그를 응원하고 싶어진다. 한껏 위축돼 있을 마르코에게 루디가 자신의 손을 내밀며 “손을 잡아”라고 말할 때, 사회적 약자를 코너에 모는 세상에서 그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는 건 약자들 사이의 연대라고 온몸으로 웅변하는 것 같다. 비교적 최근에 성소수자 역할로 제 이름을 새롭게 환기시킨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의 자레드 레토와 비교해봐도 앨런 커밍의 부드럽고 온화한 분위기는 독보적이라 쉽게 눈길을 거둘 수가 없다(지난해 앨런 커밍은 자레드 레토가 속한 록밴드 ‘서티세컨즈 투 마르스’의 <시티 오브 엔젤스> 뮤직비디오에 출연했다. 재미난 인연이다). 자레드 레토가 “메소드 방식으로 내면과 외면을 바꿔나가며 인물에 몰두했다”면 앨런 커밍은 이미 그 자신 안에 루디를 품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실제로 앨런 커밍은 “내 성정체성은 바이섹슈얼이며 일부일처제는 실현 가능한 제도라고 보지 않는다”는 입장을 오래전에 밝혔다. 자신과 같은 성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을 지지하고 그들의 권리 향상을 돕는 데 누구보다 앞장서온 행동파이기도 하다. 자신이 런칭한 향수의 수익금 전액을 동성애자 인권 단체에 기부했고 에이즈 환자들을 지원하는 기금 마련을 위해 곡을 만들기도 했다. <초콜렛 도넛> 작업 뒤에는 미국 내 LGBT와 그들 손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들을 지지하는 모임으로부터 후원자로 활동해줄 것을 요청받기도 했다. 그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나가는 사람이자 삶과 연기에 간극을 두기보다는 교집합을 조금이라도 더 만들어가려는 배우인 것이다. 그런 그가 ‘돌연변이에게 자유를’(Mutatnt Freedom Now)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엑스맨2>(2003)의 돌연변이 커트 바그너(밤에 기어다니는 큼지막한 지렁이를 뜻하는 ‘나이트 크롤러’로 불리기도 한다)를 연기할 땐 그조차 얼마나 짜릿했을까. 가브리엘 대천사가 인류에게 남겼다는 천사의 상징들을 온몸에 새긴 커트가 “돌연변이들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길” 원하며 “나를 괴물 취급하는 사람들을 미워하기보단 동정한다”고 말할 때 그건 앨런 커밍 자신이 세상에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돌연변이는 진화의 핵심’이라는 영화 말미의 전언은 곧 정상과 비정상의 이데올로기를 뒤흔드는 차이와 다름을 향한 갈구였다. 또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시대에서 즐겁게 뛰어노는 판섹슈얼(pansexual)의 상징”이라고 스스로를 칭하는 앨런 커밍이 추구하는 삶이었다.
