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가난한 귀족
2014-10-23
글 : 김혜리
ⓒNichol·as Nixon. Fraenkel Gallery

<브라운 자매>는 미국 사진작가 니콜라스 닉슨이 1975년부터 2005년까지 매년 한 차례씩 아내와 그 자매들을 모아 촬영한 장기 연작이다. 포트레이트인 동시에 몸과 옷차림에 스며든 시간을 기록한 이 작품에서 닉슨은 네 사람을 항상 일정한 순서로 세워, 세월에 따른 자매들의 미묘한 관계 변화까지 포착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보이후드>가 극장에 도착한 지금 말하자면 ‘시스터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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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지하에 숨어 있는 아담한 영화관에서 셰인 카루스 감독의 <업스트림 컬러>를 보았다. 미술관 입장권 외에 따로 티켓은 살 필요가 없다. 아무도 팝콘을 먹지 않으며 예의를 좀 차리는 분위기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 스크린 아래쪽 벽에 있는 전원을 용케 발견한 관객이 휴대폰 충전기를 꽂아두고 착석하는 광경을 보고, 상당히 감명받았다. 알뜰한 눈썰미다. 컴퓨터의 한글 자막을 스크린에 겹쳐 띄우는 방식의 상영이었는데 도중에 자막이 한동안 실종되는 바람에, 소리 없는 동요가 일었다. 뭐, 자막이 있어도 어리둥절하기는 별반 차이가 없었을 법한 영화다. 2013년 각종 비평가 집단의 결산에 오르내린 화제작이었으나 국내에서는 미처 개봉되지 않은 셰인 카루스 감독의 SF 판타지 <업스트림 컬러>는 원체 이야기 구조도 복잡할뿐더러 구조를 채우는 인물과 일화 사이의 연관마저 트릿해서 실체보다 더 복잡하게 느껴지는 영화다. 그래도 구태여 줄거리 설명을 시도해보자면, 크리스(에이미 세이메츠)라는 여자와 제프(셰인 카루스)라는 남자가 정체 모를 외부의 힘에 밀려 각자의 운명을 얽고, 이 과정에 사기꾼과 돼지치기 겸 레코드 프로듀서와 난초 채집자가 한몫씩 거드는데…. 음, 역시 그만두는 편이 좋겠다. <업스트림 컬러>의 시놉시스 요약은 향후 개봉 리뷰를 담당할 불운한 기자에게 넘긴다. 아무튼 <업스트림 컬러>는 직접 알지 못하는 타자로부터 영향을 받는 일군의 사람들을 바라본다. 사랑부터 역병에 이르기까지 현대인에게 닥치는 거대한 사태의 상류(upstream)를 추적해 거슬러 올라갈 자유의지가 우리에게 있는지 넌지시 묻는다. <업스트림 컬러>의 인물들은 동일한 영향의 우산 아래 있지만 서로를 만나지 못한다. 예컨대 먼 벌판에서 돼지가 고통을 느끼는 순간 도시의 여자도 신음한다. 물리적으로 떨어진 채 그저 상호공명한다. 이런 면을 두고 셰인 카루스 감독의 예전 직업을 들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가 만든 영화답다”고 평하는 리뷰어도 있다. 그럴싸한 유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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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인터뷰를 뒤져본 결과, 셰인 카루스 감독 본인은 엔지니어로서의 이력을 공개한 까닭이, 데뷔작인 저예산 SF <프라이머>를 어떻게든 홍보하려는 고육지책이었을 뿐이라고 멋쩍어 한다. 엔지니어로 근무하는 동안 본업은 안중에도 없었기 때문에 “감독으로 전신(轉身)한 엔지니어”라고 말하기 민망하다는 고백이다. 이 내용을 포함한 영국 영화잡지 <엠파이어>와 셰인 카루스의 긴 인터뷰는 두루 재미있다. 난해하기 짝이 없는 작품과는 딴판으로 카루스의 말에는 신세대 영화작가의 철학 피력 비슷한 것은 없다. 걱정스러울 정도로 순진한 당장의 계획만 있다. 우선 단돈 7천달러로 (무려) 시간여행을 소재로 다룬 SF 스릴러 <프라이머>를 찍은 과정이 순박하다. 독립영화계의 입지전 격인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의 <엘 마리아치> 제작비 7천달러가 뇌리에 금과옥조처럼 박혀 어떻게든 그 액수를 맞추려고 했다고 카루스는 돌아본다. 마스터 숏은 당연히 찍을 엄두를 못 냈고, 다른 영화에서 쓰고 남은 자투리 필름을 쓰다 보니 언제 떨어질지 몰라 컷도 빨리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편집은 카메라 안에서 이루어졌다. 살다보면 우리는 종종 실질적 의미가 없는 골라인을 머릿속에 그어두고 그것을 향해 달려갈 때가 있는데, 셰인 카루스 감독의 경우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결승선을 열악한 환경에서 영화를 완성할 수 있는 동력으로 삼았던 모양이다.

한편 카루스는 <프라이머> <업스트림 컬러>에서 각본, 촬영, 편집, 작곡, 배급에다 주인공 연기까지 도맡았다. 솔직히 셰인 카루스의 연기는 훌륭한 편이 아니다. 긴장한 표가 난다. 유능한 전문 배우가 연기했다면 영화의 완성도에는 훨씬 유익했을 것이다. 그런데 개런티를 절약하고자 하는 동기는 둘째치고 카루스가 <엠파이어> 기자에게 들려준 연기 체험 소감이 솔깃하다. “영화 안쪽에 연기자로서 직접 들어가 보고 나니 배우와 연기에 대해 뭔가를 깨우치게 됐다. 연기하는 모습을 옆에서 바라볼 때는 결코 알 수 없었던 연기 도중 배우에게 일어나는 현상을, 곁에서 연기함으로써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불가피하게 액션과 리액션을 해야 할 상황에 던져짐으로써 나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영화의 본질적인 정보를 갖게 됐다.” 내 마음이 흔들린 부분은 셰인 카루스가 자신의 영화를 관객과 평단에게 평가받아야 할 결과물이라기보다, 영화를 잘 배우는 과정과 순진하게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나아가 본인의 삶을 풍부하게 하는 도정과 다르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한편 인터뷰 당시 <업스트림 컬러>의 블루레이 커버를 손수 디자인하고 있던 셰인 카루스는 <업스트림 컬러> 차기작의 제작비가 나올 구석이라고는 오직 <업스트림 컬러>가 거둘 수익뿐이라고 기자에게 토로했다. 제일 힘든 일은 투자자 앞에서 영화의 시장성을 설득하는 ‘피칭’이라고도 덧붙였다. “아무도 제작비를 대주지 않을 테니까 나는 이번 영화로 벌어서 다음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이번 영화가 버는 1달러, 1달러가 다음 영화에 남김없이 소비될 거라는 사실이 갖는 멋진 점이 있다.” 이 대목에서 나는 뜬금없이 오래전 하정우 배우에게 “배우의 섹시함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요?”라고 질문했을 때 들었던 대답을 떠올렸다. 하정우는 “정당한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 그 대가와 성취감을 돌려받는 패턴에는 일종의 정직함이 있다. 어디에 무릎 꿇을 일이 없으면 자신감이 나오고 섹시함도 그 자신감과 무관하지 않다”는 요지로 답했던 것 같다(물론 스타 배우와 독립영화 감독이 처한 환경은 천지 차이다). 이윤과 명예를 우선 목표로 경쟁하지 않으면서도, 비굴해지는 법 없이, 자신의 창작과 삶을 일치시킬 수 있다는 가정은 매혹적이다 못해 목가적이다. 뻥 튀겨서 나를 팔지 않아도 되는 삶. 그렇지만 자신을 근근이 부양할 정도는 되는 삶. 셰인 카루스 감독은 오늘도 온갖 근심에 잠 못 이룰지 모르지만, 그것이 철없는 내가 생각하는 진짜 귀족의 삶이다.

10/3

공항으로 향하는 길, 하늘은 청하고 공기는 선뜻했다. 영화제에 참가하기 위해 부산에 도착했다. 관객과의 대화(GV)를 진행하는 일과 무관하게 관람한 첫 번째 영화는 멕시코 SF 스릴러 <더 인시던트>. 건물의 비상계단, 고속도로, 엘리베이터 등 평범한 장소를- M. C. 에셔의 판화에 나오는 것 같은-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 폐쇄 공간으로 설정해 비싼 특수효과가 불필요한 평행우주 판타지를 연출한 뚝심 있는 장르영화였다. 극장 입구에서는 아이작 에즈반 감독이 긴장된 얼굴로 입장하는 관객을 살피고 있었다. 상영이 시작되면 그는 분명 사운드와 영사 상태를 체크하느라 조바심을 내리라. 영화제에서 처음 작품을 공개하는 감독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구민체육센터 실내수영장 2층에서 유리창을 통해 자신의 아이가 헤엄을 잘 치고 있는지 두근거리며 지켜보는 엄마들의 그것과 어찌 그리 흡사한지 모르겠다. 가라앉으면 안 돼! 계속 헤엄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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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문으로 들었소

부산영화제의 소박하지만 특별한 즐거움은 밤의 포장마차와 상영 후 30분에 달하는 GV에 있다. 영화인들은 개봉의 긴장에서 자유로워진 상태로 미지의 영화를 과감히 선택해준 관객에게, 그리고 이미 관람한 영화를 굳이 재회하러 온 관객에게 마음을 흘린다. 그렇게 내가 부산에서 주워 담은 사소한 이야기들. <자유의 언덕>의 배우 가세 료는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비포’ 시리즈를 사랑하며 가능한 한 이 연작이 계속되길 소망한다. <도희야>의 정주리 감독은 배두나 배우가 “어른이 아이를 때리는 건 아주 나쁜 일이야”라고 극중 도희에게 가르쳐주는 대사를 현장에서 헤드폰으로 듣다가 울었다. <사랑이 이긴다>로 영화에 데뷔한 뮤지컬 디바 최정원 배우는 스크린을 바라보며 주름을 없애지 않길 잘했다고 기뻐했다. 그리고, 봉준호 감독은, 타고난 곱슬머리다. 펌한 적이 결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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