세상이 만들어놓은 경계들을 가뿐히 뛰어넘는 그의 분방한 발자국은 필모그래피에도 고스란히 찍혀 있다. 배우에서 영화감독, 각본가, 작곡가, 가수, 소설가, 성우, 사업가까지. 이 많은 직업을 자신의 직업란에 채워넣을 수 있는 건 분명 재능이다. 스코틀랜드 태생의 그는 글래스고의 왕립스코틀랜드예술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팝과 TV프로그램을 소재로 칼럼을 써 잡지에 기고하며 대중문화에 대한 감수성을 키워왔다. 대학 진학 이후 본격적으로 연극 무대에 오르며 연기와 퍼포먼스의 기본기를 다져오다 1994년 <서클 오브 프랜즈>로 할리우드에 진출한다. 이후 그가 처음으로 대중과 관계자들에게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은 건 브로드웨이 뮤지컬 <카바레>(1998)이다. 이 작품에 엠시 역으로 등장해 연기력을 인정받은 그는 토니상을 비롯한 다수의 상을 휩쓸며 공연예술계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초콜렛 도넛>에서 루디가 밤무대 립싱크 가수에서 시작해 진짜 자신의 목소리로 공연을 펼치는 엔딩까지 달려갈 수 있었던 건 탁월한 가무 능력을 지닌 앨런 커밍에 힘입은 바가 크다. 연극, 뮤지컬, 영화를 쉼없이 오가면서도 그가 늘 잊지 않는 건 재치와 해학성 짙은 웃음을 연기에 녹이는 일이다. 뮤지컬 드라마 <버레스크>(2010)에서 티켓 부스에서 일하는 알렉스로 아주 잠깐 등장했을 때조차 그의 얼굴에는 연극적인 익살이 더해져 있었고, <더 템피스트>(2010)의 세바스티앙이나 <엠마>(1996)의 엘튼처럼 시대극 복장을 하고 취하는 조금은 과장된 몸짓에도 위트가 있었다. 192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황무지를 개척하며 살아가는 이민자 프란센으로 등장했던 <스윗 랜드>(2005)에서는 또 어떤가. 보수성 짙은 농민 사회에서 이방인에게 먼저 호의를 베푸는 것도, 농담으로 긴장감을 깨뜨리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에서 앨런 커밍은 그가 살면서 한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대가족(자식을 아홉인가 열인가를 두었는데 화면에서 미처 다 셀 수가 없었다)의 가장으로 등장해 자식들 앞에서 하모니카까지 불러주는 인자한 아버지가 되는 경험까지 했다.
무게 잡지 않고도 극의 중량감을 더해온 앨런 커밍은 최근 자신의 실제 삶을 잡고 늘어졌던 묵직한 돌덩이를 내려놓으려 시도 중이다. “가족을 볼모로 삼은 폭력적인 아버지 때문에 내 어린 시절은 불행했다”고 여러 차례 말해온 그가 아버지와 가족에 대한 회고록을 펴낸 것이다. 쉰살을 앞두고 있지만 여전히 혼자 펍에 들러 술 한잔 걸치고 무대에 올라 노래 부르는 일이 좋다는 이 자유분방한 예술가에게도 가족은 지금껏 풀지 못한 어려운 숙제였나 보다. 억압과 폭력에 누구보다 앞서 반기를 들어온 그였기에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들춰내는 건 곧 앞으로 한발 나아가려는 그의 용기로 읽힌다. 자신의 고향인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지지하는 캠페인에도 적극 참여한 그에게 자유는 영원한 화두일 것이라 짐작된다. <초콜렛 도넛>에서 루디가 마지막에 열창한 곡 역시 밥 딜런의 <아이 셸 비 릴리즈드>(I Shall Be Released)가 아니었던가. <초콜렛 도넛>의 주제가이자 루디의 테마곡이며, 앨런 커밍이 모든 억압받는 자들에게 전하는 헌사였을 것이다.
magic hour
얼굴이 길어서 슬픈 그대여
웃는 낯이 익숙한 앨런 커밍의 얼굴에 불안과 실망의 기색이 역력한 작품이 있다. 화려하고 콧대 높은 영국 미술계를 배경으로 하는 <부기우기: 상위 1%의 섹스>인데 그는 여기서 큐레이터가 되고자 하는 게이 듀이로 등장한다. 시나리오를 읽기도 전에 그가 이 작품에 출연하기로 마음먹은 건 그가 오랫동안 존경해온 배우 샬롯 램플링이 출연하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듀이라는 인물에 대한 애정도 더해졌다. “오직 듀이만이 이 영화에서 다정한 사람으로 나온다. 나머지 인물들은 하나같이 끔찍한데 말이다.” 그의 말처럼 인정욕구로 똘똘 뭉친 사람들 사이에서 듀이는 믿었던 친구에게 제대로 배신당하고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다. 앨런 커밍의 길쭉한 얼굴이 더욱 길어지며 듀이의 울적함을 배가한다. 눈을 좀 낮추라는 친구의 조언에도 “이 지난한 게임을 아주 오랫동안 해왔어”라고 맞받아치는 듀이. 불안해 보이지만 자신이 갈 길이 어디인지 아는 사람의 고집스러움이 함께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